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83화 (183/214)

제183화

“루시안,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이번에 시찰단이 꾸려지는 것 말이다.”

“아, 들었습니다. 뷔트시겐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감찰할 예정이라지요.”

“음. 저번 아라투스 마을 건이 계기가 되어 가주님께서 결단을 내리신 게지. 차후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니.”

아무리 가주가 여기저기 신경을 써도 한계가 있다.

이곳 슈바츠처럼 그가 거하는 곳이라면 모를까 결국, 영지가 돌아가는 건 그곳 토박이들의 몫.

이런 경우 대개가 물이 고이듯 정체하게 된다.

정체된 물은 썩기 마련이고.

시찰단의 목적은 그런 곳을 찾아내 도려내려는 것이었다.

살리카 가주가 썩은 부위를 파고들어 뷔트시겐을 흔들기 전에 말이다.

2장로는 차를 한 모금 마셔 건조한 목을 축였다.

뜨뜻한 것이 목구멍을 적시자 한결 목소리가 매끄럽게 나왔다.

“하여 가주께 청을 넣었다. 내게 시찰단의 지휘관을 맡겨주십사 하고.”

“할아버지의 청에 가주님께서 응해주셨습니까.”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손주 놈 때문에 충격받고 가출하려는 넋 빠진 인사처럼 보더군.”

가주 뿐이었을까.

측근들마저 나이를 생각하라며 만류를 했다.

이번 시찰단은 목적상 짧게 잡아도 몇 년이 걸리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잘못하면 큰일 날 수 있다고 어찌나 잔소리들을 하던지.

귀에 피가 날 것 같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2장로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나 나중에는 내 속내를 짐작하고 허하시더구나. 물론 무탈하게 돌아오지 않으면 불충으로 여기겠다고 엄포를 놓으시긴 하였지만.”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고되고 힘들 것을 아나 고집을 부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장로는 시찰단을 계기 삼아 저와 제 주변을 세세히 돌이켜 볼 요량이었다.

지금은 그럴 필요성이 있는 때였으니까.

눈매가 깊어진 그는 다시금 잔잔하게 찻잔을 돌렸다.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자꾸 말을 빙빙 돌리나 싶겠구나.”

“아, 아닙니다.”

“근래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내가 너에게 했던 강요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건 강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하나 결국 그것이 오늘 같은 일을 만들지 않았느냐.”

“……?!”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말에 루시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무릎이 탁자를 치며 엎어진 찻잔이 즉각 아래로 낙하했다.

챙그랑.

모난 파열음이 루시안의 심장 한편을 쿡 하고 찔러왔다.

“이 노부뿐이 아니다. 루시안 네가 흔들린 것을 이미 가주께서도 알고 계신다.”

“가주님이…….”

당황한 그를 두고 눈치껏 하인이 들어왔다.

하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묵묵히 주변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제 할 일을 마쳤으니 가보겠다며 2장로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후 하인은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서늘함인지, 그저 말소리가 없기에 생기는 적막감인지.

뭔지 모를 공기가 휘도는 집무실에서 루시안은 밭은 숨을 내쉬었다.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의 숨통을 붙잡듯 2장로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알면서도 가주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티조차 내지 않으셨고.”

“…….”

주군이 눈치챈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랴.

진즉부터 제 둘째 자식 놈, 루시안의 가족을 감시하고 있었으니 몇 달은 되었다.

한데도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기회를 준 것이었다.

발르와 가의 가주로서 제 선에서 해결하라는.

이는 주군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아량이었다.

주군이 나서게 되면 결국 공식적인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선 발르와 가를 도려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 너를 신임하고, 또 나를 신임한다는 것이지.”

가주의 신임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녀석의 마음부터 다잡아줘야 할 터.

2장로의 시선이 파르르 떨리는 루시안의 손끝에 잠시 머물렀다.

“루시안.”

“……예.”

“이 할애비와 함께 가자꾸나. 시찰단이 되어서 말이다.”

“할아버지.”

“뷔트시겐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사이 알게 되지 않겠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

자신의 강요가 아닌 루시안이 온전하게 원하는 것.

그것을 찾아주고 싶은 게 2장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나.

‘이 슈바츠에 머물러선 그럴 수가 없지.’

명문인 발르와 가에서 태어나 슈바츠란 우물에 갇힌 개구리.

딱 그만큼의 세상에서 오직 하나만 보아온 녀석, 그게 루시안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갑자기 다른 곳을 보라 한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니 억지로라도 그 방향을 비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시찰단이란 기회로 말이다.

너른 세상을 겪다 보면 필시 지금과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에.

“이 할애비와 한 번 찾아보자꾸나.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찾는다…….

도로 의자에 앉은 루시안은 양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렸다.

그에 관해선 지금껏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해서 갈피를 잡지 못한 머릿속이 자꾸만 멍해졌다.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정말로…… 할아버지 말마따나 슈바츠를 떠나보면 이 혼란이 걷힐까.

“정말 그리될 수 있을까요.”

“너는 현명한 아이이니 나는 믿고 있단다.”

2장로의 즉답에도 루시안은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떠도는 공기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루시안의 속내를 대변해주듯이 말이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루시안의 손등을 2장로가 찬찬히 도닥였다.

“네 결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갈 얘기를 하나 해주랴?”

“……무슨.”

“이번 시찰단의 행렬에 니콜라스도 데려갈 것이다.”

“니콜라스요?”

“너도 알지 않느냐. 그놈의 정신머리를. 제 등을 맡겨야 할 동료를 무시하는 그놈의 정신머리를 말이다.”

“…….”

“그놈에게는 묻지도 않았다. 내 직권으로 시찰단에 넣어놓았지. 물론 말단으로.”

“아.”

“호되게 굴릴 것이다. 그 정신머리가 고쳐질 때까지.”

2장로는 부러 가볍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루시안의 마음이 조금은 헐거워지기를 바라면서.

* * *

수료식이 끝났다고 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리해야 할 것들이 평소보다 더 많아졌다.

만나야 할 사람도 있었고.

이안은 정원을 가로질러 라줄리 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클로에 교수를 보러 가는 거지?]

“어. 종일 바빠서 라줄리 관으로 모셔놓고 얼굴 한 번 못 봤다.”

[그나저나 무엇 때문에 널 보려는 것일꼬.]

“글쎄.”

고개를 갸웃한 이안은 바지런히 걸은 덕에 예정보다 빨리 라줄리 관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선 즉시였다.

하인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가와 곧바로 소식을 전했다.

“도련님, 조금 전에 손님께서 외출하셨습니다.”

“언제 나가셨는데?”

“한 시간 전쯤입니다.”

“한 시간?”

“조금 걱정이 됩니다. 분명 10분 정도면 돌아오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안 오셔서.”

“흐음. 외출 전에 별말씀은 없으셨고?”

“특별히 전하라 하신 말씀은 없었는데, 유독 서신 하나를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영민한 하인은 클로에 교수가 보던 서신의 글자를 몇 개 읊었다.

살리카 가주, 실험, 무슨 술식, 탈출 등등.

연관성이 있는 듯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한편에 밀어두었던 궁금증이 부풀어가던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클로에 교수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 겹의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누군가를 대동하고선.

* * *

라줄리 관의 응접실.

하인은 뜨겁게 데워진 자스민 차를 이안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온도가 적당한 차를 클로에 앞에 놓았다.

대체로 살리카는 뜨거운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

손님의 기호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을 내놓은 뒤였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안에게 정중히 말을 건넨 하인은 민첩하게 퇴장했다.

본래라면 곁에서 자잘한 일들을 거들어야 하나, 밀담을 나누려 할 땐 곁을 지킬 필요가 없다.

이런 순간에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측근뿐이다.

하인이 떠난 후.

이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열기에 성대가 물렁물렁해졌다.

이제야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달까.

눈매가 부드러워진 이안은 차를 홀짝이고 있는 클로에에게 말을 건넸다.

“안 본 사이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클로에 교수님.”

“능청은. 그래도 유들유들한 네 목소리를 들으니, 널 만난 게 실감이 나긴 하는구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똑같지. 별다를 게 뭐 있겠니.”

“저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많이 보고 싶어 한 거 아십니까.”

“녀석. 너희들 맘이 내 맘이다.”

클로에는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까 수료식 때 보니 다들 멋져져서 깜짝 놀랐다.”

“그 말을 녀석들이 듣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러잖아도 지금 별관에서 한 상 차려놓고 교수님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 말을 들으면 어후야.”

“그렇다면 녀석들에게는 내 비밀로 하마.”

클로에가 눈을 찡긋하자, 이안이 시원스레 웃어젖혔다.

녀석은 언제봐도 똑같다.

저한테는 잘 웃고, 항상 편안한 낯을 내보인다.

“오늘 수료식을 보니 알겠더라. 뷔트시겐으로 돌아와 네가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

“장로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그 정도면 말 다 했지.”

“저야 어딜 가나 인기가 많지요.”

“후훗. 널 반대하는 2장로 파를 대체 어찌 구워삶았을꼬.”

클로에의 표정이 세상 다시 없게 개구졌다.

말투며 안색이며 행동이며 기색까지 모든 것이 예전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분명 그러한데…….

‘교수님의 태동의 색이…….’

클로에를 감싸고 있는 감정의 색이 무척이나 복잡다단했다.

자책? 후회? 분노? 슬픔?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색들이 맞물려 요동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솔직히 말해 저런 반응을 보일 만한 것이라면 딱 하나가 있긴 했다.

바로 살리카 가주에 관한 것.

이안은 나름 짐작해보다 찬찬히 입을 뗐다.

혼자 백 번을 추론해보는 것보다 직접 묻는 게 궁금증 해결에는 더 빠른 방도였으니까.

“교수님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이고. 내가 누굴 속여. 눈치 하면 너인데.”

“혹 살리카 가주 때문인 겁니까?”

“말해 뭐할까.”

안경을 추켜올리는 클로에의 손길이 옴팡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러고도 쉽사리 입을 열지는 않았다.

찰나의 적막.

클로에가 빚어낸 틈을 직시하던 이안의 귓가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거친 쇳소리에는 핏물이 고여있는 듯한 그렁그렁함이 잔뜩이었다.

“스승님, 말씀하시기 곤란할 테니…… 이제부터는 제가 대신 말할게요.”

목소리의 주인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던 이방인이었다.

나이도 성별도 가늠하기 어려운.

이방인은 얼굴을 덮고 있는 후드를 뒤로 넘겼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전에 이것부터 봐야 이해하기 쉽다는 듯이.

“……?!”

드러난 얼굴이…….

마치 천을 여러 겹 덧댄 것처럼 기워져 있었다.

게다가 수십 번 입은 화상으로 변색 된 멍 자국마저 눌어있었다.

설……마?

뭔가를 짐작한 이안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 여자의 메마른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뿌리 깊은 증오와 원망 역시.

‘살리카 가주가 자행한 실험, 그것의 희생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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