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몇 시간 후.
이안은 은빛으로 물든 무누스 설산에서 소담한 누각을 바라보았다.
누각은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단출한 구조였다.
사방이 트여 걸리는 거 하나 없이 유독 개방감이 돋보인달까.
과하게 넘치는 여백의 미.
그 휑한 공간의 빈틈을 채우려는 듯 누각의 정중앙에 은화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바람의 인장.
본래라면 저곳에 진짜가 놓여 있었을 테지만…….
‘저건 물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지.’
현재의 것은 정교한 환술로 구현된 눈속임 용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잘 만들어진 눈속임에 당할 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안이 인장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기사단 부사령관이 다가왔다.
임무 중이라 기척을 죽인 채였다.
존재감을 지운 부사령관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속살거렸다.
“도련님, 무누스의 초입에 살리카의 사냥꾼들이 잠입했다고 합니다.”
“인원은?”
“열세 명입니다.”
“흠. 앞으로 10분 정도 남았군.”
“예. 사냥꾼들도 그때쯤에 맞춰 이 누각에 당도할 것입니다.”
10분.
앞으로 10분 후 중앙 광장에서 수료식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진다.
그러면 얼마 안 가 프살트리아 역시 폭발할 터.
폭발에 맞춰 사냥꾼들도 인장을 훔치는 작전을 진행할 것이다.
하여 사냥꾼들에게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중앙 광장의 혼란이 수습되기 전에 후딱 치고 빠져야 하니까.
이안은 여전히 시선을 인장에 둔 채 대화를 이어붙였다.
“속도 때문에라도 번개 정령을 가진 사냥꾼들이 다수일 터.”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니 그들로서는 그편이 효율적일 것입니다.”
“속도를 묶기엔 나무 정령만한 게 없지.”
“예. 진즉 나무 정령과 함께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였다.
사냥꾼들이 인장에 손을 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
그냥 무누스를 배회하다 잡히느냐, 인장을 쥐려다 잡히느냐는 차이가 있어서다.
전자는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 된다.
반면 후자는 살리카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니 덜미를 잡을 증거가 확보될 때까지 최대한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작전의 기본 토대는 폭발이지.’
그렇다고 실제 폭발이 일어나게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교묘히 사냥꾼들을 속여넘길 함정이 필요하다는 얘기.
“환술을 펼칠 무지개 정령의 배치는?”
“명대로 무누스의 초입부터 누각까지 촘촘히 깔아두었습니다. 사냥꾼들의 감각을 완벽히 교란할 수 있도록.”
모든 계획이 오차 없이 잘 맞물리고 있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장담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이안은 음산하게 입매를 비틀며 부사령관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 도착하면 잘 맞이해줘. 그리고 반드시 생포해.”
“특별히 신경 써서 손질하겠습니다.”
“가주의 명 하나에 여기까지 목숨 걸고 온 자들이니 여차하면 자폭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고.”
“예.”
부사령관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갖추는 무던한 몸짓에 아주 잠깐 번득임이 스쳤다.
대화를 나눌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 역시 깊어진 탓.
대체 도련님은 어찌 살리카의 동태를 파악하셨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정보부조차 간파하지 못한 것을.’
뷔트시겐의 정보부가 어디 보통 놈들이 있는 곳이던가.
1황자 그 개망나니가 비밀저택에서 심심풀이로 시종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것도.
스물인 7황자가 32번째 애인을 얻자마자 하루 만에 뜨거운 밤을 보낸 것도.
향료 수집가인 3황녀의 취미가 실은 지독한 발 냄새를 감추기 위함이라는 것도.
그들의 측근만 아는 정보를 훤히 꿰고 있는 것들이 정보부였다.
‘그런 그들에게서조차 나오지 않은 정보를.’
살리카 가주의 개수작을 이안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뿐이랴.
일을 수습하는 과정까지 더해지자 감탄마저 나왔다.
눈두덩이를 자꾸만 실룩대는 부사령관.
그의 생각이 이안의 동공에 투명하게 비쳤다.
뭐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나한테는 일상이니 그냥 넘겨.’라는 듯 이안이 부사령관을 향해 설핏 웃어 보였다.
그런 연후 무심하게 무누스 설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있는 중앙 광장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계획대로 되어야 인명 피해가 없을 터인데.”
* * *
스슷.
살리카의 사냥꾼들은 설산 초입에 당도해도 서둘지 않았다.
우선은 일렬로 늘어진 집채만한 늑대 조각상에 몸을 숨겼다.
그러는 중에도 중앙 광장 쪽에 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폭죽이 터지길 기다리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
‘이제 곧.’
사냥꾼 중 앞서 있던 대장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초를 세었다.
손의 까닥거림이 열 번을 넘어가던 때.
펑. 퍼어엉.
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이 쉬지 않고 터졌다.
보는 맛이 있는 폭죽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과시라도 하듯이 몇 분간이나 이어지며 흥을 돋웠다.
멋모른 채 신명나게 터지는 화려함에 대장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그의 입가에서 질 낮은 비열함이 가신 즉시였다.
콰과광.
중앙 광장 쪽에서 무누스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굉음이 났다.
설산이 기우뚱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지축이 뒤흔들렸다.
“됐다.”
인간 폭탄이 터진 것이다.
사람이 죽어 나가며 아비규환이 됐을 터라 뷔트시겐 것들은 지금 그걸 수습하기에도 벅찰 터.
그들의 관심이 광장에 쏠린 이때가 적기였다.
화르륵.
대장은 불씨를 이용해 다른 사냥꾼들이 볼 수 있게 신호를 보냈다.
‘누각까지 단숨에 주파한다.’
그 즉시 살리카의 사냥꾼들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들이 가주에게서 받은 명은 하나다.
단 한 명이 살더라도 바람의 인장을 가져와라.
숨이 끊어지는 것은 바람의 인장을 바친 뒤에 할 것.
그 명령을 가슴에 새긴 사냥꾼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죽음은 명예로운 것이라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들 중 제일 결연한 것은 대장이었다.
샤샤삭.
그는 자신의 번개 정령이 내달린 길을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번개가 깔린 대지는 내리막길과 흡사했다.
한 걸음이 열 걸음이 되도록 만들어주었으니까.
사물이 이지러져 보이는 속도에도 그는 주변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방심해선 안 된다.
뷔트시겐이 어떤 작자들인지 사냥꾼이라서 더 속속들이 잘 알았다.
그 작자들은 결단코 적을 살려 두지 않는다.
특히 원한에 관해서는 자비가 없다.
상대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눈알을 도려내고, 힘줄을 끊어내고, 관절 마디마디의 뼈를 발라낸다.
한마디로 말해 미친놈들이었다.
그러니 뷔트시겐을 빠져나갈 때까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그의 신경줄이 곱절로 예민해졌다.
뷔트시겐의 중심부에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신중하고 또 의심해라. 간교한 능구렁이가 둘이나 있는 곳이니. 한 걸음 한 걸음을 칼날 위를 밟듯 해야 할 것이다.>
살리카 가주의 당부가 대장의 머릿속에 빙글빙글 휘몰아쳐서다.
제 주군은 평소 당부란 것을 하지 않는다.
조심해라, 의심해라 이런 사족 없이 명만 하달할 뿐.
주군의 반응이 여느 때와 달랐기 때문이리라.
괜스레 명치 끝이 설컹거렸다.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머리끝이 쭈삣쭈삣 섰지만, 그는 애써 내리눌렀다.
주군이 명한 것을 완벽히 이행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상념 대신 독기 같은 다짐을 집어넣으며 드디어 도착한 누각.
‘……바람의 인장.’
인장이 어서 가져가라는 것처럼 영롱하게 빤짝였다.
일단 저 인장을 손에 쥐기만 하면 임무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대장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장 인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
허무하게 인장을 통과해버린 손.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설……마?
대장은 인장을 스쳐 사위를 매섭게 살폈다.
채 1분도 되지 않은 탐색 후.
함정이다!
“퇴각한다, 당장.”
상황을 빠르게 간파한 대장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명했다.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를 보내왔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라고.
더 따지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각 누각에서 발을 뗌과 동시에였다.
스슷.
그들을 포위하듯 누군가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펄럭이는 검은 정복이 곧장 예기를 뿜으며 군집을 형성했다.
뷔트시겐 친위대…….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일렁이고 있는 무지갯빛 덩어리들…… 무지개 정령이었다.
저것들이 이 정도의 수로 포진해 있다는 건.
‘진즉 환술에 당했다는 거군.’
무누스에 발을 디딘 순간 이미 저들의 배 속으로 기어간 거나 다름없었다.
폭죽이 터진 것도, 폭탄이 터진 것도 전부 가짜라는 뜻이었다.
제길!
눈가의 문신을 긁은 대장은 탈출할 수 있는지 재려고 포위망을 훑었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새지 않게 어찌나 촘촘히 박혀 있는지.
‘그렇다면…….’
순순히 잡혀줄 수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자폭.
대장이 숨을 끊으려 어금니 사이에 낀 독을 짓씹으려는 찰나.
“뭐 맛있는 거라고 독부터 처드시려고 하나.”
친위대들 사이에서 유독 앳된 소년 하나가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묘한 행보로 제 주군의 경계심을 한껏 끌어낸 새끼 늑대.
이안 뷔트시겐이었다.
* * *
이안이 무누스 설산에서 사냥꾼들을 포획하는 사이.
니콜라스는 중앙 광장의 풍경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시며 폭소를 터트리고.
모두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질 뻔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프살트리아가 기생하는 자들을 전부 색출해 내서 다행이었지.’
그들을 걸러내는 작업은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성문에서는 일부러 통과시킨 뒤 중앙 광장까지 오게 만든 것.
이유는 간단했다.
무누스 쪽으로 간 살리카들이 눈치를 채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생포해야 하니까.
생각에 빠진 니콜라스의 곁에서 노상 붙어 다니는 무리가 흥분한 듯 쑥덕거렸다.
“기발하지 않았어?”
“태양초 원액을 공중에서 대량 살포하는 거? 신박했지.”
“와아, 나는 그걸 과하게 사용하면 아예 기생하는 정령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거, 처음 알았다.”
“애초 그런 정보는 어떤 책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까 알 턱이 없지.”
“그래도 다행이다. 월영초를 마신 사람 중에 임산부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난 진짜 식겁했다. 태아한테까지 그렇게…….”
잠시 가라앉는 공기.
이에 생도 하나가 잘 끝났으니 다행인 거 아니냐며 손을 휘저었다.
“야, 야, 길게 생각하지 말자. 괜히 마음 이상해지니까.”
“그나저나 이게 다 도련님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라던데.”
“사실 우리 할아버지가 루시안 형을 밀어서 말 못 했는데 말이야. 진짜 도련님 대단한 것 같아.”
“동감. 교관님이고 장로님이고 왜 다들 그렇게 칭찬만 하는지 다시 한번 느꼈잖아.”
조잘조잘 떠드는 생도 무리.
그들이 한 말을 한참 훔쳐 듣고 있던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하게 말해 저들처럼 그 역시도 놀란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계획을 짜도 변수는 있기 마련이고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
한데 이번의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굴러갔다.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뜻.
‘마치 앞날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지.’
그 사실에 새삼 니콜라스는 제 기억 속 이안을 헤집어 보았다.
매사 덤덤한 얼굴 탓에 품고 있는 생각들을 알 길은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할 때마다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 내긴 했다.
확실히……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큼 능력이 있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인정해버리자니 루시안이 걸려서 순순할 순 없었지만.
“정찰이나 가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끝까지 루시안 편을 들고 싶었다.
그동안 쌓은 정이 있지, 리오처럼 배신자가 될 순 없었다.
니콜라스는 입술을 악다물며 소란스러운 광장을 벗어났다.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살리카 무리 중 감시자 역을 맡은 놈들을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살트리아가 기생한 자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감시자들 말이다.
그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내는 것이 이 계획의 마지막이었다.
해서 감시자들의 흔적을 찾아 배회하고 있는데…….
“어?”
바지런 떨던 니콜라스의 눈에 누군가의 옷자락이 잡혀 들었다.
루시안?
옷자락의 그림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분명 형이었다.
루시안은 건물 사이를 바삐 돌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형도 그것들 뒤쫓느라 정신이 없나 보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루시안하고 합류해서 같이 정찰을 하면 효율이 더 높아질 수 있을 터.
니콜라스는 반가움이 그득한 몸짓으로 루시안을 불렀다.
“형, 나랑 같이 정찰을…….”
환하게 웃던 반가움은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루시안이…… 빨간 머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때려잡는 게 아니라 대화를.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검은색이 아닌 빨간색과 말이다.
으슥함을 뭉개며 눈을 찔러오는 그 색깔을 착각할 수는 없었다.
“루시안 형 지금 뭐 하는 거…….”
니콜라스의 중얼거림에 루시안과 살리카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