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75화 (175/214)

제175화

[크르르륵.]

하나 애석하게도였다.

탑의 주인은 수문장인 저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다.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암흑 속성만 있는 제가 빼어난 주인의 눈에 찰까.

4대 원소를 다루는 수호자가 있는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저는 늘 주인이 수호자와 함께 떠나는 모습을 바라만 봤었다.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실은…… 데려가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천년 넘는 시간이 덧없이 흐르면서 종내에는 어떤 기대도 품지 않게 됐다.

언제나 똑같았으니까.

매번 그랬었는데…… 어느 날이었다.

은발이 아닌 웬 검은 머리의 소년이 나타나선 주인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 소년은 다소 특이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과를 탑의 석문 앞에 수북이 놔두고 사라진다던가.

‘사냥개, 사냥개’ 하면서 허구한 날 저를 찾아다닌다던가.

별것도 아닌 저에게 관심을 보내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왠지 들뜨는 기분이라 저도 소년을 보러 아카데미에 자주 찾아갔다.

종종 그러다 우연찮게 소년의 약점도 발견했다.

소년은 작고 힘이 없는 것들에 약할 뿐만 아니라 무척 관대했다.

[캬앙!]

그거였다.

저 또한 작고 연약해지면 결속을 해주지 않을까.

이를 위해 수문장은 최대한 몸집을 욱여넣듯이 작게 만들었다.

생후 2~3개월 된 새끼강아지 크기?

이 조막만 한 몸집이 효과가 있을까 했더니만, 약발이 잘 받았나 보다.

결속을 맺는 쾌거를 이뤄냈으니 말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단꿈을 꾸는 것처럼 좋았으나 이게 한편으로는 또 희한한 구석이 있었다.

오래도록 바라던 결속을 했으니 더는 원하는 게 없을 줄 알았건만…….

또 다른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크르륵.]

사냥개는 창백한 이안을 보다가 앞발로 가슴팍을 살살 두드렸다.

이안, 건강하게 나랑 오래오래 살자.

그러니까 아프지 마라.

앞발에 염원을 담아 두드리던 사냥개는 이안의 가슴팍에 주저앉았다.

이럴 때면.

<코르키, 왜 사과가 먹고 싶어?>

다정한 웃음기를 머금고서 이안이 저를 쓰다듬어 주곤 했더랬다.

하지만 이번만은 미동이 없었다.

그 사실에 울컥한 사냥개는 이안의 턱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그런 말이 있잖은가.

상처에 침을 바르면 낫는다는.

덕지덕지 바른 만큼 부디 이안이 빨리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사냥개는 이안의 턱을 침 범벅으로 만들었다.

* * *

“흘흘흘.”

동쪽 관리자는 누가 침이라도 뱉어놓은 것 같이 군데군데 젖은 땅을 거닐었다.

땅이 아무리 질척인들.

기분이 좋은 만큼 관리자의 발걸음도 사뿐했다.

생전 가야 저를 거들떠보지 않던 수호자가 제 발로 찾아왔기 때문.

거기다 앞발을 비비적대며 무려 부탁이라는 것을 할 줄이야.

지독히 귀여워서 박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더 보려고 놀아달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했는데도.”

웬걸.

수호자가 그마저도 들어줘서 이틀 동안 재미나게 놀았더랬다.

더 놀고 싶었지만 결속자 걱정뿐인 수호자를 주저앉혔다간 반감만 샀을 것이다.

도약을 위해선 때때로 웅크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무모하고 맹랑한 결속자 때문이라도 수호자는 언젠가 또 저를 찾을 것이다.

확신한 동쪽 관리자는 다음을 기약했다.

“기회는 반드시 올 테니. 흘흘흘.”

산뜻하게 중얼거리며 음흉한 눈웃음을 흘렸을 무렵.

관리자의 발길이 어느덧 말로의 탑의 경계선에 도착했다.

탑의 관리자라 할지라도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

그곳을 물끄러미 보다가 관리자는 청록색 발굽을 리듬감 있게 굴렸다.

우아하게 날리는 갈기에 화답하듯.

사라락.

경계선이 찢기며 관리자의 우측에 달빛 가루를 모아 만든 것 같은 계단이 생겨났다.

계단은 탑의 위쪽, 구름에 갇힌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을 밟고 올라오라는 듯이.

관리자는 이 일련의 과정이 익숙한 것처럼 무심하게 그 계단을 밟아나갔다.

위로, 더 위로.

구름에 휩싸인 부분에 도달하자 관리자의 몸이 삽시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뿌리내린 다리를 뜯어내는 것 같은 아릿함이 지나간 후.

“……매번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동쪽 관리자는 대번에 어느 곳에 도착해 있었다.

꼭 집무실처럼 꾸며진 공간.

고풍스러운 그곳을 거닐며 관리자는 말문을 열었다.

“수호자가 찾아왔어. 어린 결속자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도 동쪽 관리자는 보고하듯 말을 덧댔다.

“하여 미밀 나무의 열매를 내어주었지.”

“신목의 열매이니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겠군.”

“이런 날을 위해 정령계에만 있는 미밀 나무를 내 영역에 심어놓고 능청은.”

관리자는 공간의 끄트머리에 시선을 두었다.

거기에는 웬 은발의 아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열 살 남짓?

어린 외양에 비해 풍기는 느낌은 태산처럼 거대해 보였다.

아이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은발을 쓸어넘겼다.

“예측한다고 모든 일이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최초의 예언자께서 엄살은.”

“…….”

“어울리지 않게 겸손 떨지 말게, 라에라트.”

동쪽 관리자의 부름에 일순 아이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라에라트.

최초로 4대 원소를 다뤘던 정령사이자 독보적인 영역을 이뤘던 괴물.

이런 수식보다 더 세간에 알려진 것은 초대 황제.

황제는 눈두덩이를 실룩하며 솔직한 심정을 끄집어냈다.

“겸손이 아닐세. 내가 유일하게 볼 수 없는 부분이지, 그 아이는.”

“회귀하며 시간의 축이 뒤틀렸으니 그러하겠지.”

“하니 최선을 다해 많은 것들을 안배해둔 것뿐일세.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그런 것치곤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들로 남겨두지 않았나. 하여간 라에라트 그대는 성격이 나빠.”

“하하. 거저 얻을 순 없지. 모든 것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초대 황제와 동쪽 관리자 오쿨루스.

둘은 한동안 봇물을 쏟듯 수수께끼 같은 얘기들을 끊임없이 나눴다.

무척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아주 오랜 기간 그리해왔던 것처럼.

그러다 얘기의 말미, 발굽을 굴리던 관리자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 살리카 가주에 관한 것인데. 가주가 가진 그것이…….”

***

“흐음.”

살리카 가주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언짢음이 묻은 손길.

몇 번이나 반복된 행동을 하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실패라.”

“…….”

“참으로 이상하군. 마치 누군가가 앞날을 미리 알고 훼방을 놓는 것 같으니.”

아라투스 마을 건은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10년간 공을 들인 일이었으니까.

뷔트시겐의 가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야금야금 진행한 일.

이는 그자가 뷔트시겐 영지 내의 작은 마을조차 꼼꼼히 살피는 것을 알아서 그리했다.

하여 그토록 오래 시간을 들인 것이었고, 성공이 목전이었다.

“응당 뷔트시겐 그 작자만 경계하면 될 것이라 여겼건만.”

미간을 꿈틀한 살리카 가주는 수호검을 빤히 보았다.

마치 그녀가 원수라도 되는 양 시선의 결이 곱지 않았다.

까끌까끌해서 문지르면 피가 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묵묵히 견뎌내며 수호검은 찬찬히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실패에 따른 사과는 의미 없다는 듯 가주는 차게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한데 그 작자는 없고 맹랑한 새끼늑대가 있었단 말이지.”

“이안 그자라면 수도에서 일을 진행했을 때, 그때에도 마주쳤지 않습니까.”

“승급 시험이 있던 때라 우연일 수 있으나.”

과연 우연일까.

모험가 협회장을 죽이는 일이 실패로 돌아간 그 시점에 맞닥뜨린 것이.

어쩐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살리카 가주는 강하게 받았다.

모든 일에 우연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사건이 있다면 그것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란 게 있다.

사건에 얽힌 관련자들의 증오라던가, 욕망이라던가 하는.

보통은 명확한 뭔가가 있는데, 불쑥 끼어든 이안만은 사건과 어떤 연계성도 없었다.

마치 완벽한 그림에 튄 얼룩 같달까.

“돌이켜보니 언제나 그것이 있었군. 내 계획이 무산된 곳들에.”

“…….”

“아무래도 단순한 새끼 늑대가 아닐 수도 있겠어.”

살리카 가주의 단정에 수호검은 얼른 다음 말을 덧댔다.

마침 보고할 게 이안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아, 새끼 늑대 말입니다. 케르도스 생산지를 배상으로 요구한 이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바다 엘프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다 엘프라면…… 하. 정령 치료제 때문이군.”

“예. 그들의 근거지에서만 나는 소금기 가득한 바다 엘다 나무의 수액이 있어야 치료제가 완성되니, 그것을 노리는 듯합니다.”

“이번 역시도.”

새끼 늑대가 또 선수를 치려 하고 있었다.

본디 아라투스 마을 건이 끝나고 나면 바다 엘프 건을 추진할 예정이었다.

접착제로 쓰이는 수액이 있어야만 치료제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

하여 자색 연꽃 문양이 새겨진 남자를 곁에 둔 것이다.

바다 엘프 수장의 측근이라서 끈이 되어줄 것이기에.

“흐음. 이 건까지 합쳐지니 더 명확하게 알 것 같군. 새끼 늑대는 그냥 넘겨버릴 물건이 아니었어.”

가주는 새끼 늑대인 이안에 대해 새삼 되짚어보았다.

마력핵이 없는 체질.

뷔트시겐 가주의 지극정성으로 생긴 마력핵.

그리고 그 시점에 에루리안을 다녔다는 사실.

괴물이라 불리는 성장 속도.

거기다 알을 얻은 라이라프스와 똑 닮은 기운까지.

하나하나 나열하고 보니 기분 나쁠 정도로 찜찜했다.

아니, 뭔가가 명치에 걸려 시원스레 넘겨지지 않았다.

“분명 놓친 것이 있는데…….”

살리카 가주의 미간이 옅게 찌그러졌다.

이안에 관한 정보는 확실히 구멍이 있었다.

알을 먹지 않고서야 저런 성장세, 저런 기운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가설은 하나.

알의 존재를 뷔트시겐 그 작자나 새끼 늑대가 알아냈다는 건데.

“그럴 리가.”

실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황실이 작정하고 감춘 극비를 무슨 수로 알아내랴.

저도 11대 살리카 가주가 남겨놓은 기록이 있어 겨우 알게 된 것을.

4대 원소를 다루는 자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알을 먹은 즉시 카르디아가 된다는 것.

맹약의 증거로 수호자가 그 곁을 지킨다는 것.

이에 관한 것은 파헤친다고 쉬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흐음.”

살리카 가주는 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알을 얻지 못했음에도 새끼 늑대는 위협적이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적할 무기인 라이라프스 또한 뛰어나야 한다.

“내 쥐새끼의 상태는?”

“그게…… 에르그 3성에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합니다.”

“성장이 예상보다 느리군.”

살리카 가주의 음색은 얼음으로 깎은 양 차고 또 시렸다.

즉시 카르디아가 되지 못한 것도, 수호자가 없는 것도 단언컨대 이상했다.

“아무래도 실험을 재개해야겠어.”

“하오면…….”

“다시 그것의 심장을 갈라 이것저것 알아내. 왜 성장이 에르그에서 정체되었는지.”

“명 받들겠습니다.”

“돌아가는 꼴로 보아 계획을 앞당겨야 할 성싶으니 쥐새끼가 더 쓸만해져야지.”

가주는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말을 붙이면 안 되지만 수호검은 마지막 보고를 위해 입을 뗐다.

“아, 가주님. 조만간 루시안 그자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뷔트시겐에서 기어 나오는 그때가 적당하긴 하지.”

“예. 일이 진행된 후에 다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