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82화 (182/214)

제182화

소란이 정리된 느지막한 오후.

가뜩이나 붐비던 중앙 광장의 외곽이 구경꾼들로 미어터졌다.

곧 있으면 생도 수료식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가주 승계식만큼이나 풍성하게 넘치는 그 의식이니 오죽할까.

“…….”

구경꾼들의 시선이 모두 광장의 끄트머리에 있는 단상에 머물렀다.

단상은 니게르라고 불리는 광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어 기묘한 검푸른 색을 뿜어냈다.

그 때문일까.

총 열 계단으로 그리 높지 않은 단상이 무척이나 까마득해 보였다.

우러르게 되는 단상의 위.

아홉의 장로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히루푸스, 정보부, 기사단의 사령관이 절도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저벅.

그들을 대표해서 기사단 사령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사령관은 중앙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사들을 슥 훑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인하고 예기가 넘치는지.

등등한 군과 구경꾼이 함께 만들어내는 무엇.

터질 것 같은 흥분 속 기사단 사령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식을 거행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기사들이 물결처럼 반으로 갈라지며 중앙에 길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비워둔 곳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몸을 돌렸다.

마치 한 몸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를 날카롭게 주시하던 사령관이 다시금 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발출.”

사령관의 명에 따라 기사들은 동시에 정령을 꺼내 들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늑대 정령이었다.

결속자의 발치로 의젓하게 정렬한 흰색 늑대 정령.

그들에게 지시하듯 기사들이 발을 굴리자, 늑대 정령들이 고고하게 하울링을 시작했다.

아우우.

그 울림에 맞춰 중앙 길에 있던 기사들도 오차 없이 검을 빼 들었다.

일제히 위로 들어 올려져 교차 된 검.

석양에 물든 검신이 유독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검신에 촘촘히 박힌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은은한 빛을 뿜었기 때문.

휘황찬란한 검들은 조각조각 이어 붙여지는가 싶더니 중앙의 길을 등불처럼 밝혔다.

그 길의 끝, 사령관들을 직시한 가주가 정복을 펄럭이며 위엄있게 섰다.

“충.”

절도있게, 그러나 진심을 다해 토해낸 기사단의 한 마디는 사람들을 뒤흔들었다.

어떤 구경꾼들은 제가 주인공이라도 된 양 으쓱대기도 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용된 영광을 덧입고 가주는 검의 길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묵직하게.

앞으로 내디딘 걸음의 끝은 단상 위였다.

단상에 선 가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훈풍 도는 시선에도 구경꾼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절로 그리되었다.

만인의 위에 선 자를 본 평범한 이들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구경꾼들은 가주의 시선이 가는 방향대로 천천히 검의 길 끄트머리까지 향했다.

조금 전 가주가 섰던 그곳에 생도들이 있었다.

이안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줄을 맞춘 앳된 생도들이.

정연한 그들을 본 순간 뭐랄까.

구경꾼들은 입이 간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네들의 기색에 수다를 떨고 싶어 움찔거렸지만, 그 충동을 참아냈다.

때마침 기사단 사령관의 묵직한 음색이 들렸으니까.

“뷔트시겐의 다음을 수호하고 지켜나갈 생도들, 앞으로 나오도록.”

“예.”

생도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흔들리는 공기를 타고 생도들은 절도있는 걸음을 옮겼다.

발을 뗄 때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검신이 불꽃처럼 튀었다.

영원토록 남을 영광의 길, 그 끝에서 멈춘 생도들은 가주를 향해 묵례했다.

“두 달간 수고가 많았다.”

“…….”

“오늘부로 그대들은 뷔트시겐의 한 축을 짊어질 정령 기사가 된다.”

한 축을 짊어질 정령 기사.

절로 뿌듯해지는 말에 생도들의 뺨이 실룩거렸다.

화색이 도는 그들을 찬찬히 보던 가주가 힘있게 덧붙였다.

“기사라는 이름은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야 완성되는 것. 그러니 앞으로도 곁에 있는 동료를 존중하고 믿으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

“그 길에 언제나 영광과 긍지가 가득하기를 빌어주겠다.”

“감사합니다.”

“이런 날 사족이 길어 뭐할까. 지금부터 수료식의 백미인 영입식을 진행한다. 각 군의 사령관이 충분히 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니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가주의 한마디 한마디에 생도들의 기색이 수시로 바뀌었다.

이번 참에는 긴장이 어렸다.

자신들이 평생 몸담을 곳이 정해지는 순간이니 어찌 담담할 수 있을까.

등허리가 빳빳해진 생도들을 두고 가주가 사령관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작하지.”

가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령관들이 단상 우측의 수정구 쪽으로 다가갔다.

수정구는 의사를 투영하는 마도구였다.

사령관들이 손을 댄 즉시 그들이 발탁한 이에게 표식을 남기는.

반투명한 수정구에 사령관들이 각각 손을 얹었다.

우웅.

그러자 한 수정구에서 밤을 닮은 검은빛이 새어 나와 누군가에게로 이어졌다.

정보부의 문양인 늑대가 하울링 하는 형상, 그것이 손등에 내려앉은 이.

제일 먼저 선택을 받은 자는.

“저요?”

깨발랄한 올리브였다.

하긴.

녀석의 친화력은 정보부에 가장 잘 어울렸다.

올리브를 시작으로 열 명을 채울 때까지 정보부의 선택은 이어졌다.

히루푸스와 기사단 역시 경쟁하듯 발탁을 해나갔다.

각 군의 문양의 색이 허공에서 뒤엉키는 가운데, 두 개의 군에서 지목을 받는 생도도 생겨났다.

바로 레브와 리오였다.

둘은 히루푸스와 기사단에서 욕심을 내며 영입하길 원했다.

점차 과열되던 양상이 30여 분 만에 얼추 마무리되고, 이제 이안만이 남아 선택을 기다렸다.

‘이안은 어느 군의 선택을 받을까.’

‘한 군데? 두 군데? 과연 어떤 색이 나올지.’

생도들이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수정구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 순간.

낮은 진동과 함께 수정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색이었다.

“정보부다.”

누군가의 외침이 광장을 메울 만큼 크게 울렸다.

그러나 섣부른 단정이라는 것처럼 곧바로 또 다른 수정구에서 군청색이 새어 나왔다.

기사단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뿐일까.

그 뒤를 이어 청백색마저 발하며 이안에게로 날아들었다.

이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한데 뭉쳐지는 삼색.

“와아! 세 군데 전부 다. 역시 우리 대장!”

“와아아아아!”

올리브의 감탄이 끝남과 동시에 생도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축하한다는 말이 꽤 격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환호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그 환호에 뒤따르는 흐뭇한 미소를 덤으로 달고.

기사단, 사령관, 장로들, 하물며 가주까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똑같은 미소를 내보였다.

* * *

수료식이 끝난 후 발르와 가.

루시안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탁자만 쳐다보았다.

어쩌자고 일이 이 지경까지.

‘살리카와 엮일 생각 따위 애초에 없었는데…….’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호그의 휘파람에서 친구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난데없이 살리카가 접근해왔다.

가주가 보낸 전령이라나 뭐라나.

처음에는 대체 의도가 뭔가 싶어서 부러 상대의 말을 끊지 않았다.

솔직히 별 시답잖은 말들뿐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에르그 3성인 것이 경이롭다는 둥, 중앙 아카데미에서 매년 수석을 하는 게 대단하다는 둥.

대체 제 앞에서 뭐하나 싶을 정도로 칭찬 일색이었다.

들을 가치가 없는 싱거운 말들.

이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서려 하자, 그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혹여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거든 저희에게 언제든 연통을 주십시오. 믿지 못할 것을 아나 우리는 당신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따져보십시오. 적자가 부각 된 마당에 언제까지고 2장로가 당신의 뒷배가 되어줄 것 같습니까.

할아버지인 2장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필요하다면 형제도 치는 비정한 자입니다. 하니 손주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순 없지요.>

사람의 심중을 뒤흔드는 말을 남기고 살리카는 멀어져 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다시 연락을 해왔다.

이안에 관한 비밀을 알려줄 테니 모월 모시에 만나자고.

이 제안만큼은 선뜻 응했다.

그 비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궁금했으니까.

저를 벼랑 끝으로 모는 이안이란 놈에게 진짜 뭔가가 있나 싶어서.

혹 뭔가를 알게 되면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서였다.

그렇게 방학이 끝나면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 하던 차였는데.

‘오늘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감시자 수색 중에 우연찮게 그들과 맞닥트렸다.

기막히게도 그들은 꼭 제가 자신들의 편인 양 굴었더랬다.

도망갈 방편을 마련해 달라라니.

‘하아.’

그때야 비로써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잠깐의 만남일 뿐일지라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구나 하는.

평생 적이었던 자들과 마주 앉으려 했던 제가 어리석었던 거였다.

하여 정신을 차리고 뭔 개소리냐며 일갈하려 했는데.

<루시안 형…….>

니콜라스가 그 장소에 나타났다.

하필 저들과 싸우려던 시점에.

저 하나야 괜찮지만, 저보다 약한 동생이 저들과 대치하게 둘 수는 없었다.

등급 차이가 나도 너무 났으니까.

명백하게 죽는 쪽은 니콜라스가 될 터.

일단은 녀석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할 것 같았다.

하여 태도를 바꾸고 안전 가옥을 일러주었다.

‘분명 감시자들이 떠나는 걸 확인하고 니콜라스까지 안전한 걸 확인했는데…….’

루시안은 죄책감에 삐져나온 한숨을 어쩌지 못하고 깊이 내쉬었다.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달그락.

찻잔이 탁자의 표면에 부딪히며 나는 작은 소리였을 뿐이었다.

한데도 그 소리에 놀라 루시안은 어깨를 움칠거렸다.

“루시안.”

“……예, 2장로님.”

“욘석. 사석에서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예, 할아버지.”

루시안의 목소리는 한껏 기어들어 갔다.

그런 루시안을 물끄러미 보며 2장로가 아케랑코 홍차를 맞은편에 놓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돌렸다.

가만가만 돌리는 손길이 꼭 뭔가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영민해도 상황에 잘못 휩쓸리면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지.’

상황이라는 건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만 가지 않는다.

각자의 생각과 신념, 이득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거니까.

“흐음.”

2장로는 느리게 돌리던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안을 직시했다.

그가 곧은 눈으로 보자 루시안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아직 풋내가 나는 어린 정수리에 2장로는 배때지 한 편이 아릿했다.

이제 열여덟이니…….

어리기에 철이 없어도, 실수해도 그런가보다 봐 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철없음이 용서되는 그런 시기가 있잖은가.

저 역시 그 시기에 수많은 유혹에 흔들리며 고민을 거듭했었다.

저조차도 그래놓고.

루시안에게 흔들리지 마라, 완전무결해라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살리카와 접촉한 것은 별개의 문제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특히 두 번째는 루시안의 의도가 어떻든 내통이 될 수도 있었다.

이는 철이 없다는 말로 덮을 수 있는 문제를 아득히 넘어서 버렸다.

질책하는 것이 마땅하나…… 안타까움이 먼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시안이 흔들린 까닭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전부 내 탓이지.’

어느덧 녀석은 2장로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렸다.

루시안의 일곱 살 때부터였을 것이다.

오로지 후계자가 되고, 가주가 되는 그 자리 하나만 보고 살도록 제가 그리 만들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아이에게서 선택권을 뺏은 결과가 바로 오늘과 같은 사태를 만들었다.

그러니 일련의 일들은 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2장로는 여전히 숙인 고개를 들지 않는 루시안에게 차분히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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