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이안은 방 안의 풍경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양발로 사과를 굴리고 있는 사냥개.
녀석의 옆구리를 베고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녹스.
햇빛에 반사되어 이리저리 날리는 먼지 입자.
이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쪽 관리자한테 신세를 졌네. 이렇게 빨리 회복됐으니.”
녹스가 가져온 미밀 나무의 열매 덕이었다.
쭈글쭈글하고 물컹한 데다 솜털까지 박혀있던 열매.
그것은 눈이 보였다면 입에 넣는 것을 망설였을 정도로 생김이 괴상했다.
털복숭이 애벌레 같달까.
“조만간 보답이라는 걸 좀 해야겠다. 이 맛난 것을 덥석 내줬으니 말이야.”
[표정 봐 봐라. 어째 숭악하다, 숭악해.]
“후훗. 그럴 리가. 좋은 것에는 좋은 것으로 보답해야지.”
뭘 생각하는지 이안의 입매가 미심쩍게 위로 늘어졌다.
그것을 흘낏 보다가 녹스가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이거나 보라는 듯 등에 깔고 있던 뭔가를 던졌다.
유려하게 직선으로 날아온 물체.
이안은 그것을 가뿐하게 받고선 눈을 내려트렸다.
“클로에 교수님이 보낸 서신이네.”
편지 모양의 밀랍으로 보아 사서국을 통해 보낸 거였다.
이 방식을 택한 걸 보니 가문의 눈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의 두 달 만이지? 에루리안을 떠난 뒤로 처음이니까.]
“어. 교수님이 살리카의 종가에 머무시니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긴 애매했지.”
[아무리 제자였다고는 하나 살리카 쪽에 서신을 보내긴 쫌.]
“그래서 궁금해도 잘 지내시겠지 생각했는데.”
[여튼 뭐라 적혀있는지 나도 좀 보자.]
이안이 펼쳐 든 서신으로 녹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는 녹스를 본 후 이안은 서신의 내용을 차근히 읊어 내려갔다.
“곧 수료식이잖아. 그때 잠깐 날 보러 오시겠대.”
[아, 수료식은 뷔트시겐에서 중요 일정으로 다루는 것 중 하나라 축제나 다름없으니.]
“그래서 뷔트시겐 각지뿐 아니라 제국 곳곳에서 구경하러 오잖아.”
[그 핑계로 널 만나러 오려나 보다.]
서신으로는 어떤 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제자를 보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이 있는 것인지.
어느 것도 확실한 건 없으나,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저도 부탁하려던 게 있어 뵙자 청할 생각이었으니까.
후일의 만남을 기약하는 이안의 표정이 사뭇 부드러워졌다.
“어떤 이유로든 클로에 교수님이 날 보러 오신다니 기분은 좋네.”
이안은 서신을 접어 한편에 밀어두고선 옆에 놓인 또 다른 서신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사서국의 문양이 찍혀있었다.
문양 밑면의 발신인을 확인한 이안의 입꼬리가 진해지며 볼 우물이 패였다.
그 모습을 녹스가 놓칠 리가.
[에이프릴에게서 온 것이구나.]
“이제 곧 방학이 끝나는 터라 꽤 바쁘다고 하더니 서신을 보내왔네.”
[하여간 뭘 몰라요. 바쁘다고 청춘사업을 안 하간? 전쟁 중에도 사랑은 꽃피고, 바빠도 아가는 태어나는 법이다.]
에이프릴만 연관되었다 하면 나오는 녹스의 지론.
반복되는 연설을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에이프릴이 보내온 서신을 마저 뜯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오는 서신.
한데도 왜 이리 반갑고 들뜨는지 자꾸만 입가가 벌어졌다.
그럴수록 글자가 보이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깊숙하게 박혀 들었다.
눈이 보인다는 게 이렇게 좋다.
둥글게 말린 이안의 눈매를 한참 지켜보다 녹스가 슬쩍 말을 붙여왔다.
[이 판국에 흐름을 끊어서 미안한데 말이다, 이안.]
“응?”
[오쿨루스 그놈을 보러 간 김에 로르와 루체도 만났거든.]
“아, 뭔가 알아낸 게 있대? 동쪽 관리자가 결속한 자가 누군지.”
[그러잖아도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잠깐 들르라고 하더구나.]
“그래?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가야겠다.”
[이 오밤중에?]
“지금만 한 적기가 또 없지.”
[하긴. 널 주시하는 살리카의 눈을 피하려면 뭐.]
“꼬리는 밟히지 않는 게 최선이니까.”
* * *
도둑들이 야밤에 움직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둠은 몸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안은 밤의 으슥함에 기대서 남몰래 그라나토스로 이동했다.
숲의 초입.
나무에 맺힌 밤이슬조차 유달리 껌껌한 게 을씨년스러움이 한껏 덧대졌다.
이안은 몸을 옹송그리게 만드는 밤공기를 타고 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왕 온 김에 루체 만나고 숲에서 마력흡수 좀 해야겠다.”
[그거 괜찮지. 네 체질상 조금이라도 그러는 게 이롭긴 할 게다. 마력을 흡수하면 회복에도 도움이 되니까. 아, 그러고 나면 종탑에는 갈 거니?]
“가야지. 그것만큼 중요한 수련도 없는데.”
이안이 그라나토스에서의 빠듯한 일정을 읊던 순간이었다.
“이아아아아안!”
고막이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음량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커먼 소가 밤이슬을 우수수 떨구며 겅중겅중 뛰어왔다.
“보고 싶었다아아아아앗!”
유난히 신나게 반기는 로르의 모습에 이안은 환하게 웃었다.
두 달 만에 보는 게 무색할 정도의 격한 환대였다.
“너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로르 넌 어째 더 늠름해진 것 같다.”
“히히. 나야 뭐 늘 똑같지. 그나저나 아픈 건 다 나았고?”
“보다시피.”
“그래도 큰일을 치렀으니 잘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지.”
로르가 눈을 반짝이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포대를 뒤집었다.
와르르.
그러자 이안의 발치로 시뻘건 과일이 마구 쌓여갔다.
……레드 애플?
레드 애플은 사과스러운 이름이지만 파인애플이다.
속까지 빨간 파인애플은 시력 향상에 좋은 과일로 알려져 있다.
효능은 좋으나 그라나토스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과일.
그것을 이 정도로 많이 구해놨다는 건 녀석이 그만큼 저를 걱정했다는 뜻이었다.
“발리올에서만 나는 건데 이걸 어떻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내 둥지에 한가득 있으니까 이따 집에 갈 때 꼭 가지고 가. 잊어버리지 말고.”
“하하. 알겠소이다.”
로르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마음이 세세히 느껴졌다.
해서 이안은 사족 대신 고맙단 말로 진심을 표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절벽 꼭대기에 있는 빛의 성에 다다랐다.
언제봐도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절로 ‘아, 루체의 영역에 왔구나’라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던 순간.
“그라나토스 초입에 당도한 게 언젠데……. 하도 늦어 내년쯤에 올 줄 알았다.”
파이프 담배를 문 루체가 불퉁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루체다운 첫 마디였다.
보자마자 툴툴댄들 그 속내를 모를까.
희고 탐스러운 꼬리가 남몰래 살랑거리며 반기는 게 다 티 나는데.
“루체, 잘 지냈어?”
“흥. 바둑 두는 놈이 도망가 버려서 잘 지내지 못했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나쁜 놈이네.”
이안은 넉살을 떨며 루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동선을 따라 알긴 하냐는 루체의 눈빛이 따라붙었다.
그에 이안이 넙죽 ‘앞으로 자주 올 테니 너무 미워하지는 마’라며 헤프게 웃어 보였다.
넘어갈 수밖에 없는 능청스러움이라, 루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차 바쁘니 살붙이지 않고 결론부터 말하겠다.”
“…….”
“오쿨루스의 결속자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더군.”
“황제?”
“정확히는 역대 황제들과 줄곧 결속을 맺어왔다는 게 맞겠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네.”
동쪽 관리자의 행보가 계속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난번에 수도에서 마주친 것도 그렇고.
교류가 끊긴 줄 알았던 황가와 연이 닿아있는 것도 그렇고.
꿈 외엔 관심 없다고 말하는 동쪽 관리자가 맞나 싶었다.
이안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루체가 확정 짓듯 말을 덧댔다.
“그리고 하나 더. 나흘 전 내가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희한한?”
“오쿨루스가 말로의 탑 상층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
“관리자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
이안은 회귀한 이후 몇 안 되게 정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수호자를 가진 자신에게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곳이 상층이다.
발을 들이미는 즉시 즉사하기에.
한데 동쪽 관리자는 어떻게 출입이 가능한 걸까.
감정의 진폭이 없는 이안의 동요.
그 때문인지 루체는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다음 말을 덧댔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탑의 결계가 열리더군.”
“…….”
“뿐일까. 한두 번이 아닌 듯 무척 자연스러웠다.”
루체는 파이프 담배를 깊숙이 문 채 제 성을 둘러보았다.
노란 구체들, 천리안이 공중을 떠다니며 산들거리고 있었다.
이놈들이 있어 그라나토스 내의 일이라면 흙 한 줌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관리자들의 행적 역시 제 손바닥 안이라는 것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놈이 탑에 드나들었지? 아니, 그간 어떻게 천리안에 잡히지 않은 걸까.’
무슨 수로 천리안을 속일 수 있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루체는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버리려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오쿨루스 혼자서는 절대 내 천리안을 속일 수 없다. 관리자의 힘은 서로 비등하니까.”
“그렇다면 루체 네 눈을 가릴 수 있는 조력자가 있는 게 아닐까?”
“조력자? 고대종인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가 있다고?”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되잖아”
“만약에 그렇다면 여태껏 했던 것처럼 계속 속이면 되는 것을, 이제 와 드러내는 저의가 뭔지 심히 의심스럽군.”
파이프 담배를 꽉 쥔 루체는 되새김질하듯 며칠 전을 떠올렸다.
오쿨루스 그 망할 것이 결계 앞에서 발굽을 굴리기 전에 분명 천리안을 응시했다.
마치 자신을 잘 보라는 것처럼.
그러더니 계단이 나타나자 눈을 찡긋하고서는 사라졌다.
꼭 그 음흉한 놈의 손에 제가 놀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염장이 왈딱 뒤집혔다.
그만큼 세게 혀를 찬 루체는 팔걸이에 박힌 붉은 다이아몬드를 문질렀다.
심신 안정용으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루체의 손길을 따라 이안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거기에 머물렀다.
복잡한 술식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보석.
붉은 다이아몬드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이안이 말문을 열었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정히 궁금하면 내막을 직접 알아내 보라는 거.”
“애송이 네 말마따나 내 생각도 그렇다. 대놓고 이리 도발이니.”
“내막이라…….”
지난번 동쪽 관리자가 뜬금없이 던진 수수께끼부터.
보란 듯이 탑에 입성하며 꼬리를 남긴 것까지.
가만 보면 일련의 것들이 흡사 빵 부스러기 같았다.
그것들을 잘 쫓아오면 감춰진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는 듯이 수상쩍은 냄새를 풍긴다.
이안은 몇 번이나 ‘내막’을 되뇌며 성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로의 탑 쪽으로 향한 시선.
그의 망막을 채우는 건 겨울의 끝자락에서 내리는 함박눈이었다.
* * *
니콜라스는 연무장 바깥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오름처럼 굵은 눈이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뷔트시겐은 언제나 그랬다.
유독 겨울의 끝자락인 혹한기에 폭설이 심해졌다.
그로 인해 허리춤까지 잠기는 게 일상이라 외출도 쉽지 않았다.
하여 다들 이 시기를 싫어했지만, 저는 아니었다.
제가 태어난 이맘때를 어찌 싫어하랴.
“후우.”
숨을 크게 내뱉은 니콜라스는 고개를 떨궈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나무가 후려친 것 같은 자국과 시퍼런 멍.
리오와의 대련으로 생긴 상처가 곳곳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눈을 찌르는 시퍼럼에 그의 콧날이 절로 시큰거려왔다.
“망할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