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이안은 기분 나쁘지 않을 선에서 여자의 턱을 스치듯 보았다.
마치 불꽃을 형상화한 것 같은 화상 자국.
검은 흉터는 실험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가지는 표식이었다.
살리카 가주의 소유라는 것을 낙인찍는.
“후우.”
숨을 몰아쉰 젊은 여자가 양손으로 힘겹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을린 손조차도 말짱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검지와 새끼가 없었다.
중지는 끝부분만 남았는데 그 단면이 뜯긴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은 제가 누구인지부터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
“저는 살리카 가주의 사냥꾼, 그들 중 하나의 가족이었어요.”
“아.”
“물론 그조차도 과거일 뿐이지만요.”
쓰게 웃은 여자는 살덩이가 시커먼 눈꺼풀을 억지로 감았다가 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 듯 찡그렸지만 그래서인 것 같았다.
고통으로 다른 뭔가를 억누르는 모양새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벌써 반년…… 전이네요. 아버지가 살리카 가주의 명을 받아 누군가를 호위한 것이.”
“호위?”
“곧 죽을 것처럼 삐쩍 곯은 데다 마력핵도 없는 아이였다 들었어요.”
“마력핵이 없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그런 아이를 살리카 가주가 꽤 값진 물건처럼 대했다고 하더군요. 자기 외엔 안중에도 없는 개새끼가.”
여자는 험악한 표정으로 욕을 쏟아냈다.
그럴수록 점차 빨라지는 어조에는 진득한 증오도 같이 배어 나왔다.
“어쨌든 그 아이를 그라나토스로 데리고 가는 간단한 임무였는데…….”
여자는 누가 머리통을 후려쳐도 잃어버릴 수 없는 기억을 더듬었다.
임무를 다녀온 후부터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예정된 수순인 양 앓아누웠다.
수시로 찾아오는 고열과 발작, 그리고 토혈 속에 섞인 내장 조각들.
그때마다 복잡한 진이 새겨진 몸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해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증상과 아버지의 중얼거림은 결국 사흘 만에 끝이 났다.
그렇게 아버지의 식은 숨이 꺼지기도 전.
난데없이 살리카 가주의 친위대가 들이닥쳤더랬다.
가타부타 어떤 설명도 없었다.
무자비하게 매질하며 그저 가족들 전체를 어딘가로 끌고 갈 뿐.
그렇게 도착한 곳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감옥이었다.
겨우 몸 하나 누울 곳밖에 없는 협소한 공간.
닭장 같은 그곳에 자신들만 있었을까.
그라나토스에 함께 갔던 다른 사냥꾼의 가족들도 모조리 붙들려 온 상태였다.
“가주에게 개처럼 충성한 대가가 그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여자는 말을 하다 말고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숨이 점점 까끌까끌해졌다.
잠시 흉통을 진정하려는 듯 여자가 말을 멈추었다.
그를 가만히 직시하다가 이안은 이내 생각에 잠겨 들었다.
사냥꾼, 그라나토스, 진이 새겨진 몸, 마력핵이 없는 아이.
반년 전 라이라프스를 말로의 탑으로 데려간 사냥꾼에 관한 얘기였다.
여자의 입을 통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어쩐지 카르디아들이 그라나토스에서 잘도 움직인다 했다.]
-몸에 진이 있었단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술식을 새긴 모양이야.
[아마 수호자가 레와티움에게 해주는 것과 비슷한 것일 터. 그런 건 또 어떻게 고안해 낸 건지.]
-그 술식이 목숨을 빼앗았다는 게 중요하지.
[그 작자의 의도가 빤하다. 그라나토스에 관한 비밀을 감추려고 사람 목숨을……. 염병할 놈.]
목숨의 가치?
살리카 가주에게 누군가의 가치는 제게 쓸모가 있냐, 없냐로만 나뉜다.
자신에게 쓸모가 없으면 설령 황제라도 쓰레기일 뿐이다.
-그자에게 입막음이야 그냥 들이쉬는 숨 같은 거니까.
이안은 비소를 머금었다.
그 입꼬리에 맞장구를 치듯 일순 여자의 쇳소리가 고막을 긁어내렸다.
“아버지의 죽음도, 우리 가족이 끌려간 것도 전부 입막음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지요. 그 임무에 대한 입막음.”
입막음에 대한 대가는…… 지옥이었다.
잠을 자는 건 기절했을 때뿐인 실험이 줄창 이어졌다.
눈알을 적출당하고, 살이 갈라지고 또 지져지고, 힘줄이 뽑히고, 뼈가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고.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실컷 유린당하다 치유로 재생되는 과정이 무한 반복됐더랬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지독한 나날들.
“그렇게 실험을 당하다…… 한 달 전이었어요. 미친 새끼들이 실험의 강도를 높이더군요.”
“…….”
“재생력이 있는 살리카를 만들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죠.”
여자는 잘린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두 가지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자를 서둘러 만들어내야 한다나…….”
막 끌려왔을 당시에는 생살이 찢기면서도 어떤 실험인지 몰랐었다.
살아남는 시간이 길어지며 주워들은 게 많아졌을 뿐이지.
연구원들은 노상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진화된 살리카를 창조해 가주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후우.”
여자는 힐끗 곁눈질로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클로에의 만면에는 어찌할 수 없는 죄책감이 그득했다.
“보다시피 연구실의 재료로 쓰이다가 스승님 덕분에 탈출하긴 했지만…….”
더는 말을 잇기 힘들다는 양 여자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지고 있는 기력을 전부 소진한 듯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여자는 팔이 저릿한지 자꾸만 주물주물 문질렀다.
이안이 여자의 팔 쪽에 시선을 둔 사이.
여태껏 조용히 있던 클로에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실은 말이다. 이안 너에게 부탁을 하나 할까 싶어 얘기를 꺼냈다.”
“혹, 저분에 관한 것입니까.”
“살리카 어느 곳에도 안전한 장소가 없어, 피치 못하게 데려온 아이다.”
클로에는 손에 쥐면 부서질까 살포시 여자의 팔을 어루만졌다.
이미 이 아이의 신변에 관한 것은 뷔트시겐 가주에게 언질을 해두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조금 후에 있을 독대에서 말할 예정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는 않았다.
“이리 성치 않은 몸으로 혼자 있어야 할 게 심히 염려되는구나.”
“교수님, 염려 놓으십시오. 교수님께서 걱정하지 않도록 제가 잘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헤아려주어 고맙다.”
이안의 속 깊은 배려에 클로에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남은 볼일을 마저 끝내야겠다는 양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일단 나는 뷔트시겐 가주님을 뵈어야겠다.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아서 말이다.”
“그럼 저는 이분이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회포는 조금 이따가 풀자꾸나.”
돌아서는 클로에의 낯빛에 감출 수 없는 무거움이 감돌았다.
살리카 내에서 살리카 가주와 맞서는 일이 어디 쉬우랴.
가주에 비해 그녀를 지지하는 세가 턱없이 부족한 마당에 말이다.
가주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힘에 부칠 터.
이안은 옅게 스민 근심을 달고 무한정 클로에의 뒤태를 쫓아갔다.
제 시선이 끈질겨서일까.
문고리를 잡던 클로에가 슬쩍 뒤돌며 짓궂게 눈꼬리를 휘었다.
네가 하는 그 걱정은 넣어둬도 된다는 듯이.
“애늙은이처럼 걱정이 많긴. 솔직히 살리카 가주의 면상이 구겨지는 꼴을 보려고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는 거, 할만하단다. 생각보다 보람도 있고.”
클로에는 이안을 상큼하게 다독이고는 유유히 라줄리 관을 빠져나갔다.
* * *
며칠 후.
올리브는 가주의 집무실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뷔트시겐 가주는 제가 본 사람 중 두 번째로 멋졌다.
아무리 가주의 등급이 높고 위치가 높아도 첫 번째는 될 수 없었다.
첫 번째는 이안이었으니까.
하지만 멋진 가주님을 대면할 때마다 동경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가주님과 독대라니.’
올리브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가주를 뚫어지게 보았다.
불똥이 떨어질 만큼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게 원인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측면에서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근원지는 가주의 뒤편에 서 있는 칼브란이었다.
칼브란은 귀엽다는 듯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침으로 바다도 만들겠습니다.”
츄릅.
“설마 독대를 가주님의 잘생긴 얼굴을 보려고 청한 겁니까.”
“캬캬캬. 제가 또 가주님의 훔훔한 낯에 빠져 정신머리를 그만.”
올리브는 눈에 힘을 팍 준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말발이 살려면 일단 목소리가 중후해야 한다.
가주님처럼.
올리브는 목을 매만지며 한껏 튀는 목청을 재차 내리눌렀다.
“가주님, 어려운 부탁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 무엇이든 말해보려무나.”
“아, 부탁을 드리기 전에 제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부터 말씀드리는 게 먼저인 것 같네요.”
“음.”
“사실 지난 두 달간 수습 기간을 거치면서 깨달았어요. 아니, 더 확실히 느꼈다고 해야 하나.”
“…….”
“제가 아직은 이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벗이란 건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아서 벗이지 않겠느냐.”
“그렇긴 한데…….”
올리브는 양 주먹을 말아쥐었다.
좀 더 솔직해보자면 수습 기간에 느낀 것도 느낀 거지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엊그제도 절감했다.
수료식 날 살리카의 감시자들과 대치했을 당시에 말이다.
자칫하다간 누구 하나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
두 녀석과 함께 있어 두렵지는 않았으나 그것과 별개로였다.
감시자를 보자마자 무력감이 치밀었다.
제일 튼튼한 발리올로서 두 녀석을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무력감이 갈비뼈를 무참히도 쑤셨더랬다.
기분이 발끝에 처박힐 정도로.
“그런 벗이기에 더 지켜주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그렇기에 더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오호.”
“또한, 제 꿈을 위해서라도 정말 많이 성장하고 싶습니다.”
“꿈이라면?”
“저는 나중에 이안의 수호검이 되고 싶거든요.”
올리브의 당당한 포부에 가주는 호탕하게 웃었다.
수호검.
가주를 지키는 자리라 능력만 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뷔트시겐의 순혈 쪽에 가까워야 하며 명문가여야만 한다.
몇 번 바뀌던 수호검 가문이 랑고바트로 굳혀진 건 몇백 년 전.
그러니 이안의 수호검 역시 랑고바트 가에서 나올 것이다.
이미 정해진 바지만 가주는 올리브의 당돌함이 나쁘지 않았다.
고인 것은 썩는다.
천년 넘는 영화는 충분하게 그럴 만한 싹을 품고 있었다.
하여 가주는 에루리안의 아이들을 통해 뷔트시겐에 새 바람이 불기를 바랐다.
뷔트시겐이란 우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고이지 않았으면 하니까.
가주는 염원 했다.
천년의 영화?
아니지.
그보다 더 오래, 설원을 내달리는 뷔트시겐의 기상만은 살아남기를 원했다.
설령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제국은 망한다 할지라도 뷔트시겐의 기상만은.
가주는 깃펜으로 종이를 콕콕 찍었다.
새까만 먹물이 흡사 빗방울처럼 번져갔다.
“포부가 커서 마음에 드는구나.”
“헤헤.”
“그래 네 뜻은 알겠다. 하면 부탁하고 싶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게 말이에요. 저번에 낚시갔을 때 발리올 가주님이 제게 제안을 하나 하셨거든요.”
“아, 널 가르치겠다는?”
“예. 수습 기간까지 거치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분 밑에서 대지를 온전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올리브는 제 뜻이 오해를 사지 않도록 또박또박 의사를 전달했다.
발리올 가주.
대지의 원소를 다룸에 있어 최정점에 선 자.
그분을 스승으로 두면 필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모든 것을 쫙쫙 빨아들이면 단시간에 그리될 터.
그리되면 이 성장은 제 가치를 알아봐 준 이안을 위해 쓸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호검이 되어서.
올리브는 핏발까지 세워가며 뷔트시겐 가주에게 제 의사를 피력했다.
밤이 깊어가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