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수료식과 관련해 아버지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여기서 보자고 청을 드렸습니다.”
“그저 가벼운 사안이라면 이리 네 얼굴이 가라앉지 않았을 터.”
“예. 생각하신 대로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일입니다.”
“혹, 이번에도 살리카와 얽힌 일이더냐.”
“그렇습니다.”
“흐음. 수료식과 살리카라.”
가주의 시선이 한산한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축제를 틈타 그 작자가 일을 꾸미려는 모양이다.
사람이 많다는 건 그 틈에 섞여들기도 쉽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그자들이 몸을 숨기기에도 수월하다는 뜻이었다.
“그날은 제국 각지에서 오만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그자로서는 그때가 가장 좋은 기회겠지요.”
경비를 아무리 늘려도 사람을 전부 통제할 순 없다.
문제가 생길 게 무섭다고 축제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
대책이 필요하기에 이안은 수료식 날과 관련한 일을 천천히 풀어나갔다.
“수료식 때 살리카 가주가 바람의 인장을 훔치러 올 것입니다.”
“인장을? 흐음. 이제 보니 그 때문이었군. 황좌를 얻기 위해선 바람의 인장이 필요하지.”
“예.”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살리카로서는 절실한 일이었다.
4대 가문의 인장을 모아야 황제의 수호자를 소멸시킬 수 있으니까.
황제에게 가장 강력한 우군이자 수호병인 수호자.
그를 제거해야만 황제를 수월히 죽일 수 있다.
황제가 무너지면 황가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예전에는 바람의 인장을 참 허망하게도 뺏겼었지.’
그 내막은 단순하다.
4대 인장이 4대 가문으로서는 그리 중요한 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순방 때 가져가 황궁에 발을 디딘 순간 자동으로 되돌아오는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으니 무슨 신경을 썼으려고.
인장은 수호자의 온전한 힘을 얻어야 하는 황태자에게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걸 모르니 맥없이 빼앗겼지.
이안이 과거를 되짚는 동안 상념에 잠겼던 가주가 먼저 입을 뗐다.
“그 작자가 기어이 끝장을 보려 하는군.”
“바람의 인장이 진즉 황제의 손에 넘어간 것을 모르니 헛걸음하는 게지요. 하나 그 걸음이 그자를 옭아맬 덫은 될 겁니다.”
인장 탈취는 살리카 가주가 반역을 저지른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터였다.
이안은 입술 끝에 비소를 머금었다.
그 삐뚜름한 입매를 보던 가주는 이안이 앞날을 단정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수호자를 얻은 후부터 녀석은 줄곧 그래왔으니까.
해서 여타의 일들을 그러려니 넘기는 중이었다.
만약 이안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 거라면 앞날을 예지하는 정도야 뭐.
크게 개의치 않고 넘어간 가주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만 집중하며 말을 나눴다.
“그날을 이용해 쉬이 잠입한다는 사실은 알겠다. 한데 궁금하구나. 무슨 짓을 해서 나와 내 군의 시선을 돌릴 것인지.”
“프살트리아를 통해서요.”
“프살트리아? 그거라면 결속자의 목에 기생하는 정령 아니더냐.”
“예. 어린아이나 노인에게만 기생하는 녀석이죠.”
정확히는 5세 이하의 아이와 70세 이상의 노인으로 한정된다.
심장의 맥동이 약한 자를 숙주로 삼아 살아가는 특이한 정령 프살트리아.
이 정령은 실체화되는 어떤 형태가 없다.
목의 힘줄 중 하나가 되어 숙주가 죽을 때까지 더불어 살아갈 뿐.
어느 때든 딱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안은 그 예외를 떠올리며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기생하더라도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데, 한 가지만큼은 조심해야 하잖아요.”
“폭죽 소리. 하나 그 또한 그리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으냐.”
“예. 월영초를 뿌리까지 달인 물을 마셔야만 탈이 나니까요.”
“월영초는 달빛이 고이고 고이는 평야의 바위틈에서 15년 주기로 피는 약초이다. 웬만해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월영초는 금화가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프살트리아가 기생해도 평생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월영초를 구해다 입에 들이부으면 모를까.
“그 어려운 것을 살리카 가주가 해냈네요.”
“집념 하나만큼은 넘치는 자이니.”
“무튼 월영초와 폭죽 소리가 합쳐지면 프살트리아가 변형을 일으키고, 덩달아 숙주의 심장 박동 역시 상승하지요.”
“박동이 일정 수치 이상 올라가면 숙주 자체가 터져버리지.”
“게다가 그 자체로 폭탄이 돼서 반경 10m 내가 쑥대밭이 되죠. 그날 여기서 그 일이 생길 겁니다.”
“여기서……. 그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저이니, 인장이 있는 무누스 설산에서 관심이 멀어지겠구나.”
“예.”
고작 무누스에서 관심을 돌리려고 그딴 짓을 벌였다.
아직 여물지 못해 발음조차 안 되는 아이와 힘없는 노인을 인간 폭탄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축제를 보러 오는 이들 가운데 가족만 추려냈다.
단란해서 아무도 의심 못 할, 조손이 함께 있는.
월영초를 마신 것조차 모르는 평범한 이들의 생목숨을 빼앗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 사실에 이안은 치가 더 떨렸다.
살리카 가주는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도 제물로 바칠 놈이었다.
“다행히 누군가가 인간 폭탄이 된다는 건 알지만…….”
그것만 안다.
차라리 얼굴을 알면 사전에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이안이 말꼬리를 흐리자 가주는 턱을 쓸며 고심했다.
“프살트리아가 기생하는 자들에게는 특징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
가주는 이런저런 대안을 금세 내놓았다.
준비된 것처럼 막힘이 없으니 대화는 급물살을 탔다.
이후 두 사람은 경우의 수까지 고려하며 계획을 짰다.
예견된 사건을 어찌 현명하게 넘길지에 대해서.
***
수료식이 있기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5일.
수립된 계획대로 군의 배치까지 모조리 끝낸 후였다.
<수장으로서 전반적인 지휘는 내가 할 것이다. 하나 이 사건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이안 네가 아니더냐. 세부적인 조율은 네가 해 보거라.>
이안은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똑같이 ‘교관님은 어디 가고 도련님이 단상에?’라는 표정들이었다.
의문을 품은 그들을 향해 이안은 서둘지 않고 말의 첫머리를 뗐다.
“내가 왜 여기 섰는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군.”
“혹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맨 앞자리에 서 있던 리오가 생도들을 대표해 물었다.
의문에 염려가 덧대져 있었다.
제 말투가 다소 딱딱해서 무슨 큰일이 생겼나 싶은 것일 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먹색 동공에 이안은 가감 없이 현 상황을 나열했다.
“그날 살리카가 뷔트시겐에 침입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예?!”
침입이라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생도들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본디부터 불과는 상극이긴 했다.
오르니오 영지 때문에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는데 앙숙이 아니면 이상하지.
틈만 나면 방화에 수탈에 납치까지 일삼는 그것들.
그 개념 없는 것들 덕에 감정의 골만 있는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굳이 사이가 좋았던 날을 꼽아보자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렇다 해도 여태껏 중심 도시까지 쳐들어온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소식에 연무장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졌다.
‘도떼기시장 같군.’
열기가 과해진 통에 이안이 진정하라는 뜻을 담아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즉시 생도들이 언제 떠들었냐는 듯 기민하게 입을 다물었다.
삽시간에 사방이 조용해지자 침 삼키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수십의 목울대가 연신 꿀렁이는 가운데 오로지 이안만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적이 우리의 앞마당에 친히 납시겠다는데, 수료식이나 하고 있을 순 없지.”
“그러면…….”
“아침에 진행되는 수료식은 오후로 미뤄질 예정이다. 대신 생도들도 그날 있을 작전에 투입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살리카가 수천, 수만이 쳐들어온들 그것 하나 못 막을까. 하니 염려 말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맘껏 날뛰어 보거라.>
“생도들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수장님의 뜻이지.”
“그럼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우리는 후방에서 정찰 및 살리카 색출에 주력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임무에 맞는 기술을 정비해보도록.”
“예.”
생도들의 우렁찬 대답이 연무장에 울렸다.
생도로서의 마지막 임무이자 각 군과 협업할 기회.
이로 인해 생도들의 얼굴이 아주 약간 상기 되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마구 기뻐하지 못할 뿐, 다들 의욕만큼은 과하게 넘쳤다.
***
이후로는 각 군에 편입된 것처럼 일과를 소화했다.
치안대와 순찰하기, 경비대와 함께 성문 보초 서기, 히루푸스와 창공을 정찰하기 등등.
알뜰살뜰하게 훈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생도들의 작전 참여가 중요했으랴.
공동의 적이 있기에 서로 똘똘 뭉칠 생도들의 모습이 중요했겠지.
가주가 의도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생도들은 더욱 끈끈해졌다.
그렇게 수료식 당일.
새벽부터 생도들과 함께 한 차례 순찰을 끝냈을 때였다.
“도련님.”
경비대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오며 그를 불렀다.
어디 불이라도 난 모양새였다.
이안이 시선을 주자 경비대는 주변을 훑어본 뒤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닥거렸다.
“성문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문제?”
“그것이…….”
이안은 경비대가 전해준 것들을 조용히 경청했다.
보고는 짧았다.
경비대의 입이 일자가 된 즉시 그는 지체하지 않고 관문으로 향했다.
크라바나스 설산의 아랫자락에 자리한 성벽.
냉기가 폴폴 흐르는 성문 밑으로 방문객의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많기도 하군.’
성문이 개방되자마자 벌써 장사진이다.
머리 색, 옷차림, 직업 등등 전부 달라도 대개가 목적은 똑같았다.
성대히 치러지는 축제를 즐기러 온 것.
그래서였다.
까다로운 검문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표정들이 무척 환했다.
그만큼 축제에 거는 기대가 높다는 거겠지.
슬쩍 웃은 이안은 곧장 딱딱한 안색의 경비대 단장에게 다가갔다.
단장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제 수하에게 연신 무어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제가 말을 건넨 것도 아닌데.
“오셨습니까.”
단장은 금세 그의 기척을 감지하고는 묵례와 함께 눈짓을 보내왔다.
자리를 옮기자는 청이었다.
즉각 두 사람은 성벽 위 망루에 올라섰다.
차음막이 있어 감청당할 가능성이 없기에 얘기를 나눌 장소로는 이곳이 가장 적당했다.
“문제가 생겼다고.”
“예. 프살트리아가 기생하는 자들 말입니다. 그들의 목에는 얼룩 같은 네 개의 점이 생기지 않습니까.”
“통상적으로는 그렇지.”
정확히는 흉쇄유돌근 쪽에 네 잎 클로버 모양의 문신이 생긴다.
정령이 그곳에 기생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성문을 열고 30분가량 검문을 해 본 결과, 아직 그런 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이라 확답할 순 없지만, 오히려 그 점이 걸립니다.”
“한 명도 없다?”
“예.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명하신 대로 그림자 정령까지 이용해 투시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림자 정령.
인간에게 기생한 정령을 그림자로 투영해서 보여주는 정령이다.
이 정령이 가진 투시는 상급 기술이라 웬만하면 전부 잡아낼 수 있다.
“흠. 투시에 걸리지 않는단 말이지.”
이안은 눈썹머리를 내려트렸다.
특수 감지까지 피해간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몇 번의 실패로 살리카 가주가 철저하게 대비를 한 모양.
얼추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미적거림 없이 곧장 명령을 내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아버지와 상의해 여러 가지 수를 대비해 두었으니까.
“그럼 그 향으로 감별을 해.”
“태양초 말입니까?”
“어. 프살트리아가 기생하는 인간의 피에만 반응하는 태양초, 그걸 으깨서 피워낸 향이면 무슨 수를 썼든 문양이 드러나게 돼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진행을 하되 작은 변수라도 생기면 즉각 보고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단장은 이안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성문 쪽으로 내려갔다.
그가 떠난 후였다.
이안은 눈길을 성벽 아래로 내려트려 떠들썩한 사람들을 보았다.
주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았다.
배가 볼록 나온 임산부와 그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남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단란한 모습들이 이안의 시야에 턱 하니 걸렸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면 저리 무고한 사람들을 제 목적에 이용할 수 있을까.
그저 인간을 도구로만 써먹고 버리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이안의 목구멍에서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살리카 이 육시랄 놈의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