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쉬르케르의 맹약.
바다 엘프와 루하흐 일족 사이에 맺은 신의의 결속이다.
정확하게는 바다 엘프의 수장이 인정한 직계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맹약이다.
“쉬르케르의 맹약?”
이안이 되묻자 바다 엘프가 제 눈가를 쓸었다.
“혹 이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루하흐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간다는 말을.”
“루하흐의 근간을 이루는 말이지요.”
“예. 실제로 루하흐는 에드레이 나일에서 태어나고, 죽으면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말 그대로 계속 돌고 도는 것이지요.”
그저 의미 없이 순환만 하는 것일까.
에드레이 나일에 녹아들어 그것을 정화하고 정령계와 비슷한 환경으로 만든다.
곧 바다 엘프들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재생시켜 주는 것.
그것의 인과로 루하흐는 그들의 능력을 이어받아 치유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난다.“이 순환을 돕는 것이 쉬르케르의 맹약이지요.”
바다 엘프의 시선이 주의 깊게 듣고 있는 레브에게로 향했다.
사실 맹약에 관한 건 가주와 그의 후계자만이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막내였던 레브가 이 사실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내 일족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루하흐 옆이건 살리카 옆이건 상관없었지요.”
전대 가주가 죽고 맹약의 온당한 핏줄인 레브를 찾기 위해 제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내리 3년을 굴렀지만, 도무지 그의 행방이 잡히지 않았다.
해서 결국 방랑을 관두고 한 곳에 눌러앉았다.
그나마 레브를 찾을 확률이 높은 곳에 말이다.
루하흐 가주 쪽은 원수이니 살아있다면 언젠가 찾아올 거라 믿어 측근이 되었고.
가주의 동맹인 살리카의 경우는 정보력이 뛰어나니 이용하려고 붙어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염두에 둔 수였다.
이들이 먼저 레브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중간에서 가로채야 하니까.
그리고 두 가주 쪽과는 완전하게 방향이 다른 슈튼하노버의 경우.
훗날 레브의 지지 기반이 될 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친분을 쌓았다.
세가 있어야 현 루하흐 가주와 부딪혔을 때 승산이 있기에.
한참 얘기를 듣던 이안은 내내 걸리던 의문을 끄집어냈다.
“한데 그대의 행보는 마치 레브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채 이루어진 것 같군요.”
“아. 맹약의 온당한 핏줄에 한해 생사 여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알 수 있다?”
“예. 이 연꽃 문양으로 말이지요.”
바다 엘프가 자신의 동공을 가리켰다.
여전하게 자색 연꽃 문양이 팽글팽글 돌고 있었다.
“이는 집행자만이 가지는 표식입니다. 맹약자의 핏줄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아, 그 때문에 레브를…….”
이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이내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눈썹머리를 내렸다.
“한데 또 다른 의문이 드는군요. 굳이 녀석을 찾지 않더라도 맹약은 현 가주를 통해 이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자는 온당한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닙니다. 저희 수장님의 낙인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맹약의 낙인은 가주에서 가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가주의 핏줄이 살아있는 한 절대로 다른 이가 얻을 수 없다.
하여 레브를 찾아 맹약을 이으려던 것이었다.
“얼추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되었습니다.”
바다 엘프는 길었던 호흡을 정리할 심산인지 찬 숨을 내쉬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날숨.
거기에는 레브를 찾았다는 안도와 의무를 이행했다는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안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간의 틈을 둔 후 그는 여태까지와는 결이 다른 궁금증을 들이밀었다.
“한데 바다 엘프는 뭐가 그리 바빠서 연락 자체가 안 되는 겁니까.”
“아, 그게…….”
웬일로 즉답이 나오지 않았다.
쉬이 말문이 열리지 않자 이안은 고요히 기다렸다.
어차피 재촉해봐야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는 얘기를 잇지 않을 터.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으나 실은 반년 전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하여 그 준비로 지금 에드레이 나일이 꽤나 정신이 없습니다. 그 탓에 외부의 연락도 일절 받지 않고 있고.”
“아.”
생각해보니 이맘때쯤이었다.
바다 엘프가 바닷길을 닫고 저 심해로 들어가 동면에 든 것이.
그러고는 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절 뭍으로 나오지 않았다.
인간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내 사정 아니라는 듯이.
‘그 연유가 신탁 때문이었을 줄은.’
반년 전, 신탁, 동면…….
이안은 조용히 이것들을 읊조려 보았다.
하나하나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실로 유기적이었다.
왜냐하면.
동면에 들지 않은 저들이 레브를 찾아내고, 결국 레브로 인해 살리카 가주의 편에 선다?
8년을 끌었던 전쟁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끝났을 것이다.
바다 엘프가 지닌 힘은 그런 것이었다.
‘설마 이 또한…… 안배인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래서일까.
그간 묻어놨던 케케묵은 의문이 거스러미처럼 일어나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안배를 누가 한 것인지.
* * *
바다 엘프와 조우한 다음 날.
이안은 정원에 서서 습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숨마다 낯바닥이 쓸릴 만큼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겼다.
과연 바다 엘프가 기거하는 곳다운 정취였다.
기묘해서 잠시 관망하고 있는데, 마침 레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뭐해?”
“아, 그냥. 감상 중.”
“뷔트시겐이랑 습한 정도가 많이 다르지?”
“응. 내내 바람이 꾸물거리네.”
저택에서 눈을 뗀 이안은 곁에 있는 레브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바람막이용 얇은 코트의 매무새를 매만지고 있었다.
여름의 초입이라도 말이 여름이지 이제 막 겨울이 가신 때였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서 코트를 필히 걸쳐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였다.
칼브란의 극성을 오랫동안 봐온 한스가 저에겐 코트를 두 개나 걸쳐놓았다.
그의 등급이 아무리 올라가도 유리 몸 취급은 여전했다.
다소 부해진 상태로 이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벌써 나온 걸 보니 준비가 다 끝났나 봐?”
“챙길 게 뭐 있나. 몸만 가면 되는 건데.”
“슈튼하노버 가주를 만나러 왔다가 에드레이 나일에 초대될 줄은.”
“그러게. 어쩌다 바다 엘프의 수장까지 만나게 됐네.”
본디 바다 엘프의 영역은 인간의 출입을 철저히 금한다.
다만 수장의 허락이 있을 시엔 그 영역을 드나들 수 있다.
이번처럼.
“맹약, 잘 마무리 짓고 와.”
“응. 이왕 수장을 만나러 간 김에 바다 엘다 나무의 수액 건도 제대로 협상해 볼게.”
“이 형님은 레브 너만 믿는다.”
“독점권 꼭 따올 거니까 잔칫상이나 준비하고 있으셔.”
“언제든.”
“어째 한번 길이 뚫리니까 다른 것도 술술 풀리는 것 같다.”
슈튼하노버와의 연결 고리도 생겼겠다, 바다 엘프와의 접점도 만들어졌겠다.
이제 남은 건 제 숙원을 푸는 일뿐이었다.
숙부.
레브는 잠깐 튀어 오른 얼굴을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았다.
한 걸음씩 떼다 보면 그리 오래지 않아 만나게 될 테니까.
머리통을 저은 레브는 이맛살을 살살 펴며 이안을 응시했다.
“너는 수도로 갈 거지?”
“그래야지. 아이루스 상단주를 만나서 매듭지을 게 있으니까.”
“그럼 이만 찢어지자. 수액 건은 협상이 끝나면 바로 연락할게.”
“그래. 몸조심하고.”
“이안 너도.”
담백한 인사 뒤에 이안과 레브는 헤어졌다.
바다 엘프의 영역인 에드레이 나일로 가야 하는 레브는 배를 탔다.
그리고 수도로 향해야 하는 이안은 마차에 올랐다.
워프 게이트를 타려면 슈튼하노버 영지의 중심부로 가야 하기 때문.
이안을 태운 마차는 번갯불처럼 힘차게 나아갔다.
* * *
히에로스 제국의 수도 라에라트.
수도에 도착한 이안은 한눈팔지 않고 곧장 아이루스 상단으로 향했다.
본점 입구에 들어선 즉시, 상단주의 환한 표정이 먼저 그를 반겼다.
어젯밤 급히 보낸 연락에도 미간에 찌푸림 하나 없다.
이런 일은 늘 있어왔다는 것처럼.
도리어 왜 이리 연락이 뜸했냐며 섭섭함을 드러낼 뿐이었다.
“아이고, 도련님.”
“잘 지냈나?”
“장시치의 하루가 뭐 별거 있겠습니까. 돈만 잘 흐르면 무사안일인 것을요.”
“세상은 그대처럼 살아야 하는데.”
“하하핫. 뷔트시겐 가 도련님께서 저 같은 장사치를 부러워하시는 겁니까? 이거 콧대가 으쓱거립니다.”
상단주는 넉살을 떨어댔다.
기분 좋은 넉살이 걸음걸음마다 고스란히 찍혀 나왔다.
그렇게 여유로이 당도한 곳.
상단주가 기거하는 사택의 응접실이었다.
이안을 손님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친우로서 맞이하겠다는 상단주의 뜻이 엿보였다.
그 마음 씀씀이를 어찌 모르랴.
해서 이안은 분위기에 맞춰 가벼이 농담을 던졌다.
“이거, 이거, 선수 치는 건가?”
“선수요?”
“오늘부터 내가 그대를 부려먹을 걸 알고. 미리 적당히 하라 밑장을 까는 거 같은데.”
“이런. 들켜버렸습니다. 뇌물인 것을.”
“뇌물이라도 이런 뇌물이면 언제든 환영일세.”
이안은 싱긋 웃어 보였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입가에서 제법 청년티가 났다.
그 모양새를 빤히 보던 상단주는 능글맞게 입을 뗐다.
“이번엔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제게 그런 웃음을 흘리십니까.”
“자네 상단을 빌려주게.”
“상단을요?”
“아, 어감이 이상했는데 풀어보자면 아이루스의 이름으로 바다 엘다 나무의 수액을 전부 사들여달란 말일세.”
“전부 말입니까?”
“내 개인 자금의 여력이 닿는 한에서는 모조리.”
“대체 그 정도 양을 어디다 쓰시려고…… 허허. 전쟁이라도 치르시려는 겁니까?”
“전쟁은 지금도 치르고 있지.”
“……예?”
뜬금없는 이안의 말에 상단주는 눈을 끔벅거렸다.
앞뒤가 없는 소리라서 멍하길 잠깐.
이내 상단주는 이안의 엉뚱함을 매끄럽게 넘기는 쪽을 택했다.
그간 이안이 보였던 행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여태껏 아침 이슬의 수익을 차곡차곡 모으기만 하셔서 돈 쌓이는 재미에 푹 빠지셨구나 했더니. 이렇게 쓰실 줄은.”
상단주가 무던하게 중얼거리는 사이.
“아.”
뭔가 할 얘기가 남았다는 듯 이안이 상단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법 거래를 제시하는 것처럼 은밀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더 있는데 말일세.”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도련님이 명하는 거라면 뭔들.”
“소문 좀 내주게.”
“어떤?”
“그러니까 전대 루하흐 가주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과 가주의 죽음이…….”
이안은 내야 하는 소문이 무엇인지 상단주에게 조목조목 일러주었다.
한꺼번에 풀지 않고 슬슬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도.
그의 지시에 상단주는 맹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란 표정을 짓기도 하고, 욕도 하고, 온갖 추임새를 넣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용건을 다 털어낸 후.
이안은 홍차로 마른 목을 축이며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순, 시야각의 끝머리에 누군가가 맺혀 들었다.
“……저 아이.”
정원을 뛰어다니는 아이가 낯익었다.
무엇보다 이마 위에 난 장미 꽃잎 세 개가 그랬다.
‘포자 심기로 인해 생긴 표식.’
낱장의 꽃잎들은 몇 달 전 동굴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군.”
“이게 다 도련님과 도련님의 친우 덕분입니다.”
“그때 이후로 별달리 아픈 곳은 없고?”
“그날 이후 남들보다 더 튼튼해져서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닌답니다.”
“다행이군.”
“너무 건강해서 탈입니다. 뛰어놀 생각만 해서.”
상단주의 푸념에는 애정이 그득 담겨 있었다.
그도, 아이도 죽을 뻔하다 살아났는데 무엇이 중요하랴.
아이가 말을 하고 웃고 그를 향해 뛰어오는 지금이 소중하지.
타다닷.
여자아이가 노란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테라스 쪽으로 달려왔다.
“딜라일라.”
그를 보곤 상단주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언제든 안아주겠다는 양 한껏 넓혀진 품.
그 품이 아이의 체구에 맞게 오므려지던 순간.
“도련님.”
상단주의 옆구리를 통과한 아이가 이안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러고는 이안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소원이 있어여.”
“소원?”
“제가 나중에 이만큼 크면 결혼하게 해주세요.”
“결혼은 언제든 네가 원하면 할 수 있는 거란다. 내 허락이 없이도.”
이안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지 아이가 양발을 들었다가 내렸다.
“허락이 없이도?”
“응.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헤헤. 좋아하는 사람 도련님인데?”
아이는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 못 한 상황에 이안은 당황해서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는 게 이안 뿐이었을까.
쿠당당.
급작스러운 딸의 고백에 상단주는 뒤로 풀썩 넘어가 버렸다.
세상을 잃은 표정이 가히 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