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72화 (172/214)

제172화

“참으로 뻔뻔하군.”

이안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남자를 향해 비소를 날렸다.

저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낯짝을 보고 있노라니…….

<헤헤. 우리 아빠는 진짜 멋진 사람이에요.>

연회 때 만난 아이의 환한 웃음이 이안의 염통을 쑤셨다.

이 통증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기에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연민이었다.

비단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런 반응이 당연할 진데.

“시궁쥐보다 못한 새끼.”

이안은 다시 한번 조소를 입술에 내걸었다.

10년이다.

1년도, 3년도 아니고 무려 10년.

이곳에 정착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살아간 세월을 계산해 보면 그리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기어이 처자식을 배신하려 하다니.”

선택지는 분명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한 아이의 아빠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남고자 했다면 그가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도 있었다.

한데도 끝끝내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려 했다.

그리고 폭탄을 터트려 이 마을을 통째로 도려내려 했다.

제 새끼가, 살 비비고 산 제 아내가 버젓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을.

그 빌어먹을 살리카 가주에게 충성하느라.

하는 꼴을 보니 딱 그런 유형이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은 무조건 옳고, 그 일에 누군가가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진 자.

“그냥 염병할 놈이었네.”

이안의 한기 어린 눈빛에도 남자는 태연했다.

그뿐일까.

도리어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당당함을 드러냈다.

“서로의 생각과 신념이 다를 뿐, 내가 비난받을 까닭이 없다.”

“그 신념이 남을 해칠 때는 얘기가 달라지지.”

“그래서 신념이라 하는 거지.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고귀한 희생을 하는 것뿐이고.”

남자는 뻔뻔함을 옷처럼 두르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줄곧 그러다 돌연 느물거리는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 꺾임에는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이 빼곡히 차 있었다.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가진 정보가 필요한 게 아니냐는.

이를테면 아무도 모르는 폭탄의 존재라던가.

하니 이 대화의 결말을 본인이 정할 수 있다 여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뷔트시겐의 적자가 똑똑하다는 소문은 허명이었나 보군.”

“…….”

“그렇게 비난을 할 시간에 내 비위를 맞추는 게 좋을 텐데.”

“내가?”

“그래야 내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지 않겠나.”

“아, 알랑거리면 정보를 주긴 할 거고?”

“뭐, 하는 정성을 봐야겠지만 못 줄 것도 없지.”

애초 미끈한 첫인상이 참 별로였던 자였다.

생긴 대로 논다고 아주 꼴값에 육갑을 제대로 떨고 있었다.

헛웃음을 터트리는 이안의 표정을 깨트리고 싶었는지, 곧바로 남자가 나불거렸다.

“아, 내가 가진 정보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먼저 하나만 풀어볼까?”

자신만만한 남자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이곳에 폭탄을 심어두었다.”

“폭탄을 심어두셨다?”

“정확히는 수십 개의 폭탄이라고 해야겠군. 그게 터지면…….”

남자는 어찌 될지 알지 않냐며 눈을 찡긋했다.

확 눈깔을 파서 먹물을 쭉 짜버릴라.

주먹을 부르는 느끼한 짓에 이안은 손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

바르고 고운 말만 쓰고 싶었는데 그렇게 두지를 않는다.

개놈 새끼!

“어디서 태연하게 그딴 소리를.”

“도련님이 자꾸 내 심기를 건드시네. 그래 봐야 좋을 거 없을 텐데.”

“협상질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

“내가 너 같은 새끼 어디 한두 번 봤을까. 사람 목숨 갖고 장난질 치는 새끼를.”

빤했다.

제 가족조차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살리카로 떠난 비정한 놈이다.

그런 놈이 잡혔다고 정보를 푼다?

물고기가 물이 아닌 곳에서도 살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우스운 농담이었다.

하지만.

‘저놈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긴 하지.’

폭탄의 정확한 위치와 수량, 이를 알아내 이쪽이 찾아낸 것과 비교해 봐야 한다.

호위대가 면밀하게 찾는다고는 하나 만일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하나라도 놓칠 시엔…….

그리되지 않으려면 남자의 입을 제대로 열 필요가 있었다.

생각의 끝에 이안이 사악하게 입술 끝을 잡아 올렸다.

“넌 사람 잘 만난 줄 알아. 내가 진부한 사람이 아니거든.”

진부하게 고문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피를 보지 않고도 머릿속에 든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데 뭐하러.

세련되게 뇌만 살짝 엿보고 고이 놔둘 것이다.

‘레브의 밤의 장막이면 가능하지.’

상대의 무의식에 감춰진 것들을 읽어내는 기술이니, 고문이나 회유보다 훨씬 수월하게 정보를 캘 수 있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상대가 뇌 손상을 입을 수도 있지만 뭐.

이안은 건조한 눈길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10년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한 남자 페트로.

제가 세상에 다시 없을 충신이라는 양 구는 이 미친놈.

이런 유형은 참 성가시게도 정신력이 높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우선 밤의 장막을 쓰기 전에 미리 손 좀 봐둬야겠군.’

놈의 단단한 정신력을 깨트릴 필요성이 있었다.

심층을 뒤흔들어 빈틈을 만들어 두면 조금 더 빨리 뇌를 읽어낼 수 있으니까.

그러자면…….

가족을 거론하며 양심을 찌르는 거?

저 개새끼한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허를 찌를 방향을 정한 이안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 * *

“페트로, 살리카와 뷔트시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기에 살리카에서 살 적 배척과 괴롭힘에 시달렸지.”

살리카 가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가주는 페트로가 가진 천연의 검은 머리카락에 주목했다.

정령이 가진 기술로든 감지 마도구로든 걸리지 않을 머리 색깔.

그 칠흑이면 뷔트시겐에 잠입하기 쉬워질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여 살리카 가주는 쓰임이 많은 페트로를 거둬 철두철미하게 가르쳤다.

기본적으로는 상대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법부터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법을 알려주었고.

깊게는 정신무장과 폭탄 제조법을 숙지시켰다.

보기에는 점잖아 보여도 세작화의 과정이 만만했으랴.

비명과 절규가 끊이지 않는 지독한 나날이었더랬다.

이안은 고저가 없는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빈민가에 살며 시체나 파먹던 놈이었으니 그자의 관심이 기꺼웠을 터.”

“…….”

“아, 그걸 어떻게, 라는 표정은 넣어둬. 아직 꺼내기는 이르니까.”

이안의 지적에 남자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턱을 당기며 조금 전처럼 거만한 척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정보가 이안의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동요는 시작되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가주에게 밀명을 받았지. 레드니의 족쇄를 훔쳐오란.”

“…….”

“마을에 잠입해야 하는데 보안 체계가 삼엄하니 그럴 수가 있나.”

목적을 위해 남자가 생각해 낸 방법은 간단했다.

아이루스가 운영하는 식료품 상단의 단주로 들어가는 것.

“단주가 되어 이 마을에 드나들 기회를 얻었고. 그 후로는 촌장의 여식에게 접근해서…….”

“그, 그럼 처음부터 진심은 하나도 없었단 겁니까?”

질문한 건 남자가 아닌 촌장이었다.

여전히 촌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탓인지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쩌지 못하고 남자를 하염없이 보았다.

하긴.

그간 쌓아온 시간이 있는데 나쁜 놈인 것을 알았다 한들 단칼에 유대를 끊을 수 있을까.

그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촌장의 심정을 헤아리면서도 이안은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진심은 없었습니다. 촌장과 그 여식은 레드니의 족쇄의 관리자, 하니 신뢰를 얻어야 할 표적일 뿐이었지요.”

“표적…….”

“표적의 신뢰를 얻고 족쇄에 접근하게 된 후.”

이안은 말을 끊고 널브러진 살리카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들, 페트로의 형제로 위장한 저들을 불러들였다.

족쇄를 훔치는 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형제들과 함께 살고 싶다며 은근히 말을 흘렸을 겁니다.”

“촌장인 제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도 이곳에 정착해 살 수 없으니까요.”

“그대의 전폭적인 지지로 가짜 형제들이 여기에 터전을 잡은 지도 어언 5년, 드디어 임무를 완수할 기회가 온 것이지요.”

“…….”

살리카 가주와 몇 명의 측근만 아는 정보.

이를 이안이 옆에서 본 것처럼 술술 뱉어내자 남자의 눈두덩이가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파르르.

지금껏 놈이 내보인 것 중 가장 큰 동요.

이를 포착한 이안은 남자의 견고하던 정신의 벽이 얕게 금이 갔음을 확신했다.

‘이 틈에 쐐기를 박아야겠군.’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코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빨간 원통형의 상자.

그가 상자를 손에 쥐고 굴리자 그걸 본 남자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그, 그건…….”

“아주 반갑고 설레는 물건일 거야.”

슬쩍 당황한 남자에게 이안은 손에 들린 것을 미끄러트리듯 툭 던졌다.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 남자의 무릎을 건드린 상자.

그게 뭔지 알면서도 이를 악다문 남자는 움찔할 뿐 절대 피하지 않았다.

놈의 반응을 관찰하던 이안은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내가 왜 폭탄의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을까, 우리 개새끼께선.”

“대체 어떻게…….”

“그것까진 알 거 없고.”

이안은 뇌까리며 눈깔이 충혈된 남자에게 다가갔다.

“협상? 그게 하고 싶으면 정보를 나보다 더 많이 알게 됐을 때 찾아와.”

그게 될 리가.

인생 2회차인 그를 이기려면 적어도 두 번의 회귀를 더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인간은 없다.

썩소를 날린 이안은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꾸엑!

남자는 쌍코피를 흘리며 개구리처럼 널브러졌다.

추한 몰골을 경멸로 스친 뒤 이안은 곁에 있던 레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레브 네가 나설 차례네. 수고 좀 해줘.”

“뭘 수고씩이나. 우선 폭탄의 위치부터 정확히 파악해볼게.”

“그래. 꼭 필요한 일이니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여긴 레브에게 맡겨도 되니 이제 호위대와 합류할 참이다.

한시라도 더 빨리 폭탄을 찾아야 하니까.

* * *

폭탄을 찾고 해제하고, 찾고 해제하고, 정신없이 오전이 지나가 버렸다.

일이 온전히 마무리된 후.

“이젠 그만 떠나야겠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도련님.”

이안을 배웅하는 촌장의 얼굴은 그 짧은 사이 더 늙어 있었다.

가뜩이나 왜소한 체격인데 눈 밑까지 푹 꺼진 통에 더 그렇게 보였다.

거기다 전에 없이 음침해 보이기까지.

아니, 보인다기보다 실제 촌장은 음울했다.

“평생 이 마을을 지켜내다 또 다른 관리자에게 그 역할을 오롯하게 전수해주면 된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는데…….”

촌장은 말라비틀어진 나무 같았다.

생이 다해버린 고목 같달까.

이대로 뒀다간 얼마 안 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이안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기본 욕구라고 불리는 것들만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촌장을 촌장으로 살게 한 것은 관리자란 자부심이었다.

그것이 상처 입고 흠집 나 진창을 구르게 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그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틴 위드로.”

“예.”

“그대는 최선을 다했다. 전대 관리자인 아비가 물려준 의무를 평생에 걸쳐 완수해나갔지.”

“하나…….”

“누구나 실수는 한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그 실수에 무너지느냐, 아니면 그 실수를 발판 삼아 나아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

“도망치지 마라, 마틴 위드로. 결국, 그대의 가족이었던 자로 인해 이 마을 전체가 폭사 당할 뻔하지 않았나.”

“크윽.”

“하여 난 가주님께 청할 작정이다. 그대를 계속 관리자로 남겨두라고.”

“어찌하여……?”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속죄하며 살아가라.”

“속죄…….”

“그대만큼 쓸모있는 적임자는 찾기 어려우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터.”

이안은 냉정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하지만 촌장은 그가 남긴 마지막 중얼거림을 똑똑하게 들었다.

어린 것이 아비에 이어 할아버지까지 잃어야 하겠냐는 꾸중.

그제야 촌장은 혼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아실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짧은 사이 휘몰아친 일들에 그만, 그 아이를 잊고 있었다.

“끄윽.”

촌장은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살아가야 했다.

배신자의 딸이란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 손녀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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