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이안은 5황녀와 헤어지고 이동진 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는 언제나 그렇듯 온갖 사람들과 이종족들로 북적거렸다.
발 디딜 틈 없는 곳.
다소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이안은 출입구 쪽을 보았다.
시선을 고정한 그의 볼을 꾹꾹 누르며 녹스가 올망졸망하게 물었다.
[이제 발리올로 갈 거지?]
―내일부터 파종제니까.
[드디어 파종제구나. 대지의 가시를 얻을 수 있는.]
가시를 얻을 수 있는 축제 중 제일 먼저 열리는 것이 파종제이다.
무려 일주일간 성대히 열리며 밤낮이 따로 없는 축제.
[어찌 이리 시기가 딱 들어맞는지. 가주 회합이 일주일 남았는데 그사이에 아주 이쁘게 자리했구나.]
―다행이지 뭐. 조금이라도 쓸만한 걸 얻어 적진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똥개도 제 영역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물며 살리카 가주였다.
그냥 똥개도 아닌 미친개.
그 미친개의 본진에 제 발로 가는 거라 조금이라도 대비를 해둬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한참 그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안, 이안!”
제1 출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그를 격하게 부르짖었다.
올리브였다.
한달음에 쪼르르 달려온 올리브는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약속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왔네.”
“아, 볼 일이 빨리 끝나서.”
이안은 쪼그려 있던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세웠다.
올리브의 낯빛에 아로새겨진 아쉬움을 보았기 때문.
당분간 뷔트시겐을 떠나 있을 예정이라 그럴 것이다.
녀석의 속내가 훤히 보여서 이안은 그 어깨를 스치듯 두드렸다.
“애들이랑은.”
“말도 마라. 내가 발리올로 유학 간다니까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어찌나 매달리던지.”
“녀석들이?”
“캬캬캬. 설마 그것들이 진짜 그랬겠냐? 나 간다니까 좋다고 잔칫상을 벌이더라.”
“잔칫상도 받고 출세했네.”
“그거 차려놓고 걔들이 뭐라 한 줄 아냐? 유학 기간 1년이 끝났는데 하루라도 늦게 온다? 그럼 이곳에 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더라. 그러기 싫으면 빡세게 배우라던데.”
아이들도 서운하긴 매한가지였던 모양이다.
빨리 돌아오라는 속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을 보면.
아이들 생각에 잠시 시들해진 올리브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답지 않게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성격상 울적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 기분을 정리한 올리브가 뭔가를 이안에게 내밀었다.
“아, 맞다. 나 서신 가져왔는데.”
“서신?”
“일종의…… 연애편지라고 해야 하나?”
혹 에이프릴에게서 온 것을 올리브가 가져온 걸까.
그렇지 않아도 서신이 안 온 지 근 2주째라 궁금하던 참이었다.
어서 봐 보라는 올리브의 재촉에 이안은 눈길을 서신으로 돌렸다.
‘에루리안에게’라고 쓰인 얇은 서신.
고개를 갸웃한 이안은 봉투를 뒤집어 수신인을 확인했다.
……니콜라스?
이 녀석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이안은 호기심이 일어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아니지, 읽었다는 건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
달랑 한 줄 뿐이었으니까.
《야, 에루리안. 그동안 미안했다. 그리고…… 고맙다.》
참 깔끔한 서신이었다.
2장로를 닮아 단순하고 뒤끝이 없는 성격답게.
정말 니콜라스다운 사과였다.
이안이 픽 웃자 올리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니콜라스 귀엽지 않냐?”
“얘가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동생 같은 면이 있지.”
“예전에는 보고만 있어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미움도, 앙금도 없는 담백한 감정선.
그런 올리브를 들여다보던 이안은 서신을 살살 흔들었다.
“보아하니 눈 마주치고 말하면 뻘쭘하니까 일단 시찰단으로 토낀 다음 보냈네.”
“그런 것 같지?”
이안과 올리브는 동시에 폭소를 터트렸다.
니콜라스의 행동들이 손바닥의 손금처럼 빤해서 절로 그리되었다.
웃음을 길게 매단 두 사람이 사무소 안으로 들어간 후.
사무소 입구 쪽에 숨어 오감을 세우고 있던 그림자들이 은밀히 어딘가로 향했다.
* * *
“루하흐라.”
살리카 가주는 부복한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안의 행보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보고하는 자.
그림자는 이안이 음식을 씹으며 턱관절을 움직인 횟수까지 보고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뷔트시겐 것들에게 꼬리가 밟히며 출혈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림자들이 보낸 보고에 의한바.
이안은 루하흐에서 수도로, 그리고 발리올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데…….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동선이었다.
수액을 얻으려고 쏘다니던 발길이 어찌하여 발리올로 향하는 것일까.
어떤 연관이 있길래.
이것저것 짜 맞춰봐도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살리카의 짙은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했다.
굉장히 거슬렸다.
제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의 머릿속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흐음.”
주군이 내비치는 불편한 기색을 살피던 수호검.
틈을 엿보다가 그녀는 조심스레 가주에게 말을 붙였다.
“저어, 가주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까닥.
살리카의 손이 꿈틀댔나 싶게 움직였다.
말하라는 신호라서 그녀는 덤덤히 보고를 시작했다.
“일전에 클로에 님이 연구소를 습격해 실험체를 빼돌린 일 말입니다.”
“수하라는 것이 무능하고 쓸모없다는 걸 확인시킨 일 말인가.”
“죄송합니다.”
“할 말은.”
“클로에 님이 실험체를 데리고 수도로 가서 스톨레 바르푸니라는 자를 만났습니다.”
“바르푸니? 협회장의 수제자였던 자군.”
“예. 그자를 만난 직후 클로에 님만 뷔트시겐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렇다는 건 바르푸니에게 실험체를 맡겼다는 뜻이겠지.”
“예. 저희도 그리 예상해 그자를 쫓았으나, 바르푸니가 추적을 눈치채는 바람에 그만 실험체를 놓치고…….”
“해서. 이번 역시도 그 무능을 내게 자랑하는 것인가.”
“……면목 없습니다.”
수호검은 일체의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성정을 알기에 어떤 군더더기도 덧붙이지 않았다.
실패를 교훈 삼아 앞으로 잘하겠다는 능청이나 융통성도 부리지 않았다.
고지식한 수호검에게 시선을 둔 살리카가 질문을 던졌다.
고저가 없는 말투에는 은근한 떠봄이 녹아 있었다.
“현재 실험체가 어디에 있을 것 같나.”
“아마도 발리올 아니면 뷔트시겐일 것 같습니다.”
“둘 중 가능성이 많은 곳은?”
“클로에 님의 성정상 아무래도 뷔트시겐 일 것 같습니다. 바르푸니를 이용한 건 저희에게 혼선을 주기 위한 것이겠지요.”
바르푸니가 개입하며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겼다.
실험체를 그자가 데리고 있을 수도, 혹은 발리올에 보냈을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많았지만 살리카 가주는 의심 없이 확신했다.
“뷔트시겐에 있겠지. 클로에로서는 그곳이 가장 안전한 장소일 테니.”
클로에가 중앙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부터 그랬다.
뷔트시겐 가주를 마냥 믿고 따르며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었다.
누이동생이라도 그런 누이동생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그를 잘 아는 살리카는 여상한 투로 입을 뗐다.
“흠. 그곳으로 데려간 의도야 빤하지.”
“…….”
“실험체를 고이 맡겨놨다 언젠가 내 목을 죌 증거로 사용하려는 것일 터.”
“하면 어찌할까요.”
“실험체야 어느 때든 반드시 이동될 것인즉. 그때를 노려 숨통을 끊으면 될 터. 무의미한 추적을 멈추고 뷔트시겐만 주시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클로에를 감시하는 눈을 늘리도록.”
“예.”
“그것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겠지. 클로에를 잘만 이용하면 뷔트시겐 그자며 새끼 늑대를 옭아맬 수 있을 터이니. 클로에는 훌륭한 미끼가 될 것이다.”
“……예.”
살리카 가주의 냉정함에 수호검의 대답이 늦춰졌다.
주군은 헤집고 다니는 클로에를 막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막지 않고 있다.
이는 엄연히 다르다.
클로에를 이용해 역으로 뷔트시겐을 옥죌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였으니까.
가슴께를 스치는 서늘함이 무거워 수호검은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루시안 발르와 말입니다. 2장로와 떠난 뒤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용가치가 없는 자는 버려야지.”
“그리하겠습니다. 아, 이번 가주 회합 말입니다.”
“음.”
“뷔트시겐 쪽의 참석 인원 중에 새끼 늑대가 있다고 합니다.”
“겁도 없이 예까지 온다, 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케르도스로 눈길을 돌린 살리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골몰하는 그의 서늘한 눈빛이 점점 진해져 갔다.
* * *
“하연제에 초대라니요!”
목에 핏대를 양껏 세운 노인.
맞은편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는 그를 황제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얀 머리카락과 눈동자.
전신이 새하얗기 때문인지 노인은 어딘가 기묘한 인상을 풍겼다.
누군가는 꺼림칙 해하고, 누군가는 이 색의 상징성 때문에 두려워하는.
“협회장.”
정령사 협회장을 황제는 차분한 음색으로 불렀다.
단 한 마디였지만 목줄이라도 당겨진 것처럼 협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어린 낯짝까지는 어쩌지 못했지만.
“이안 뷔트시겐을 대체 왜 부른 겁니까. 그자는 가까이할 자가 못 됩니다.”
“어찌하여.”
“위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힘이 파악되지 않으니 멀리 두어 경계함이 마땅합니다.”
“근거는. 그 아이가 위험하다는 근거가 뭔가.”
“워낙 교활한 자라 아직 그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음. 단순히 감으로 뷔트시겐의 적자를 모함하는 것이다?”
“모함이 아닙니다. 제가 조만간 그자가 감춘 것을 밝혀낼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 편중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으이.”
“그저 충언을 드리는 겁니다. 뷔트시겐 그자는…….”
“아우야.”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협회장은 입을 일자로 꾹 닫았다.
아우.
제가 협회장으로 내정된 뒤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다.
협회장은 괜히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제 앞의 황제를 눈에 담았다.
너무도 찬연한 은발과 은안이 어찌나 제 동공을 찌르는지.
그 눈부심에 협회장이 동공을 좁혔다.
본디 협회장도 황제와 같은 색을 지니고 태어났더랬다.
협회장직을 물려받으면서 모든 색을 뺐을 뿐.
그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으나 참을 수 있었다.
황가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황제는 빛, 그리고 협회장은 그림자.
그림자는 빛이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때문에 협회장은 반드시 황자 중 하나가 그 직책을 수행했다.
어둠이 되어 황가를 수호하는 일은 그렇게 누대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그러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협회장은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이날까지 살아왔더랬다.
“……호칭을 정정해주십시오.”
“협회장이라고 부르면 네가 내 아우가 아니게 되든?”
“공정성을 위한 것입니다. 거리감을 유지해야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으니까요.”
협회장은 이런 인사였다.
자신이 정한 바에서 한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자.
주욱 늘려놔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고무줄 같은 인간이었다.
“그간 네가 황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내 모르지 않는다.”
“제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하나 아홉 가지를 잘 해냈다 한들 끝자락의 하나가 어긋나면 무에 의미가 있을까. 하여 요즘 네 행보가 염려되는구나.”
“폐하.”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경계하다 되레 뷔트시겐의 반감만 사고 있지 않으냐.”
아마 협회장은 절대 이안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아둔해서가 아니었다.
저조차도 세대교체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일.
그것은 짐작이나 예측으로 좇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가의 피를 타고 나지 않은 자가 알을 먹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나 일은 벌어졌고, 협회장이 더는 이안의 뒤를 캐서는 안 된다.
‘충심이 지나쳐 무슨 짓이든 할 인사이니 막아야지.’
협회장의 의심을 끊어내려 황제는 부러 엄한 어조를 꾸며냈다.
“협회장, 황가와 뷔트시겐의 관계가 틀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감시는 그만두게.”
“하나…….”
“이안의 성취는 제 아비처럼 특이 체질에서 나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네.”
“…….”
“괜스레 엉뚱한 다리 좀 그만 긁으란 말일세.”
이미 합의를 끝낸 이안과의 관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정작 긁어야 하는 다리는 살리카이거늘, 어찌 그에 대해선 어떤 보고도 없는 것인가.”
“살리카의 행보에 관해선 조사가 이루어지고…….”
“설마 정령사 협회가 뷔트시겐의 정보력보다 늦다 말하려는 겐가.”
황제의 모든 말은 협회장에게 철침이 되어 박혀 들었다.
부정할 수 없는 실책이었으니까.
“크흠.”
“저번에도 그 아이가 살리카를 막지 않았다면 2황자를 잃었겠지. 둑스 역시도.”
그것이 가져올 여파는 빤했다.
“자칫 황가가 위험에 빠졌을 터.”
“지금부터는 놓치는 것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연히 그 아이와 척지지 말고 공조하게. 성에 차지 않아도 황좌를 쥐려 하는 살리카보다 나을 것이니.”
“명…… 받잡겠습니다.”
협회장은 대꾸를 쥐어 짜냈다.
억지로 답하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황제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협회장의 성정이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기에 황제는 대화의 말미에 충고 하나를 덧붙였다.
“충심이라는 명목으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되느니. 1황자 그 개망나니 뒷수습은 적당히 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