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78화 (178/214)

제178화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요량입니까. 살리카가 야욕을 드러낸 이 시국에 그 빈자리를 누구보고 메꾸라고.”

“그건…….”

“아시지 않습니까. 이럴 땐 가주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능숙하게 판단할 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

“누구보다 잘 알면서 혼자 쏙 빠지겠다는 건 발르와 가를, 더 나아가 뷔트시겐을 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십니까.”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놈의 결과.”

“뭐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 때려치우시고 노세요. 놀다가 나중에 전쟁이 터지면 전 그렇게 말할 겁니다.”

“또 무슨 말을…….”

“2장로님이 혼자 재미지게 놀아서 이리되었다고. 남들은 뼈를 갈아 일할 때.”

“허어.”

“농 아닙니다. 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런 사람 아닌 거…….”

“이 노부를 후려치니 좋으십니까.”

“아주 좋습니다. 다디달아서 차라리 2장로님이 더 골골대셨으면 좋겠습니다.”

얄밉게 구는 이안을 한동안 2장로는 빤히 응시했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결국 제 결정을 말리려는 것이었다.

제가 성에 차서 그런 것이랴.

오롯하게 가주와 뷔트시겐을 위해 걸음을 한 거였다.

이제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저를 말리러 온 오늘뿐 아니라 어느 때든 이안은 뷔트시겐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제가 반편이라 평가절하했던 이의 마음이 어느 곳을 향해 있는지.

그게 빤히 보여서 염통 한쪽이 쓰렸다.

새삼 씁쓸하게 창자마저 꼬였고.

사람을 제대로 보라고 해놓고 저 역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눈 뜬 장님은 저였던 것.

“차라리 잘 된 것 아닙니까. 도련님의 신경을 긁던 인사가 사라지는 것인데.”

“사람을 씀에 있어 성에 차고 말고가 어딨겠습니까. 유능하면 됐지.”

“참 간단명료하군요.”

“어려울 게 무에 있겠습니까. 돼지를 잡는 칼이든, 천하를 베는 명검이든 똑같습니다. 잘 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쓸모만 있으면 된다?”

참으로 단순했으나 맞는 말이었다.

인재가 뭐 별거 있으랴.

가진 재주를 알아봐 주고 중히 써주는 주군을 만나면 명검이 된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폐품이 되는 것이고.

어쩐지 2장로는 인재를 중용하는 이안의 방식을 알 것 같았다.

“검의 쓰임도 중하지만, 본디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휘두르는 자 아니겠소.”

“그렇지요. 누가 휘두르냐에 따라 검의 가치가 달라지니까요.”

“하면 도련님의 손에 쥐어지면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빤하지요. 천하에 다시 없을 보검이 될 것입니다.”

“하. 내가 괜한 말을 했소이다.”

콧방귀를 뀌는 2장로의 숨이 흩어지며 말소리도 끊겼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이안은 초췌함이 약하게 가신 2장로의 기색을 확인하고 찬찬히 일어섰다.

이제 가려는 거냐 묻는 눈빛에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2장로님.”

“어찌…… 부르십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어 주세요. 아무리 강인한 늑대라도 두 다리가 튼튼해야 설원을 내달릴 수 있습니다.”

늑대의 두 다리.

하나는 1장로이고, 하나는 2장로였다.

그러니 2장로가 꺾이면 늑대는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

이안은 곧은 눈을 하고선 혼란이 가신 2장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지금까지처럼 단단하게 오래도록 말입니다.”

* * *

“하아. 헛살았구나.”

2장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안이 떠나기 전 남긴 말들이 벌의 날갯짓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실은 말입니다. 저는 2장로님이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념을 지키며 산 그 지난한 세월이 존경스러울 뿐.>

<저와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하니 회한은 접어두세요. 저는 앞으로도 2장로님이 제 성질껏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주 앞에서도 반편이 도련님이라며 절 까던 때처럼. 하하하.>

막 열여섯이 된 앳된 소년.

제가 살아낸 세월의 반의 반절도 못 산 아이가 어찌나 커 보이던지.

괜스레 제 몰골이 투정을 부리는 꼴밖에 되지 않아 낯부끄러워졌다.

“어찌해야 하나.”

“어쩌긴.”

넋두리하던 2장로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주 당당히 창문을 넘어오는 누군가.

그의 뻔뻔한 낯짝에 2장로의 입이 절로 벌어지고 말았다.

“……1장로.”

“꾀병 그만 부리고 원로원에 나오시게. 자네 때문에 중요한 안건이 전부 미뤄지고 있으이.”

“허허. 내가 없어도 회의가 미뤄진 적이 없거늘.”

“도련님과 나로는 부족한 겐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모르긴. 기어이 가주께서 오셔야 그 무거운 궁둥짝을 뗄 거냐 묻는 걸세.”

“나보고 상스럽다 하더니 궁둥짝은. 어찌 언사가 갈수록 그 모양이오.”

“달랑 사직서 한 장 내고 튄 어떤 놈 때문에 그러네. 내가 아주 과로사할 판이라.”

2장로에게 향해진 1장로의 눈빛은 영락없이 그거였다.

‘네놈에게 양심이 있다면 그 입, 나불거릴 수 없겠지.’

하도 뾰족뾰족해서 쿡 찌르면 피가 나올 것 같았다.

그에 슬쩍 눈을 피한 2장로는 잘게 헛기침을 했다.

장로직을 때려치우겠다 사직서 낸 게 뭔 대수라고 이리 수선들을 피우는지.

왠지 저만 생각이 짧은 인간이 되어버린 듯했다.

‘크흠.’

민망함에 2장로가 소맷자락을 터는 사이 1장로가 의자에 앉았다.

이안이 앉았던 그 자리였다.

하필 그 자리인 게 이안의 말을 이어붙이겠다는 선언 같았다.

1절 뒤에 오는 2절 같은 거려나.

“2장로.”

“왜 목소리를 깔고 그러시오.”

“아무리 좋은 신념도 내 손을 떠나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네.”

“그런 것 같소.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맘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내가 간과하였지.”

2장로의 목소리가 아스라했다.

어떤 일에도 풀이 죽긴커녕 멱살을 잡고 보는 그의 괄괄한 성정에 어울리지 않게.

혈기 넘치는 2장로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1장로였다.

같이 멱살 잡고 이놈, 저놈 하는 사이였으니까.

하여 충격에 몸져누워버린 2장로의 초췌한 몰골이 더 눈에 밟혔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니 마음 한구석이 더부룩했고.

‘제 뜻이 후대에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이 염려되는 게지.’

눈가를 실룩한 1장로는 복잡다단함을 감추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저나 2장로와 똑 닮은 석양이.

“2장로,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나 해도 되겠는가.”

“언제 말을 가렸다고 내 의견을 묻고 그러시오.”

“자네는 가문이 무어라 생각하는가.”

“…….”

“나는 말일세. 자네 손자나 도련님 같은 어린뿌리와 가주님 같은 이파리, 그리고 우리처럼 늙어빠진 나뭇가지가 어우러지면 그게 가문이 된다고 생각하네.”

가문은 혼자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뿌리, 몸통, 이파리, 이것들이 한데 얽혀야 단단한 그것이 된다.

“2장로, 우리의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게. 지금의 니콜라스보다 더 치기 넘치고 오만방자하지 않았나.”

“뭐 젊었을 때이니.”

“그래도 그런 나를 이끌어주는 선임이 있었고, 그런 나를 자애롭게 봐주는 장로들이 있었고.”

“참 많은 실수를 했던 것 같소만.”

“그랬기에 어리고 미숙한 날을 지나, 나를 이끌어주던 선임의 자리에 내가 서고, 또 그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장로의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게 아니겠나.”

“하긴. 그렇게 이어져 가는 게지.”

“하니 2장로, 지금 그 자리에 있으시게.”

1장로는 주름이 성성한 제 손과 2장로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저나 2장로.

한때 날고 기었던 자신들이지만 어느덧 저 석양처럼 황혼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랴.

석양이라는 게 밤이 되기 전 모든 사물을 어루만져주는 자애로움이기도 한 것을.

그와 같았다.

보드라운 석양처럼 자신들에게는 이 나이이기에 해야만 하는 소명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아직 뒷방 늙은이가 되어선 아니 되니.”

“뒷방 늙은이…….”

“우리는 말일세. 선대가 그러했듯 어린 것들이 제 뜻대로 원껏 살아내다 더러 실수하거나 헤맬 때, 그때 곁을 지켜주고 그들이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일으켜 줘야 함세.”

“…….”

“지켜봐 준다는 것은 후대들의 무게를 오롯하게 견뎌야만 하는 일이거늘.”

그 무게가 어디 가벼우랴.

하늘과 땅을 짊어지는 것만큼 천 근처럼 무거울 것이다.

“그 무게가 보통은 넘을 것이나 홀로 짊어질 필요는 없지. 지켜봐 주는 자가 나 하나가 아닌 것을.”

“…….”

“하니 2장로, 나는 말일세. 서로 지탱하면서 자네와 함께 멋지게 늙어가고 싶네.”

1장로는 복잡한 낯빛의 2장로를 부드럽게 직시했다.

“그리 살아낸다면 우리의 신념이 절로 후대에 올곧게 이어지겠지.”

“후대에 올곧게…….”

1장로의 무던한 표현을 2장로는 연거푸 되돌려보았다.

***

이안은 중앙 광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광장이고 어디고 거리가 한산했다.

수료식이 있기 열흘 전이라 성문을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안전하게 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잠시 이안이 생각에 잠겨있던 때였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던 녹스가 막대 사탕을 할짝거리며 웅얼거렸다.

[2장로 말이다. 복직했더구나.]

“1장로님까지 나서서 설득했으니까 뭐.”

[그 인사도 참. 손주 때문에 고생이 많다.]

“이제 시작이지. 한동안 2장로 속을 꽤나 썩힐 텐데.”

실제 먼 훗날까지도 니콜라스의 성향은 변하지 않는다.

그냥 살던 대로 그렇게 사니까.

그러다 전쟁 초반, 니콜라스는 제 부대원을 모조리 잃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그 불행이 훑고 나서야 패도적인 성향이 고쳐지지.’

언제나 저보다 약하다 여겼던 이들이 그를 살리려 희생하고 나서야 녀석은 변했다.

“수천 번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 단 한 번의 뼈저린 경험, 그게 니콜라스를 바꾸기 전까진 계속 그러니까.”

[허긴. 성정이나 성향이 어디 쉽게 고쳐지는 것이겠니.]

“무튼 2장로님도 복귀했고. 이제 열흘 후에 있을 수료식만 잘 치르면 되겠다.”

[아, 맞다. 수료식……. 그때 일어나는 일은 어찌할 것이냐.]

“일단 아버지가 오시면 얘기를…….”

이안은 구름을 걷는 것 같은 발소리에 말을 끊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걸음에는 소리도, 냄새도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는다.

웬만히 성취를 이룬 자라도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

그 정도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이안으로서는 그것이 아버지의 걸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다.

“오셨어요, 아버지.”

“이안. 좀 따뜻한데 들어가 있지 않고.”

“어제부터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 여기 있어도 춥지 않았어요.”

“녀석.”

“근데 참 희한하긴 한 것 같아요.”

“응?”

“줄기차게 내리던 눈이 수료식 즈음에는 거짓말처럼 멈추잖아요.”

“하여 수료식을 여름의 태동이라고들 부르지.”

겨울이 가고 나면 여름이 온다.

제국의 오직 두 개뿐인 계절은 그렇게 교차한다.

뷔트시겐의 어린싹들이 이제 막 한 발을 내딛는 새로운 시작점을 기준으로.

그러니 수료식.

‘무사히 넘겨야지.’

이안은 한산한 광장의 어느 곳에 시선을 둔 채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