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88화 (188/214)

제188화

[꺼억. 꺼억. 꺽.]

아이루스 상단을 나와 상업 거리로 향하는 내내였다.

통곡에 가까운 웃음이 이안의 귓전을 때렸다.

배를 칠 때 나는 둥둥거림은 덤이었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녹스가 주절거렸다.

[상단주 표정 봤누? 나라를 잃어도 열 번은 잃은 것 같은 표정이더구나.]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지.”

[딸 가진 아빠들이 다 그렇다. 세상 모든 남자가 전부 적이지.]

상단주 때문에 깔깔댈 땐 언제고 녹스가 그 맘을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 다 산 노인처럼 그러다가, 녀석이 돌연 모가지를 홱 돌려 그를 훑었다.

[넌 죽었다 깨나도 모를 심오한 감정의 세계지. 30년 넘게 연애 고자인 네놈은 모를.]

“호. 알려면 결혼부터 해야 하나.”

[결혼은 아무나 하니? 황녀의 청혼도 까고, 꼬마애의 청혼도 까고,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녹스의 야무진 면박에 이안은 실없이 웃음을 빼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으니까.

공연히 웃음만 흘리다 이안은 코트 주머니에 차가운 손을 넣었다.

바스락거리며 손끝에 걸리는 감촉.

이거…….

빳빳한 종이를 꺼낸 이안은 밀랍에 찍힌 인장을 빤히 보았다.

낯익은 인장은 황실의 것이었다.

<하연제가 열리는 내일, 황궁으로 오게.>

서신에는 황제가 친필로 휘갈긴 명령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하연제.

황족끼리 모여 여름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례이다.

말하자면 가족연회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인이 끼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 낄 수 없는 자리.

이런 의례에 이안을 부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녹스가 이안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목청을 높였다.

[이안 뷔트시겐은 황제인 내가 침 발랐으니 넘볼 생각하지 마, 라고 표명하는 게지.]

“뭘 침까지.”

[얘가 또 모르쇠 작전이네. 얼마 전 수료식이 끝난 날 생각 안 나누?]

“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황제가 너한테 보낸 것들이, 어후.]

“선물이 조금 과하긴 했지.”

[과했지. 완전 혼수였으니, 혼수. 딱 신접살림이었다. 그 자리에 5황녀만 있었으면 바로 식장행이어도 무방할 정도였지.]

“어허.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였다.

누군가가 그의 말꼬리를 낚아채듯 잡아 물었다.

“이안 뷔트시겐 그대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어요?”

* * *

“5황녀님.”

힘 있는 목소리에 이안은 즉각 뒤돌아섰다.

저만치서 5황녀가 승마 바지 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도네.’

그녀는 편하다는 이유로 승마 바지를 주로 입는다.

특히나 대외활동을 할 때는 드레스 대신 바지를 고수했다.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기, 빈민들을 위한 치료소에서 봉사하기, 부랑자를 위한 음식 나눠주기 등등.

제국민을 위한 일에는 늘 같은 복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승마 바지는 어느 순간부터 5황녀의 상징이 되었다.

상징은 곧 유행을 만들었다.

그녀처럼 승마 바지만 입는 무리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제국민들 사이에서 5황녀가 그만큼 인기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죽하면 그녀가 먹고, 마시고, 걸치는 모든 것들이 유행할까.

아마 인기로 치자면 황제보다 더 우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안은 승마 바지에서 시작된 생각의 줄기를 끊고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는데 더 멋져지신 것 같습니다.”

“멋져졌다? 참 태평하게 대꾸하는군요.”

어쩐지 5황녀의 콧등에 심통이 자잘하게 걸려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걸까.

영문을 알 길 없는 이안은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였다.

꺾인 고개만큼이나 5황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간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치고는 말입니다.”

아하.

5황녀가 성난 고슴도치 모양새였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늘 추앙을 받는다.

남자와 여자, 성별과 무관하게.

그녀의 눈길 한 번 받아보려고 애걸하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는 말이다.

이런 실정에 5황녀가 관심을 표명했던 저는 어땠던가?

죽었나 싶게 연락 한 번 먼저 하지 않았다.

뷔트시겐에 직접 왕림까지 해서 얼굴을 비췄던 5황녀의 성의가 무색하게.

어찌 보면 자존심이 상할 만했다.

아차 싶어 이안은 눈꼬리를 둥글게 접었다.

“그래서 이번엔 제가 먼저 뵙자고 청하지 않았습니까.”

“흥. 이번엔 어떤 번드르르한 말발로 나를 후려치려고 연락을 한 건지.”

“후려치긴요. 그저 황녀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 뵈려고…….”

“됐어요.”

입을 삐죽 내민 5황녀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사탕발림은 됐다는 거였다.

“보아하니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귀한 얼굴을 비친 것 같은데, 그 말은 잠시 넣어두세요. 그 말을 듣기 전에 할 얘기가 있으니까.”

“5황녀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경청하겠습니다.”

“실은 많은 고민을 했어요. 내가 이 말을 또 꺼내야 하는 건지에 대해. 하지만 결론은 매번 똑같더군요.”

“…….”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번 청하려고 합니다.”

5황녀는 이안의 짙은 동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홍채에 오색 빛살이 너울거리는 것 같았다.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이죠. 솔직히 난 그리 생각해요. 뷔트시겐이라면 정략혼, 나쁘지 않다고.”

“2황자님을 위해서 말입니까.”

“예.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겁니다.”

“…….”

“그게 설령 나를 찬 그대에게 매달려야 하는 일일지라도.”

“흠.”

이안은 지그시 5황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모를 테고, 예상하지도 못하겠지만 사실 그녀에게 호감도가 꽤 높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존경의 의미로 말이다.

지난 생에서 5황녀가 걸어간 길들이 절로 그런 마음을 품도록 만들었다.

전장을 누비는 은빛 독수리.

‘그녀의 별칭이었지.’

5황녀는 2황자가 죽고 황제마저 죽으며 급격히 쇠락한 황가를 이끌었다.

남은 황실의 일원과 황가에 충성하는 자들을 규합해 살리카에게 대항한 것.

이렇게 결성된 저항군은 이내 살리카 가주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황가의 핏줄이 살아 이 사이에 낀 이물질처럼 갈근거렸으니 오죽할까.

걸핏하면 가주의 신경줄을 긁었지만…… 질긴 저항은 전쟁 중반 결착이 난다.

5황녀가 생포된 것이다.

‘그 당시 살리카는 5황녀를 공개 처형해 본보기로 삼으려 했지.’

처음에는 그랬다.

황실의 상징이 된 5황녀를 짓밟으면 잔존 무리의 의지가 박살 날 테니까.

그를 위해 제국민 모두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처형장이 마련되었다.

그에게 대항하면 이리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하지만 돌연 가주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가 황위를 거머쥐었을 때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5황녀와의 결혼.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 후반이었고, 살리카는 오십을 넘은 나이였다.

둘의 결합이 기막힌 게 나이 차뿐이랴.

살리카가 황가에 저지른 만행이 태산을 이루는데.

세간에서는 그 때문에 별별 말들이 떠돌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공개 결혼식 당일.

본디 처형대였던 높은 단상에 서서 5황녀는 붉은 머리카락들을 훑었다.

좌중을 보는 그녀의 눈빛엔 조롱조롱 환한 미소가 매달렸다.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인 양 그러더니.

빠각.

5황녀는 자신의 왼쪽 팔꿈치를 있는 힘껏 꺾어 부러트렸다.

살리카들이 말릴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무자비하게 꺾인 팔을 그대로 몸에서 뜯어냈다.

시리도록 형형한 그녀의 기백.

5황녀는 살점이 너덜거리는 뼈로 망설임 없이 제 심장을 찔렀다.

한 번, 두 번 연이어 계속…… 심장이 갈가리 찢겨 재생되지 않을 때까지.

푸아아악.

뼈마디를 타고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새하얗던 단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5황녀는 핏발선 눈을 부릅뜬 채 피어보지 못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육신은 식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긍지는 잔존하는 황가 무리의 등불이 되었다.

전쟁 후반까지도 살아 살리카를 괴롭혔던 그들.

그들은 어느 날부턴가 황가의 문양인 독수리 대신 황녀의 모습을 새긴 깃발을 들고 다녔다.

그녀가 곧 황실이며 그들을 상징하는 독수리였으니까.

이안은 처절했던 과거를 더듬다가 찬찬히 입을 뗐다.

“왜 꽃이 되려 하십니까, 황녀님.”

“……꽃이요?”

“굳이 정략혼이 아니더라도 황녀님께서는 충분히 2황자님을 도우실 수 있지 않습니까. 황녀님의 존재 자체로.”

5황녀는 꽃이 아니라 독수리일 수밖에 없다.

지난 생이 그를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저항군을 이끌었던 건 단순히 직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기질 자체가 그랬던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5황녀라는 위치상 억눌러져 있는 것이지.

“저는 5황녀님께서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독수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내기 퍽퍽한 시절이었지만 5황녀는 자유로워 보였다.

적어도 이안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독수리가 날개를 접고 참새인 척한다고 진짜 참새는 될 수 없는 거니까요.”

“참새…….”

“이번에 뵙자 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참새인 척하는 독수리에게 확실한 답을 줘야 할 것 같아 말입니다.”

“하아. 거절을 정말…… 우아하게 하네요.”

“제가 좀 그렇습니다.”

“기분 나쁘지 않은 거절에 화를 낼 수도 없고 정말이지…….”

“이것만은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략혼의 형태가 아니라도 뷔트시겐은 언제나 황녀님을 지지할 거라는 것을.”

“하.”

5황녀가 얄밉다는 듯이 이안을 흘겼다.

전혀 뾰족하지 않은 시선이었다.

이에 이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내보였다.

치열까지 드러낸 소년의 웃음에 결국 5황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매달렸는데 또 차일 줄은.”

“5황녀님은 충분히 매력적이십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사탕발림은 됐습니다.”

“하하핫.”

“그나저나 할아버님께 어떻게 설명하나. 할아버님의 가장 귀애하는 손녀가 또, 차였다고.”

“저를 파십시오. 생긴 것만 멀쩡하지 구제 불능이었다고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흥. 그걸 누가 믿는다고.”

5황녀가 샐쭉거리자 이안이 뜬금없게도 막대 사탕을 내밀었다.

먹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질 거라는 손짓을 담아서.

“저는 황녀님과 좋은 벗이 되고 싶습니다. 이 사탕처럼.”

“벗…….”

“받아주시겠습니까.”

“흐응. 내가 밑지는 장사 같지만 그게 더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으니 나쁘지는 않네요.”

5황녀의 새침함에 이안은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아, 친구 된 기념으로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이안 뷔트시겐.”

“예?”

“벗으로서 충고하는데 그런 눈웃음은 적당히 지어야 오해가 없을 겁니다.”

“……아.”

이안의 입에서 맹한 소리가 튀어나오자 5황녀가 크게 소리를 내 웃었다.

그의 덤덤한 능글거림을 제가 흔든 게 맘에 든다는 웃음이었다.

목청까지 보이는 그녀의 꾸밈없음을 이안은 오래도록 보았다.

과거의 인물들은 과거로 남지 않고 이토록 생생했다.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살아내고 있으므로.

이제 이안이 지키고 싶은 것은 단순하게 뷔트시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칼브란이, 알란이, 레브와 올리브가, 그리고 5황녀가, 제가 아는 모든 이가 걸어보지 못한 앞날을 지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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