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81화 (181/214)

제181화

타닷.

이안은 무누스 설산에서 돌아오다 얼음 다리를 응시했다.

마차 네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은 얼음 다리.

양옆이 천 길 낭떠러지인 다리는 크라바나스 관문에서 슈바츠로 이어진 유일한 길목이다.

바꿔 말해.

도주 중인 감시자들이 뷔트시겐을 빠져나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여기를 지나간 것 같진 않은데.”

수색 중인 경비대에게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어찌나 수색망을 잘도 피해 다니는지.

미꾸라지 같단 생각을 하며 이안이 얼음 다리를 마저 건넜을 때였다.

지글지글.

어디선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불이 사람을 태울 때 나는 특유의 지글거림이 바람결에 실려 온 것.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이상 절대 헷갈릴 수가 없는 소리였다.

“미꾸라지들이…….”

그놈들이 틀림없다.

사냥꾼들이 기술을 사용하면 뭔가가 기름에 튀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니까.

이안은 곧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내달렸다.

목적지가 상당히 멀었다.

도착 전에 미리 저쪽의 상황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녹스, 도마뱀의 창.”

[알았다.]

녹스의 눈이 하얘짐과 동시에 허공에 도마뱀이 생겨났다.

츠응.

도마뱀의 꼬리가 잘려나가며 삽시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수 초 후, 이안의 눈앞에 어떤 장면이 송출되었다.

감시자 셋과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니콜라스.

“크으윽!”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니콜라스가 옹송그렸다.

붉은 진물에다 뼈까지 드러난 왼팔은 화상이 심해 살점이 너덜거렸다.

그렇다고 중심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닌데 니콜라스는 과하게 비틀거렸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림자가 저절로…….’

니콜라스의 그림자가 저 혼자서 찌부러지고 있었다.

흡사 종이가 구겨지는 것과 비슷하달까.

“끄어어어억!”

그림자의 오른팔이 접히면 니콜라스의 오른팔이 기괴하게 꺾였다.

으득. 으드득.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음침한 공간에 메아리쳤다.

‘안개 정령의 그림자 먹기군.’

실체가 없는 정령이 그림자에 스며 그림자를 조정하는 기술.

저대로 얼마나 당했는지 녀석의 상태가 과히 좋지 못했다.

온몸이 뒤틀린 채 겨우 숨만 붙어 있었으니까.

“적당히 해. 죽이지 않고 얼음 다리까지 데려가는 게 먼저야.”

“염려 마. 절로 굴러온 행운을 내 발로 차진 않을 테니까. 2장로의 손잔데 숨은 붙여놔야지.”

“인질을 앞세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누구 하나라도 주군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까.”

“앞날을 내다본 것처럼 전부 막아낸 이 기묘한 상황을 기필코 전달해야지.”

어쩐지.

수틀리면 자살부터 하고 보는 작자들이 왜 살아있나 했다.

나름의 이유로 수작을 부리며 틈을 노리는 것이다.

저들을 막으려면 니콜라스를 빼내는 게 먼저였다.

그러자면 니콜라스를 묶고 있는 기술을 끊어내야 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이안은 직선의 길 끄트머리에서 전방의 회백색 건물을 돌았다.

서둘러 온 덕에 니콜라스와 감시자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녹스, 차폐 실드.

녹스가 실드를 치는 동안 이안은 사냥개가 쓸만한 기술을 추렸다.

일시적으로 안개 정령과 그림자 사이의 마력 흐름을 차단할 수 있는 것.

-코르키, 끊어내기.

[캬앙!]

이안의 지시가 떨어지자 사냥개의 신형이 흐려져 갔다.

완벽히 공간에 녹아든 사냥개.

몇 초 후, 녀석이 다시 나타난 곳은 니콜라스의 그림자 쪽이었다.

샤악. 샤아악.

사냥개가 니콜라스의 그림자를 앞발로 마구 할퀴었다.

긁힘의 횟수가 더해질수록 그림자의 일렁임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종내에는 뭔가가 빠져나간 듯 그림자가 정지 상태가 되었다.

“끄륵.”

연결 고리가 끊기자 눈알을 까뒤집은 니콜라스는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

* * *

기술을 해제당한 감시자들.

그들은 낯선 마력의 흐름을 따라 잽싸게 고개를 틀었다.

“……새끼 늑대.”

예상치 못한 복병에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고작 에르그 따위가 혼자서 왔지 않은가.

감시자들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선 이안을 훑어내렸다.

흡사 돼지의 등급을 매길 때처럼 품평하는 시선이었다.

절로 기분이 더러워지는 터라 이안은 눈썹을 꿈틀했다.

“여기들 숨어 계셨네.”

“오호. 뷔트시겐의 적자께서 인질이 되겠다고 알아서 행차하셨군.”

“하. 인질?”

빈정거리는 이안의 말투에 감시자들이 우리 뜻대로 될 거라는 듯 음침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저들의 그림자에서 날카로운 돌멩이가 튀어나왔다.

“끄윽.”

돌멩이는 애초 목적이 하나라는 듯 니콜라스의 목을 스쳤다.

이안이 아닌 기절한 니콜라스를.

이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에 니콜라스를 죽이겠다는.

쏴아아악.

조건반사에 가깝게 이안이 돌을 풍압으로 밀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니콜라스의 살가죽이 갈라지며 피가 푸슈슉 뿜어져 나왔다.

“숨통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가 보지?”

“누구 숨통이 끊어질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고.”

“그 등급으로 버텨보시겠다?”

순순하게 말을 듣지 않는 이안을 압박하기 위해서였을까.

감시자들이 연달아 바위 정령을 이용해 니콜라스를 공격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니콜라스가 죽을 것이다.

3성 이상의 등급 차이, 인질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

이를 타개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쪽의 위치를 노출 시켜 군의 시선을 끌면 돼.’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침 시선 끌기에 적당한 기술이 있었다.

-녹스, 용암 폭발.

이안은 살풀이를 하듯 지면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 크기만큼이었다.

지면을 뚫고 나온 거센 용암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폭발적인 열기와 대기를 먹어치우는 위압감.

“……어떻게.”

순간 감시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용암 기둥의 위력 때문이라기보다 이안이 불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걸 본 이안은 더할 나위 없이 상큼하게 말을 뱉었다.

“내가 뭘 썼는지가 중요한가. 너희들이 이제 X 됐다는 게 중요하지.”

용암 기둥을 보았다면 누구든 올 것이다.

이안의 확신에 화답하려는 모양인지, 용암 기둥이 솟구친 일대에 얼음 가루가 휘몰아쳤다.

이후.

쇄애애액.

11시 방향에서 날아든 얼음 갈퀴가 널브러진 니콜라스를 잡아채 갔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정확한 손길에 이안은 반색했다.

“딱 맞춰왔네, 레브.”

“네가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으니 당연히 와야지.”

“캬캬캬. 나도 왔다, 이안.”

레브뿐 아니라 올리브까지 든든하게 서 있었다.

“니콜라스 상태는?”

이안이 묻자 레브는 색색 쇳소리를 내는 니콜라스를 곧장 진단했다.

피 칠갑에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있는 형국에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낙관할 만한 상태가 아니야. 일단 급하니까 난 응급 처치 들어갈게.”

부상이 심각한 니콜라스에게로 레브가 손을 뻗었다.

녀석의 손에서 노란색 실뭉치가 나풀나풀 어룽거렸다.

실뭉치의 움직임을 따라 빛의 정령 또한 치유의 기원을 강하게 발산했다.

“그럼 나는…….”

치유를 방해받으면 안 되는 터라 올리브가 즉각 땅을 내리쳤다.

콰과괏.

레브와 니콜라스를 에워싼 흙의 방벽.

“레브, 그 안에서 마음 놓고 치료해. 이 형님이 지켜줄게.”

올리브의 굳건한 눈빛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등급과 상관없이 두 녀석은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다.

그리고 믿음직스러웠다.

“두 사람 부탁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시 깽판을…….”

이안의 말꼬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도련님!”

깽판은 자신들에게 맡기라는 양 알란과 호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이안에게 바투 붙었다.

그들의 등장에 번개가 콰르릉 내리쳤다.

감시자를 노려보는 살기 어린 얼굴이 악귀처럼 섬뜩했다.

그들뿐일까.

푸드덕.

청백색 새의 날갯짓과 더불어 공중에서 누군가가 지상으로 하강했다.

“……히루푸스?”

어쩐지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히루푸스까지 등장하자 감시자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팽팽하던 추가 급격히 무너지며 일방적으로 기울어 버리고 말았다.

***

감시자들이 구속된 직후였다.

“니콜라스.”

소식을 들은 2장로가 치안대 초소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초조함이 담긴 걸음.

그 발길을 이안은 새삼스럽다는 듯 응시했다.

2장로가 어떤 사람이던가.

천지가 요동쳐도 결단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괜히 ‘노회하다’라는 평이 꼬리처럼 따라다니랴.

산전수전 다 겪어 닳고 닳아 웬만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아서였다.

한데.

매사 무던하던 2장로의 안색이 지독히도 창백했다.

그도 결국은 누군가의 할아버지였던 모양이다.

니콜라스의 몰골에 표정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니콜라스…….”

2장로는 피 칠갑을 한 채 의식이 없는 니콜라스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갈 곳을 잃고 하염없이 떨리는 동공과 차마 부서질까 봐 녀석의 옷자락조차 만지지 못하는 그 손이 2장로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토록 평정심이 깨진 건 니콜라스라서겠지.’

늘 엄하고 두루 살갑지 않은 2장로.

그런 2장로라도 말랑함으로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 니콜라스였다.

그를 어려워하는 이들과 다르게 니콜라스는 항상 곰살맞게 구니까.

그의 표정이 쓴 날에는 방긋 웃으며 입에 다디단 사탕을 넣어주고.

그의 표정이 가라앉은 날에는 온갖 재롱을 피워 기분을 펴주고.

생일날에는 선물이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종이를 접어주고.

천둥이 치는 날에는 무섭지 않냐며 곁에 와서 자주고.

이리 예쁜 짓만 골라 하는 손자인데 어찌 귀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녀석이 의식조차 없으니…….’

2장로는 한동안 넋을 놓고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2장로의 고개가 향하는 곳, 그 끝자락에 레브와 올리브가 있었다.

“자네들이 이 아이의 목숨줄을 구해주었다지.”

“아.”

“저 아이를 대신해 내가 깊은 고마움을 전함세. 고맙네.”

2장로가 레브와 올리브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에 두 녀석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훈훈함으로 응수했다.

그 모양새를 빤히 보던 2장로의 시선이 어느 참에 이안에게로 옮겨갔다.

“도련님, 이번에 신세를 크게 졌습니다. 내 언젠가는 이 은혜를 곱절로 돌려드리겠소이다.”

2장로는 이안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염려가 서려 습해진 2장로의 눈가와 죽은 듯 누워있는 니콜라스.

그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었다.

“그저 마음의 짐을 덜고자 했을 뿐입니다.”

“마음의 짐?”

“예. 그러니 그리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러다 2장로님마저 쓰러지겠습니다. 일단 휴식부터 취하세요.”

이안은 어서 가 보라며 2장로를 떠밀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고는 있으나 2장로의 기운이 급격하게 쇠한 느낌이었다.

강권에 마지못해 발을 뗀 2장로.

그가 니콜라스와 멀어지는 모습을 이안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백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잊히지 않을 장면이 절로 되감아 졌다.

전쟁 후반, 마지막 전투가 있기 한 달 전.

<도련님!>

다급한, 아니지 절박하기까지 한 2장로의 외침이 고막을 멍멍하게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불의 화살이 온 하늘을 뒤덮고선 끊임없이 쏟아졌다.

이안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양다리의 힘줄이 모두 끊겼는데 어찌 피하랴.

그건 살리카의 보급품 창고를 함께 털던 니콜라스도 마찬가지였다.

꼼짝없이 둘 다 죽겠구나, 죽음을 예감한 그때.

“크읏!”

이안은 갑작스레 온몸을 누르는 딱딱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온기가 뭔가 했더니…….

“……!!”

2장로가 저 대신 쏟아지는 불의 화살을 받아낸 거였다.

저를 온전히 감싼 형태로.

그로 인해 앞을 볼 수 없었으나 그렇기에 도리어 이안에게는 모든 것이 생생해졌다.

살이 익어가는 소리와 뼈가 녹는 소리.

독기로 버티고 있는 2장로의 거친 숨이 깎여나가는 대기의 떨림.

모진 잔상들이 살갗을 할퀴듯 긁어대자 이안의 숨통이 콱 막혔다.

무엇보다 폐부를 틀어쥐는 건 2장로의 시선이었다.

어딘가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 2장로의 눈.

누군가를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과 슬픔이 넘치던 그 눈.

2장로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은 불의 화살에 타들어 가는…… 니콜라스였다.

저 녀석이 어찌 될지 알면서 2장로는 저를 택한 것이다.

예언자였으니까.

그저 그가 뷔트시겐을 살릴 예언자였기 때문에.

“부디 뷔트시겐을…… 크읏. 나의 손주 놈의 몫까지 잘…… 지켜…….”

2장로는 그 채로, 니콜라스를 향한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숨이 식어갔다.

탁해지는 동공에 차오르는 희뿌연 습기를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차츰, 차츰.

……이안의 정수리에서 꺼져갔다.

평생 저를 싫어할 거라 여겼던 자의 숨이 그렇게 끊어졌다.

그 모습, 냄새, 소리, 오감으로 쏟아지는 것들이 아직도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생생하다.

아니.

그 찰나의 찰나를 잊을 수가 없다.

그를 어찌 잊을까.

오직 뷔트시겐을 위해 손주 대신 저를 택한 그 마음을.

그래서였다.

이 빚만은 유독 들고 있기가 버거웠다.

“……지독히 무겁던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았습니다, 2장로님.”

이안은 멀어지는 2장로의 뒤태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무거움이 이번 한 번으로 갚아지는 것이랴.

결단코 그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티끌만큼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