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74화 (174/214)

제174화

[그뿐인 줄 아누? 웬일로 그 점잖은 리오까지 날궂이 중이다.]

“날궂이? 아침에 놀러 왔을 때만 해도 별 기색이 없었는데.”

[마을에서 돌아오자마자 말이지, 애들 앞에서 대련을 빙자해 니콜라스를 후려 패며 경고했단다.]

“경고?”

[물 흐리지 말라고.]

“젖형제라서 니콜라스한테 화 한번 낸 적이 없던 녀석인데.”

[너는 눈이 그렇게 될 정도로 열심인데, 정작 너를 보좌해야 할 생도가 여전히 분란이나 조장한다고 리오가 다그치더군.]

니콜라스의 여전한 태도를 꼬집은 리오.

녀석은 5일 연속 니콜라스만을 대련 상대로 지목하는 중이었다.

난 한 놈만 패, 뭐 그런 거랄까.

자고로 무리를 휘어잡으려면 그 무리의 우두머리부터 쳐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니콜라스를 빌미 삼아 그 무리에게 주의를 주려는 거였다.

“권위적인 걸 싫어하는 그 녀석이 작정했네.”

[작정했지. 어찌나 기강을 세게 잡는지 이번에 그놈 다시 봤다.]

“내가 불참한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네.”

[연무장에 가보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확 달라진 분위기를.]

녹스의 재잘거림이 끝나자 말소리가 자연스레 끊겼다.

수다는 약간 의도된 감이 있었다.

정작 거론해야 할 아라투스 마을에 관한 것을 약간 미루려는 것에 가깝달까.

다른 무엇도 아닌 한 아이 때문이었다.

촌장의 손녀라는 그 꼬마.

아비가 살리카의 끄나풀이었음이 밝혀졌으니 앞으로 어떤 취급을 받겠는가.

죄 없는 아이만 고통받게 생겼다.

아무리 가족일지라도 죄는 연좌가 되어선 안 되는데.

[크흠. 그나저나 참 안타깝구나.]

“그 아이 말하는 거지?”

[달리 누가 있누.]

“그러고 보니 곧 부촌장과 함께 거취를 옮기겠군.”

[촌장은 네 요청에 남겨졌다만, 죄인의 가족들을 본 주거지에 남겨 두지 않는 게 뷔트시겐의 규칙 중 하나가 아니더냐.]

“관리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보복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르가티오 마을이 있지.”

[죄인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이라…….]

한숨처럼 중얼거린 녹스는 양손을 꼬무작거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아비는 교수형이 정해졌으니 뿌린 대로 거두는 건데…….]

“아이가 눈에 밟히긴 해.”

[응. 아이는 잘못한 게 없잖느냐.]

“그렇지.”

[한데 죄인의 자식이란 낙인을 쓰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니.]

아이의 삶은 며칠 사이 확 달라졌다.

해맑던 아이가 떠올라서 이안은 입안이 써졌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 아이는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거기다 망할 아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살리카 가주를 위해 동족을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은 용납이나 이해란 말로는 얼버무릴 수 없는 문제였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 앞으로 아이의 삶은 꽤 고달파질 것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 결말에 녹스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에잉. 말로만 걱정하면 뭐하누. 누가 그걸 못 한다고.]

“그것조차 못 하는 사람도 수두룩하잖아.”

[됐다. 환자를 앞에 두고 내가 별말을 다 한다.]

“누가 보면 내 눈이 평생 머는 줄 알겠다.”

[낙관적인 건 좋으나 상황을 냉정히 파악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어느 때보다 냉정해.”

[개뿔. 벌써 닷새째인데도 회복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데 뭘.]

“나도 그게 좀 걸려서 그라나토스에 가볼까 생각 중이야.”

[흠. 동쪽 관리자를 만나게?]

“어. 오쿨루스라면 무슨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해서.”

[설령 방도가 있다 해도 쉬이 안 만나줄 터인데.]

“내 특기 있잖아. 계속 들러붙어야지. 방도를 알아낼 때까지.”

[흐음.]

녹스가 뭔가를 고심하는 표정으로 양손을 문질러댔다.

한참을 그러더니 뭔가 결심을 굳히곤 눈을 부릅떴다.

[내가 다녀오마.]

“녹스 네가?”

[병자가 움직여 봐야 탈만 난다. 특히 동쪽 관리자는 대가에 철저해서 잘못 거래했다간 큰일 난다.]

“으음.”

[내가 다녀오는 게 맞다. 동쪽 관리자가 날 무척 좋아하니 박대하지는 않을 터.]

자신감이 충만했다.

녹스는 배를 뚱 내민 채 그라나토스로 떠났다.

그러자마자 내내 꼿꼿이 앉아있던 이안은 허물어지듯 드러누웠다.

다들 염려를 해서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실상 몸 상태가 그렇지 못했다.

사나흘씩 고열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달까.

결국, 이안은 짓누르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사위가 적막해진 이안의 방.

그 방의 적막을 밟으며 검은 그림자가 이안에게 다가갔다.

* * *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며 이안의 얼굴을 가렸다.

빛이 닿지 않는 부분이 옅게 일렁일 때마다 그림자의 경계선이 뾰족해졌다.

그 날카로움이 집요하게 이안에게 다가간 순간.

[크륵!]

이안의 곁에 딱 붙어있던 사냥개가 오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이에 선선히 걸음을 멈춘 그림자, 아니 루시안.

그는 슬쩍 입매를 끌어올린 뒤 시선을 이안에게 고정했다.

“처음 봤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네. 내가 익히 잘 아는.”

이안은 몹시 창백했다.

그의 기억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칠게 각혈하며 파리하게 죽어가던 그 모습과.

적자가 오늘내일하니.

<루시안, 이 뷔트시겐을 책임질 아이는 너뿐이다. 오직 너. 하니 강해지거라.>

할아버지, 그러니까 2장로가 그의 손을 힘주어 쥐고 그리 말했더랬다.

그때부터 루시안은 오직 후계자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어떤 누구도 그것을 건방지다 꼬집은 적은 없었다.

후계 건은 당연히 그리 해야 했고, 그리돼야만 했기 때문에.

“사실 1장로님조차도 정해진 수순이라 여기셨지.”

힘없는 적자를 쫓아낼 수 없으니 열일곱까지 기다려준다 한들.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이안은 종가를 나갔을 것이고, 그는 후계식을 치렀을 터였다.

이것이 모두가, 아니지 루시안이 생각했던 결말이었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는데…….

“고작 반년 만에 이렇게 바뀌어 버리다니.”

고작 반년.

루시안은 불안을 감추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솔직하게 말해 ‘도련님이 마력핵을 얻으셨대’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 있었다.

이안이 결코 자신을 따라잡지는 못할 거라 여겼으니까.

왜냐고?

보통 페이라조 1성에서 머무는 시간만 10년이다.

그 이후로 자질에 따라 성이 올라가긴 하나 그 또한 만만치가 않다.

평균적으로 에르그부턴 한 단계 오르는데 5년에서 10년이 걸린다.

재능이 없을 때는 더러 수십 년씩 걸리기도 하고.

이러하니 에르그에서 카르디아가 되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루시안은 시간이 넉넉하다고 자만했었다.

아무리 이안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해도 제 등급인 에르그 3성까지 십수 년은 걸리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그날 동안 저라고 놀고 있을까.

카르디아가 된다면 그 격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더욱 벌어지리라.

그렇게 자신했던 것이 고작 반년 전인데.

“이리 빨리 따라잡힐 줄은 몰랐지.”

그가 안도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이안의 자질은 괴물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굳혀진 판을 단박에 뒤집어 버렸다.

평판이라던가, 실력에 관한 우려라던가, 후계자의 자질이라던가.

세간의 부정을 잠재우고 많은 사람에게서 호를 얻어낸 것이다.

이쯤 되자 루시안은 대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여태 후계자 경쟁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직계의 핏줄로만 수장이 이어져 왔는지.

그 피는 정말이지 특별했다.

누군가의 뒤를 쫓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다는 듯 추격으로도 모자라 서슴지 않고 앞서간다.

그 사실이 와닿을수록 루시안은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다 못 해.

“이젠 생도 녀석들까지도 이안이 눈길 한 번 주길 바라는 눈치니까.”

최후의 보루까지 뺏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와 함께 훈련생 시절을 보낸 생도 녀석들.

그들은 누구보다 제가 믿는 이들이고, 또 저를 따르는 녀석들이다.

한데 이제는 니콜라스 무리 외에는 남지 않았다.

2장로를 주축으로 저를 밀던 장로들의 손주들 말이다.

그 녀석들은 아직 저를 더 지지하지만 제가 그린 청사진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자가 되어 뷔트시겐의 앞날을 다듬어가려 했던.

“……이안 뷔트시겐.”

루시안은 이런저런 상념들을 어쩌지 못하다 괜스레 이안을 불러보았다.

대꾸가 없었다.

아니,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게 확실히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 지척까지 왔는데도 깨지 않다니.

평소 이안은 제 사람 외에 누가 그의 반경 안에 들어가면 금방 알아챌 정도로 예민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듯 방어기제가 약해질 때 사람은 곧잘 위험에 처해 진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칼브란마저 없는 상황.

“…….”

루시안은 고즈넉한 공간에서 잠든 이안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을 따라 사냥개의 은색 동공이 움직였다.

매서운 주시에도 루시안의 손은 이안의 얼굴을 향해 나아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통을 타고 기어오르는 뱀처럼 턱 끝을 지나 입술로, 그리고 코로 이동했다.

그렇게 가다가 멈춘 곳은 이안의 눈이었다.

붕대가 감긴 그 눈.

더 가까이 손을 가져간 루시안은 붕대에 닿을락 말락 할 때쯤 더 나아가지 않았다.

손끝에 부드러운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피부가 쓸리지 않도록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오롯하게 이안을 감싼 애정, 그것이 파고들자 루시안의 손끝이 서서히 움직였다.

후웅.

그에 따라 마력이 담긴 실바람이 이안의 눈가에 이지러졌다.

바람은 붕대를 스치며 너울대다 이내 이안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내가 익히 잘 아는 이 모습이……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도 치우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

이안의 무력함에 뿌리박혀 있던 루시안의 메마른 손이 뜯기듯 떨어져 나갔다.

어쩐지 그 끝이 파르라니 떨리고 있었다.

루시안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서 또다시 이안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아주 오랫동안.

정말로 오랫동안.

* * *

어딘가 서늘했던 루시안이 떠난 뒤.

[…….]

사냥개는 이안의 가슴팍에 올라섰다.

무겁지 않게 조심히 밟고선 잠든 이안을 빤히 보았다.

벌써 5일째다.

저 흉측한 천 조각이 이안의 다정한 눈을 가리고 있는 게.

[크르륵.]

콧잔등을 실룩한 사냥개는 이안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토닥토닥.

빨리 나아라, 나의 결속자.

그 말랑한 두드림에 담긴 건 무한한 애정이었다.

이안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이안은 늘 그랬다.

다정한 눈으로 저를 보며 ‘코르키’라고 불러준다던가.

그 둥근 눈을 접어 제게 환한 미소를 지어준다던가.

살짝만 내비쳐도 꼬리가 제멋대로 흔들릴 만큼 그 행동들이, 아니 이안이 좋았다.

그냥 좋았다.

왜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꼽아보자면 제가 수문장이기 때문이 아닐까.

말로의 탑의 주인과 연결되어 알을 지키도록 정해진 파수꾼.

알이 생기면 정령계에서 넘어와 그것을 수호하다, 수호자가 주인과 떠나면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는 수문장.

그렇기에 수문장은 쭉 저 하나였다.

무려 천년 넘게.

오롯하게 주인만을 위해 쳇바퀴 돌 듯 무던히도 고요하게 살았더랬다.

그러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욕심이 없었을까.

주인과 결속을 맺고 싶다는 욕심이 말이다.

저 또한 나름 정령일 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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