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77화 (177/214)

제177화

니콜라스는 응어리진 것들을 뱉어내듯 사납게 외쳤다.

리오 그 자식은 오늘이 제 생일인 것을 알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니 대련 내내 저를 후려 까며 몰아붙였겠지.

“그것들 보는 앞에서 있는 대로 개쪽을 주다니.”

아무리 제가 에루리안 것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렇지.

오늘 같은 날, 그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놈이랑 저랑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그깟 에루리안 것들이 뭐라고.”

고작 수습 기간 두 달 만에 리오가 생판 남인 것처럼 변했다.

대련을 핑계로 그것들 앞에서 면박이나 주고.

걸핏하면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나 퍼붓고.

자칫 시비가 붙으면 생각도 안 하고 걔들 편만 들고.

“리오 그 자식도 그렇고, 녀석을 그렇게 만든 에루리안 것들도 그렇고.”

전부 싫었다.

엄밀히 말해 리오가 자꾸 역성을 드니까 그것들이 더 싫어졌다.

약함을 무기로 동정을 사 제 것을 빼앗는 것들.

가뜩이나 없던 정이 밑바닥까지 뚝뚝 떨어졌다.

“확 다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참아지지 않는 감정만큼 짜증이 나고 또 짜증이 났다.

그것을 곱씹을수록 리오한테 느낀 서운함 또한 휘몰아쳤다.

예전에는 저와 생각이 달라도 같은 꿈을 꾸지 않았던가.

둘이 함께 할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배우던 그 당시부터 말이다.

“약한 것은 쉬이 저버리니 그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말도 다 잊어버렸겠지.”

니콜라스는 펑펑 내리는 눈을 바람으로 차며 입을 삐죽거렸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약함이라는 건 가까이하면 안 되는 첫 번째 덕목이라고.

<나약함을 가까이 두어서는 나를 망칠 뿐이니.>

<강해지거라. 강한 만큼 세상의 위세에 눌리지 않고 내 뜻을 당당히 펼칠 수 있다.>

<강함은 규칙을 만들고 질서를 만들며 논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나를 지키고 더 나아가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

입버릇 그대로 할아버지는 제 양껏 세상을 오시하는 분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고집을 꺾은 적도 없으셨고.

그런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귀에 딱지가 얹도록 같이 듣지 않았던가.

해서 누구보다 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놈인데.

“리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괜스레 눈가마저 촉촉해졌다.

“아씨. 생일에 궁상맞게.”

니콜라스는 누가 볼세라 얼른 눈가를 문질렀다.

거친 손길에 도리어 얼룩진 망막.

삽시간에 흐려진 망막 사이로 마치 그를 어르는 듯 누군가가 맺혀 들었다.

태산 같은 기세만으로 누군지 정체가 파악되는 사람.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고, 누구보다 저를 이해해 주는 분.

너른 앞태가 그에게 성큼 다가오자 니콜라스는 들끓던 서러움이 폭발해버렸다.

“……할아버지.”

* * *

발르와 가를 향해 가는 내내였다.

“리오 그 자식 진짜 맘에 안 들어요. 그 약한 것들이 뭐가 좋다고 허구한 날 끼고 도는지. 그렇게 감싸다 발목을 제대로 잡혀봐야 정신 차리지 정말 답이 없어요, 답이.”

니콜라스는 쉬지 않고 제 불만을 할아버지에게 토로했다.

할아버지가 묵묵히 들어주니까 괜스레 목청이 높아졌다.

그간 리오에게 수도 없이 말했지만 이내 타박으로 돌아온 얘기들이었다.

“약한 것들은 약한 것들끼리 어울려야 하는 건데. 그것들과 어울리다 보면 리오도 금방 걔들처럼 약해 빠지고 말거라고요. 대체 페이라조랑 뭔 볼 일이 있다고.”

주절거림의 끝.

주의 깊게 경청하던 2장로는 미간을 꿈틀했다.

지금 보니까 니콜라스가 참 많이도 저를 빼다 박았다.

빼다 박아도 괜찮은 부분만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힘만을 숭상하는 패도적인 성향마저 닮아버릴 줄은.’

약자를 멸시하던 자신의 젊었을 적 치기를 판박이처럼 답습하고 있었다.

2장로는 니콜라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무거운 입을 뗐다.

아껴 마지않는 손주가 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니콜라스.”

“예, 할아버지.”

“내 너에게 묻겠다. 약한 그들이 그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적 있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그간 아주 완벽히 해냈지. 개인 임무든, 단체 임무든.”

“…….”

“그럼 그들의 약함이 너에게 폐를 끼치거나 혹은 뷔트시겐에 위해를 가한 적이 있었느냐?”

“그건…….”

“제 몫을 해내는 자들을 비난할 때는 정당한 연유가 있어야 한다. 너에게는 그것이 있느냐.”

2장로의 물음마다 니콜라스는 한 번을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꽉 다물고만 있을 뿐.

그런 니콜라스를 2장로는 고요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니콜라스의 기준에서 약할 뿐이지 에루리안 출신의 생도들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누구나 탐낼 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키워갈 맛이 나는 인재들이었다.

덩달아 그들을 발탁한 이안에 대한 평가도 수직으로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게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게 증명됐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안목이지.’

힘을 우선시하는 2장로조차 중히 여기는 부분이었다.

그 사실을 제 손주 녀석도 얼른 깨달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니콜라스, 너의 판단을 재고해 봐야 한다.”

“할아버지.”

“누구보다 가까이 그들을 곁에서 지켜봤으니 알지 않느냐.”

“그게…….”

“내 너에게 누누이 말했다. 힘이 아무리 중요하대도 사람을 판별할 줄 모르면 소용없다고.”

“…….”

“보는 눈이 없다는 건 주변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는 것인즉. 그리되면 강자라도 전투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2장로의 냉정함에 니콜라스는 숨이 턱 막혀왔다.

약함을 경멸하는 할아버지라면 제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여느 날처럼 그럴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마저 그것들 편이었다.

그 때문일까.

내장에서부터 뭔가가 자꾸 치받쳐 와 니콜라스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오직 강자만이 세상을 재단할 수 있다고.”

“그거야…….”

“강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럼 저런 약해빠진 것들에 대해 얼마든지 내 맘대로 재단할 수 있는 거잖아요.”

니콜라스는 뿌예지는 시야에 머리통을 흔들었다.

눈에 습기가 찬 것인지, 거센 눈송이에 세상의 희뿌연 건지.

중요한 것은 너무나 억울했다는 거였다.

“저한테 그래놓고, 왜 저만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니콜라스…….”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러는 거냐고요. 난 할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한 것뿐인데!”

“…….”

“할아버지도, 할아버지를 이기지 못한 나약한 형제들을 뜻대로 죽였으면서. 그랬으면서…… 씨이.”

서러움이 복받친 니콜라스는 눈가를 문지르곤 마구 내달렸다.

저는 잘못한 게 없다.

제가 한 행동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비난받을 이유도, 지적을 받을 이유도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라 니콜라스는 저를 부르는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저만치 멀어져 버린 니콜라스.

분해서 씩씩대는 손주의 등을 2장로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녀석이 한 말들은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깊숙이 쑤셨다.

기실, 니콜라스를 제 신념대로 가르치긴 했다.

힘이 곧 정의이고, 납득이며, 이해라는 신념대로.

그러나 그 신념이 약자멸시는 아니었다.

그저 강한 자가 강한 힘으로 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을 뿐.

하니 강자는 완전무결해야 하며 흠이 없어야 한다.

누군가가 그 흠을 약점으로 쥐고 신념을 흔들 수 없도록.

그를 위해 형제들을…… 죽였더랬다.

내부정보를 적에게 팔아넘기려 해서.

후계 싸움에서 지고도 저를 죽이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아둔한 만행을 저질렀던 그들.

그들의 탐욕은 언제든 적에게 패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치부는 고스란히 발르와 가의 약점으로 돌아올 터였다.

이 때문에 가문과 더 나아가 뷔트시겐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가문 내의 제 측근과 가주, 그리고 1장로만 아는 속사정.

그 잔혹한 진실을 2장로는 조용하게 덮었다.

굳이 가문의 치부를 드러낼 필요는 없겠다 싶었으니까.

2장로는 급격히 생기가 빠져나간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니콜라스 너에게 진정 주고 싶었던 것은…….”

자신을 꼭 닮은 손주 녀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녀석에게 물려주고 싶은 신념은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맹세컨대 아니었다.

주름이 깊어진 2장로는 회한에 젖은 얼굴을 까끌하게 문질렀다.

니콜라스도 그렇고, 루시안도 그렇고.

어째 제가 가르친 녀석들은 하나같이 어느 한구석 어긋나고 삐뚤어져 있었다.

녀석들에게 제 것을 고압적으로 밀어붙인 적이 없거늘.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이안은 발르와 가에 걸음을 했다.

정확히는 생전 올 일이 없다고 여긴 2장로의 개인 침실에 발을 디뎠다.

‘흠.’

육십 줄에도 청년 같던 노인은 어디 가고 사신의 낫에 목이 걸린 노인만 남았다.

초췌한 것이 세월을 지나치게 앞서가 버린 모습이었다.

‘니콜라스의 말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나 보군.’

누군가가 침을 뱉으면 그 주둥이를 찢어버리는 게 2장로였다.

하다못해 가주한테도 제 속에 있는 말을 기어이 다 하는 인사가 아니던가.

그런 거목을 이리 단숨에 노쇠하게 만든 것이 고작, 피도 안 마른 어린싹이었다.

‘녀석 때문에 장로직까지 관두겠다고 말할 줄은.’

거침없는 보폭을 멈춘 이안은 침대 맡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웬일이냐 눈빛으로 묻는 2장로를 물끄러미 직시했다.

“늙긴 늙었나 봅니다, 2장로님.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시비 걸러 오신 겝니까.”

“기습하러 온 겁니다. 2장로님이 쓸개를 뺏긴 곰처럼 매가리가 없대서, 이번엔 말씨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내가 고작 도련님 같은 어린 애송이에게 질 것 같소이까.”

“모르지요. 지금이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흥.”

“어이쿠. 그러다 콧물 나오겠습니다.”

이안의 능청에 2장로의 동태 눈빛이 되살아나며 형형해졌다.

역시 2장로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이거였다.

시들시들 말라비틀어져 가는 생선 꼬라지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철없는 손주 놈이 한마디 했다고 다 때려치우시려는 겁니까.”

“…….”

“2장로란 직책이 그리 가벼운 무게가 아닐 진데 참으로 쉬이 내던지십니다.”

“쉬이 내던지지 않았소이다. 깊은 고심 끝에…….”

“손주 녀석이 ‘할아버지 미워요’라고 했다고 냉큼 관두셨으면서.”

“내가 고작 그 때문에 2장로 직을 내놓겠다 했겠습니까.”

2장로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다.

그가 니콜라스의 몇 마디에 저리 다 죽어가는 꼴이 됐으랴.

평생을 옳다고 믿었던 신념, 그것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그를 찔러온 터라 저리된 것이지.

손주 녀석의 원망이란 형태로 말이다.

아마 2장로는 제 평생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이안은 그의 속내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깐죽이는 투로 말했다.

“도망도 참 성격처럼 치십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이라니. 지금껏 살아오며 책임을 회피한 적은 없소이다.”

“회피의 사전적 의미가 요 며칠 새 바뀐 모양입니다. 방구석에 틀어박히다, 라는 것으로.”

부러 시비를 붙이는 것, 이런 방식을 쓰는 건 2장로의 성정을 알아서다.

그는 어른다고 제 고집을 꺾을 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이해가 가야 움직이는 자이지.

그렇다면 2장로가 움직일 수 있게 명분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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