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잘 지냈나. 못 본새 신수가 더 훤해졌군.”
“훤해지긴. 요새 골치가 아파서 자고 일어나면 주름만 늘어 있으이.”
“대체 뭐가 내 친구 놈의 속을 이리 썩일꼬.”
“달리 뭐가 있겠나. 말 안 듣는 자식 놈 때문이지.”
“어이쿠, 에이프릴이.”
“기어이 나를 이겨 먹겠다고 장로들과 작당을 해선 사사건건. 쯔읏. 망할 것.”
말할수록 언짢아져 슈튼하노버 가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탓에 이마의 주름이 더욱 진하게 영글었다.
“그 아이 얘기는 그만함세. 말해봐야 부아만 치미니.”
“으휴. 자네도 적당히 하고 넘어가게. 그 예쁜 녀석이 뭘 얼마나 속을 썩인다고.”
한스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화의 빈틈이 생긴 사이.
하인들이 신속하게 이미 식어버린 차를 치우고 다시 다과를 내왔다.
정갈한 차림새가 입맛을 돋우었다.
특히 가운데 놓인 분홍색 비스킷은 유독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비스킷 색이 참.”
“크흠. 색만 고울까. 고소한 짠맛도 일품이지.”
“이게 다 루비 소금 덕이 아닌가. 그 특징이 그대로 비스킷에 녹았으니.”
“내가 봐도 소금을 넣었던 건 신의 한 수일세.”
많은 자금이 필요해서 머리를 쥐어짜다 발견해낸 방법이었다.
한데 이것이 통하면서 지금은 슈튼하노버 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없어서 못 팔 정도.
이렇게 인기 절정인 디저트가 앞에 있는데도 누구 하나 손대는 이가 없었다.
해서 권해보려던 차.
창백하고 긴 손이 비스킷을 집어 들었다.
슈튼하노버는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이안이었다.
호록.
비스킷을 우물거린 이안은 달달한 꿀차까지 한 모금 마셨다.
단짠의 조화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이안.
느릿하게 음미하는 그를 슈튼하노버는 관찰하듯 예의 주시했다.
루비 소금 건으로 와놓고 제 일이 아닌 양 세상 태평하다.
슈튼하노버는 이안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한스에게 말을 넘겼다.
“한스, 루비 소금 건은 핑계지?”
“핑계라니. 매달 이맘때 루비 소금을 사 가는 것은…….”
“내가 한스 자네를 한두 해 겪나.”
“크흠. 하여튼 눈치하곤. 이미 덜미를 잡은 사람에게 능청을 떨어 뭐할까.”
“평소처럼 단순한 구매 건으로 왔다면 도련님과 동행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슈튼하노버의 단정에 한스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말일세. 이게 좀 복잡하네.”
“무엇이?”
“자네에게 할 말이…… 아, 아닐세. 자세한 건 도련님께 듣는 것이 나을 성싶으이.”
한스의 말이 끝나자 대화의 흐름을 살피던 이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큰 소리가 나지 않는 고요한 동작일 뿐이었다.
한데도 그가 발하는 기색 때문인지 모두가 이목을 집중했다.
“피차 말이 길어 뭐하겠습니까. 초면이지만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얘기하겠습니다.”
“…….”
“실은 가주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게 말입니까?”
“예.”
“어이하여 일개 장사치에 불과한 제게……?”
“일개라니요. 품은 뜻이 황제 폐하 못지않게 큰 분인 것을 아는데.”
“불충한 말이군요.”
“옛 주군을 위한 마음이 어찌 불충이 되겠습니까.”
에두른 이안의 표현에도 슈튼하노버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미약하게 튀었다.
뭔가를 아는 듯한…… 아니, 아는 투였다.
루하흐 가주를 끌어내리려고 제가 세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무척 은밀하게 추진되어 발각된 적 없는 일을 뷔트시겐의 적자가 어찌 알까.
슈튼하노버의 눈빛이 뾰족해진 중에도 이안은 꿋꿋했다.
“경계심을 부추길 걸 알면서도 굳이 이 말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
“가주의 그 마음과 제 소개가 관련이 있어서 말입니다. 일단은…….”
이안은 레브 뒤편의 데클렌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건을 풀라는 신호에 데클렌은 턱 부분의 천을 손에 말아 쥐었다.
서서히 풀리는 두건.
뭔가 집중하게 되는 손길을 따라 점점 데클렌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에서 코로, 그리고 눈으로.
종내에는 데클렌의 얼굴 전체가 노출되었다.
“전대 수호…… 검?”
데클렌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슈튼하노버 가주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목소리에 당황과 의문이 그득했다.
전대 가주와 함께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살아있으니 그럴밖에.
“주군께서 급살하자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다가 자결했다고 들었는데…….”
“보다시피 살아있습니다.”
데클렌이 답했다.
“그렇다는 건 세간의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는.”
“예. 대부분이 날조된 것이지요.”
“날조.”
“본디 말이라는 것은 살아서 권력을 쥔 자가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혹 주군의 죽음에 관한 것까지 그자의 입김이…….”
“생각하신 바대로입니다.”
“허.”
데클렌의 말이 길어질수록 슈튼하노버 가주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주군의 죽음이 급살이 아니다?
연거푸 되뇌는 음색만큼 동공 또한 파르르 떨려왔다.
이전의 노련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가주의 속내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데도 데클렌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말을 덧댔다.
“그자가 그것들만 거짓으로 꾸몄겠습니까.”
“하면 뭔가가 더 있다는 말씀입니까.”
딱딱한 질문에 데클렌이 보라는 듯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동작을 가주는 자연스레 따라갔다.
어찌하여 수호검이 어린 루하흐에게 예를?
가주의 얼굴에 깃든 물음표가 가시기도 전.
“주군을 지키지 못한 불충을 죽음으로 씻고 싶었으나…….”
데클렌이 답을 주듯 대꾸했다.
“지켜야 할 게 남아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켜야 할 것?”
“주군의 핏줄이자 루하흐 일족의 온당한 후계자를 말입니다.”
“……?!”
놀람…… 아니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슈튼하노버 가주를 스쳐 갔다.
‘전대 가주가 급살 맞았을 때 그의 가족도 전부 죽었다.’ 그게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여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럼 저 어린 루하흐…… 아니, 저분이 설마?”
“시온 루하흐, 주군의 막내 아드님이십니다.”
“어억! 지, 진정 주군의 핏줄이 사, 살아있다는…….”
급기야 슈튼하노버는 말까지 더듬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황이 없는 중에도 데클렌의 말을 섣불리 다 믿지는 않았다.
데클렌은 주군이 죽은 이후로 줄곧 행방이 묘연했던 자였다.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알 도리도 없고.
생각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혹 데클렌이 현재의 루하흐 가주에게 붙은 거라면?
하여 뷔트시겐마저 속였다면.
반평생을 반군으로 살며 눈칫밥을 먹었기 때문일까.
끊임없이 의혹만 더해져 갔다.
그런 슈튼하노버의 의식을 붙잡듯 이안이 말을 건네왔다.
“데클렌은 전대 루하흐 가주의 참변 이후 지금껏 뷔트시겐에서 지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최근에 나를 통해 레브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최근에.”
“그대의 머리가 많이 복잡한 듯하여 건네는 말입니다.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조금 보태보자면 두 사람의 신원은 내가 보증하겠습니다.”
수호검은 그렇다 쳐도 루하흐 소년까지.
슈튼하노버는 이안을 빤히 보며 심중을 읽으려 했다.
굳이 뷔트시겐에서 나서서 신원을 보증해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얻을 이득이 없는데 무엇하러.
한데도 이리 확신에 찬 태도를 고수하는 것을 보면 정말인가 싶기도 했다.
‘후우. 이도 저도 다 어렵군.’
떨어지는 낙엽처럼 슈튼하노버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의 심중을 한쪽으로 끌어당기려는 듯.
“내가 보증하지. 그분이 루하흐의 온당한 핏줄임을.”
누군가가 갑작스레 난입해서는 자신감 있게 내뱉었다.
접견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나는 쪽으로 쏠렸다.
입구에서 걸어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
제3자면서 보증이니 뭐니를 입에 담고 있는 중년인.
상대를 확인한 즉시 이안과 레브는 눈을 홉떴다.
“……연꽃 문양?”
남자의 동공에 자색 연꽃 문양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 * *
이안은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직시했다.
루하흐 가주뿐 아니라 살리카 가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다 엘프.
모순되게도 저 남자로 인해 레브의 신원은 단박에 보증되었다.
본래라면 가주를 납득시키기까지 시일이 걸렸을 터인데.
어쩐 일인지 남자와 몇 마디 나눈 가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접견실을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며 한스까지 전부 데리고선.
<일단 알겠습니다. 한데 저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통을 드리겠습니다.>
가주가 떠난 뒤 접견실에 남은 사람은 넷이었다.
이안, 레브, 데클렌, 그리고 남자.
적막감이 감도는 공간에서 이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긴히 할 얘기라는 게 무엇입니까.”
“어째 뷔트시겐 도련님의 말투가 상당히 뾰족한 것 같습니다.”
“믿을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 아직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계는 당연한 것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루하흐 가주와 루하흐 가주에게 적대하는 슈튼하노버 가주, 두 세력을 오가는 자라면 특히나 더.”
“오. 도련님께서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아는 게 좀 많습니다. 경험을 두 번씩 하다 보니.”
“흠. 노련한 도련님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풀려면 우선 제 소개부터 다시 해야겠군요.”
남자, 아니 바다 엘프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제 얼굴을 왼쪽 귓바퀴에서 오른쪽까지 쓸어 올렸다.
그 즉시였다.
바다 엘프의 외양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다 순식간에 변형되었다.
평범한 중년 남자에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젊은 남자로.
“……!!”
소개한다 해놓고 다짜고짜 외형 변환이라니.
두 사람은 남자의 돌발행동에 당황했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상대를 바라볼 뿐.
이에 바다 엘프가 제 얼굴을 재차 쓸며 웃음기 어린 말투를 이었다.
“소개함에 있어서 기본은 진정성이겠지요.”
“하면 지금의 모습이 그대의 본 모습이라는 말입니까.”
“그러합니다.”
바다 엘프가 긍정했지만 이안은 의심과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살리카 쪽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자를 어찌 곧장 신뢰할까.
그런 멍청이가 될 순 없었다.
이안의 속내를 간파한 모양인지 바다 엘프가 옅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고고한 에드레이 나일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니는 위리도의 바다 엘프이며 수장의 대리인인 나라토르라고 합니다.”
“바다 엘프에게 있어 이름을 밝힌다는 건 목숨을 내어준다는 의미. 신뢰를 보여주겠다는 그 뜻은 알겠으나.”
이안은 부러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 붙였다.
“어찌하여 수장의 대리인이 그런 행보를 했는지 묻고 싶군요.”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위리도의 바다 엘프만의 사정이.”
바다 엘프의 시선이 레브에게로 옮겨갔다.
그러자마자 빙글빙글 도는 연꽃 문양이 유난하게 빛무리를 일으켰다.
어쩐지 유독 집요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으니까요.”
“그게 누구인지 이번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바다 엘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이안의 눈길 또한 맞닿았다.
줄곧 레브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동공을 보니 빤했다.
그가 찾으려는 이가 누구인지.
이안의 짐작에 쐐기를 박겠다는 듯 바다 엘프가 입을 열었다.
“시온 루하흐, 쉬르케르의 맹약을 이어갈 자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