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85화 (185/214)

제185화

시찰단이 떠나는 날이었다.

그들은 슈바츠와 가장 가까운 롱슈테로 떠나기 위해 워프 게이트에 정렬했다.

가주의 배웅을 받는 시찰단의 후미.

“…….”

창백한 얼굴을 문지르던 니콜라스는 뷔트시겐 가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이안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블루벨 나무가 유난히 무성하게 자리한 곳.

창가마저 이파리로 완전히 가려져 안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게 정말이지 그 주인을 똑 닮았다.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이안과 말이다.

‘녀석이 시퍼런 블루벨까지 들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지도 못한 병문안이었다.

살리카 놈들에게 당했을 때야 인류애적 차원에서 도와줬다손 치더라도.

제 상태를 보러 올 것까진…….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산뜻한 모습으로 와서는 뭐라고 했더라?

<니콜라스, 그거 알아? 블루벨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관리하기 쉬워서야.>

맥락이 없는 서두였다.

너무 엉뚱해서 오히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적응력이 뛰어나서 옮겨 심어도 쉽게 죽지 않거든.>

이안은 저 혼자 잘도 떠들어댔다.

<거기다 블루벨을 심은 땅은 주변까지 전부 윤택하게 만들지.>

<적어도 한 가문을 이끌어나갈 자라면 응당 블루벨 같은 자를 알아봐야 하는데…….>

이안이 ‘너의 안목은?’이라고 묻듯이 니콜라스를 직시했다.

그 시선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그저 출신과 등급으로 사람을 대하니……. 음. 가문을 말아먹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셈인가.>

돌려 까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눈깔이 발끝에 달려서 어떻게 발르와 가를 이끌어가냐는 면박을 그런 식으로 전달할 줄은.

얄밉고 재수 없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실제로 저는 에루리안의 아이들을 출신만으로 낮잡아 봤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던가.

제가 낮잡던 아이들에게 도리어 목숨을 구제 당했다.

그러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간 제가 얼마나 오만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졌었는지에 대해.

‘예전에는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사막에 흩어진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버둥거리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도.

머릿속을 잠식해오는 생각들에 잠시 멍해 있는데, 이안이 그를 나직이 불렀다.

<니콜라스 발르와.>

<왜……요.>

<실수는 누구나 한다. 그리고 이 실수가 도태와 성장이란 갈림길을 만들지. 거기서 무엇을 택할지는 본인의 몫이고.>

<…….>

<나는 네가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2장로님의 손자니까.>

병 주고 약 준다.

그렇다고 녀석을 멋있다고 생각할 거라 여겼다면 오산이다.

사실만을 나불거리는 입 따위.

이안은 얄미운 도련님이 딱 적당했다.

그러니 저도 절대 저 인간을 ‘내 사람’이라는 범주에 넣지 않을 것이다.

콧방귀를 뀌는 니콜라스의 고막으로 부우우 하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둔중한 음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니콜라스는 저택에서 눈길을 거뒀다.

그런 연후 잽싸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목뼈가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휙휙 돌리길 잠시간.

니콜라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로 뛰어갔다.

어떤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이었다.

“루시안 형.”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바짝 붙자, 루시안이 멋쩍다는 표정을 흘렸다.

아직 루시안은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남은 듯했다.

그러니 병문안을 달랑 한 번밖에 오지 않았겠지.

전에는 없었던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니콜라스는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형이 좋았으니까.

시찰단에 동행한다는 것이 즐거울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루시안이 살리카와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제가 쥐고 있어야 할 진실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다면 시찰단이고 나발이고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배신자인 루시안을 쫓아 세상 끝까지라도 갔을 테니까.

오로지 제 손으로 죽이기 위해서.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깊이 내쉬어지는 니콜라스의 숨결을 따라 시찰단의 선미가 움직거렸다.

“어? 이제 진짜 떠나려나 보다.”

지도를 보던 2장로가 곁의 참모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일정이 빠듯하니 롱슈테에서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하는 것일 터.

“와아. 하나도 안 들리네.”

예전에는 그 명이 뭔지 할아버지 곁에 있어서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찰단의 말단이 되니 사정이 완전하게 달라졌다.

정보에 먹통이 된 것.

어떻게든 선미의 동향을 파악하려 니콜라스는 고개를 쭉 뺐다.

요리조리 기웃거려 봤으나 모가지만 아플 뿐이었다.

그럴수록 뼈저리게 느꼈다.

그간 참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고, 또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출발도 전에 그 사실이 니콜라스의 명치로 쑤욱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이안의 말 역시 뱅글뱅글 맴돌았다.

* * *

시찰단이 뷔트시겐을 떠나던 그 시각.

다그닥다그닥.

이안은 마차를 타고 슈튼하노버 영지를 가로질렀다.

맥락 없이 루하흐인 건 이틀 전 주방장인 한스가 어떤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도련님, 슈튼하노버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스가 가져온 서신에는 간략한 내용과 함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퀼라력 3월 26일.》

정해진 날에 맞춰 이안은 슈튼하노버 가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물자보급 총책임자인 한스가 루비 소금을 구매한다는 명목이었다.

막힘없이 나아가는 마차 안.

녹스가 통통한 다리를 흔들어대며 말문을 열었다.

상념이 많은 흔들거림이었다.

[클로에가 데려온 여자애가 한 얘기 말이다. 재생력이 있는 살리카를 만들려는 거.]

-살리카가 두 개의 원소를 다루는 자를 만들려는 거지.

[본래대로라면 그 실험, 지금이 아니지 않누?]

-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몇 년 후니까.

[한데 그 아이가 그랬잖느냐. 갑자기 실험을 강화했다고.]

-아무래도 일의 진행이 앞당겨진 것 같아. 지난 생과는 다르게.

[어허. 일이 자꾸 어그러지니까 심경에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혹 뭔가를 눈치챈 건가?]

-그럴 만도 하지. 이 정도까지 방해했는데 눈치를 못 채면.

군자금 마련, 둑스를 이용한 정보망 확보, 황가의 주요인물 암살, 레드니의 족쇄를 훔쳐 가주들의 전력 약화하기 등등.

살리카가 전쟁을 일으키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다.

한데 이안이 그것들을 막으면서 살리카의 팔다리가 다 잘려버렸다.

살리카 가주로서는 짜증 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인간 병기 양성을 앞당기려는 것 같았다.

이안의 말을 죽 듣다 녹스가 콧구멍을 넓히며 물었다.

[이는 어찌할 것이냐?]

-몰랐으면 몰랐을까 알아버린 마당에 해결해야지.

[어찌?]

-얼마 후면 가주 회합이잖아. 그때?

[으음.]

이안의 단호함에 녹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는 그에 대해서 말을 보태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정령 치료제를 선점하는 것뿐인데.]

-접착제 때문에 바다 엘프 쪽에 끊임없이 요청을 넣는데도 묵묵부답이네.

[그것들은 원체 콧대가 높은 족속들이라.]

-일단 할 수 있는 시도는 다 하고 있으니까 기다려봐야지.

[하긴. 지금 슈튼하노버로 향하는 걸음도 바다 엘프 쪽이 어찌 될지 모르니 가는 것 아니냐.]

치유의 독점에 있어 치료제 쪽의 진척이 느려지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답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려운 방도지만 나중에 하려던 일을 앞당길 수밖에.]

-어. 레브를 통해서 일단 루하흐를 동맹으로 끌어들여야지.

이안은 습관처럼 손끝으로 마차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동맹에 관해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그때.

“도련님,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드림이 초조함에서 온다고 여겼는지 맞은편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방장 한스였다.

한스는 허세를 부리듯 턱을 당겨 치켜세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가 슈튼하노버를 잘 구워삶아 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사히 끝나도록.”

“아.”

“아시지 않습니다. 저 한스 입니다. 뷔트시겐 사람들의 위장을 꽉 잡고 있는 총주방장. 요리 솜씨 하나로 사람을 홀리는.”

“맛이 끝내주긴 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이 잘 안 풀리면 제가 슈튼하노버의 주방장이라도 할 겁니다. 몇 달 장기 임무라 생각하고 눌러앉아 꼬셔야지요.”

“구미가 당기는 먹이로 야생 짐승을 살살 길들이는 것처럼?”

“하하. 대안이 없으면 그거라도 시도해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안 돼. 우리 유능한 주방장님은 뷔트시겐의 것이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도련님이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긴 하네요.”

한스가 요란스럽게 웃으며 몸을 들썩거렸다.

덕분에 머릿속이 환기되며 많은 것들이 더 명확해졌다.

동맹을 맺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레브였다.

루하흐의 직계인 레브.

이 녀석이라면 충분히 슈튼하노버 가주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루하흐 수장을 끌어내리려는 반군 무리에게 정통성을 부여해 줄 테니까.

트집 잡힐 수 없는 완벽한 명분을 쥐여주는 것이고.

‘그렇다 할지라도.’

동맹을 맺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우랴.

난데없이 레브를 들이밀며 ‘이놈이 전대 가주의 핏줄이요.’한다고 믿어줄까.

미친놈이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그래서 한스를 앞세운 것이다.

친분을 핑계로 밑장부터 깐 다음 말을 흘릴 심산으로.

레브의 출신에 관해서 말이다.

이안의 시선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제 옆에 있는 레브에게로 옮겨갔다.

녀석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각이 잡힌 모습이었다.

내내 숨겨오던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야 하는 것 때문인지 생각이 좀 많은 듯 보였다.

그렇게 곧은 표정을 하고 있는 녀석의 뒤.

얼굴에 푸른색 두건을 둘둘 감고 있는 노인, 데클렌이 서 있었다.

전대 가주의 수호검이었던 자.

본디 과거의 비극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가주의 뒤에 서 있을 자.

그래서일까.

얼굴이 안 보여 데클렌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확연히 와닿았다.

레브를 호위하고 있는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을.

천생 정령 기사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이안은 슬쩍 말문을 열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예정보다 빨리 정체를 드러내는 건데.”

“몇 년 더 안전하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

“이안 너한테 도움이 된다면, 지금 나서는 게 맞지.”

루하흐 가주를 끌어내리는 것.

이안에게는 치유의 독점이지만 저에게는 염원하던 복수를 하는 거였다.

“난 속도가 빠른 거 나쁘지 않아. 그건 복수를 빨리 끝내는 거기도 하니까.”

“그래, 우리 끝까지 잘 해보자.”

“응.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거니까.”

레브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흘렸을 때였다.

푸르르.

러니언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늦춰졌다.

* * *

“…….”

당황한 슈튼하노버 가주는 눈을 끔벅거렸다.

루비 소금 구매 건이래서 평소처럼 생각하고 손님을 맞이했는데…….

대체 이 행렬은 뭘까.

가주의 시선이 접견실을 그득 메운 행렬에 머물렀다.

어디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나.

소대 하나가 기척도 내지 않고 정렬한 채 기세를 뿜어냈다.

마치 새끼 새를 보호하려는 서슬 파람이 팽배하달까.

그들이 보호하려는 대상이야 당연히…….

가주는 소파 중앙으로 고개를 돌려 검은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이안 뷔트시겐.

루비 소금을 구매하는 일이 적자까지 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던가.

의문이 빼곡하게 들어찼지만, 그는 예를 잊지 않고 이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가 끝나자마자였다.

이안을 대신하듯이 한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슈튼하노버를 끌어안았다.

뭐든 본론 전에 밑밥과 기름칠은 중요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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