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협회장이 떠난 후.
황제는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서 수도를 응시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도시의 전경이 어둠에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흐음.”
“심중이 복잡해 보이는군. 왜, 후계 문제 때문에 그러나?”
수호자의 직설에 황제는 수심 많은 얼굴을 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오색 눈동자가 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숨기래도 숨길 수 없어서 황제는 입을 달싹거렸다.
“내가 가진 힘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황가가 어찌 되겠나.”
“천 년의 역사도 한순간의 모래알이 되고 말겠지.”
“그러니 염려를 놓지 못하는 걸세.”
황제는 말을 하는 중에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느릿한 맥동이 느껴졌다.
젊었을 적에는 세차게 뜀박질하던 맥동이 어느새 저와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그닥 많지 않았다.
그 사실이 새삼 와닿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 이런 생각을 해 봤으이.”
“어떤.”
“만약 5황녀와 이안의 정략혼이 성사되지 않으면…… 이안을 양자로 들여야겠다고.”
“양자? 그를 후계자로 내정하려고?”
“그 수밖에 없지 않나.”
“흠.”
“자네도 알 걸세. 그 아이라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충분하고말고. 비록 온전한 황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뷔트시겐엔 그 피가 섞여 있으니.”
“맞네.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렇지.”
그것도 아주 고귀한 피가 흐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초대황제의 피가 말이다.
이를 풀어보자면 초대황제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했다.
마력핵이 없는 황태자에게는 황제직을, 둘째에게는 정령사 협회장직을, 셋째에게는 모험가 길드의 협회장직을.
막내인 황녀에게는 뷔트시겐의 후계자와 결혼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녀는 곧장 후계자와 결혼했고, 그 자식이 다음 대 가주가 되었다.
4대 가문 중 초대황제의 피가 섞인 유일한 곳, 뷔트시겐.
황제는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미친 소리 같겠지만 어쩌면…….
‘마력핵이 없는 황태자가 태어나지 않을 이 날을 대비한 것일지도.’
턱을 쓸어내리는 황제의 손길이 꽤나 성글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예정된 운명이라면 버둥거려서 뭐하겠나.”
“냉철한 우리 황제께서 어쩌다 운명론자가 되셨을꼬.”
“돌아가는 상황이 그럴 만하지 않은가.”
황제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숨을 들이켰다.
도시는 어둠에 잠기고 있는데 공기는 무척이나 달았다.
생명이 발아하는 계절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비록 라에라트의 명맥은 끊기겠지만 황가는 이어질 터. 그 아이로 인해.”
“그나저나 5황녀가 눈이 안 뒤집히려나 몰라. 2황자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하핫. 처음에는 바들바들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다 이해할 걸세.”
“하긴. 5황녀뿐 아니라 2황자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네를 닮아 탁월하지.”
“그러니 녀석들도 알고 있을 걸세. 이안 뷔트시겐이 지닌 자질을.”
“음.”
“그를 인정하고 녀석들이 양 날개가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황제의 말이 끝난 직후 수호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황제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차피 이안에게 그 자리를 물려 주겠다 결론을 냈지 않나.”
“…….”
“더는 쓸데없는 상념들을 이고 있지 말게.”
수호자는 싱숭생숭함 따위 내던져버리라며 재촉했다.
“여기서 청승 떨지 말고 흑맥주나 마시러 가세.”
“팔 떨어지겠네. 술 먹는 일이 무에 그리 급하다고.”
“가만 놔두면 또 삽질할 것 같아서 말일세. 자네는 그게 문제야. 고지식한 거. 협회장한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지.”
수호자의 타박을 받으며 황제는 마음의 근심을 덜어냈다.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흐름을 두고 고민만 해서 무엇하랴.
흐름을 잘 타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움켜쥐면 되지.
마음을 견고하게 다잡는 황제를 응원하듯 그 주변으로 바람이 살랑거렸다.
* * *
파종제가 열리는 도시, 발리올의 페네티오.
페네티오 전체가 어떤 열기에 휩싸여 공기가 후끈거렸다.
흘러가는 바람마저 출렁거려서 이안은 자꾸 엉클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한창 바람과 씨름하고 있는데.
《아아. 황제는 충직한 가신에게 씨앗을 건네며 약속했다네. 영원한 풍요를. 가신이 받은 씨앗은 여신의 숨결. 영원토록 발리올의 대지를…….》
바람결에 음유 시인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수려한 음률에 담긴 것은 파종제의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초대황제가 발리올 영지를 맡은 벗에게 씨앗을 선물한 일.
그 씨앗이 황무지였던 발리올의 대지를 비옥하게 바꾼 경이.
그날의 기적을 잊지 않으려 만든 노래가 거리에 듣기 좋게 퍼졌다.
‘그러니까 파종제는 씨앗을 받은 날을 기리기 위한 거지.’
해서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발리올 전체가 씨앗을 심으며 군무를 춘다.
각을 맞춰 한 몸인 듯 추는 칼군무, 그에 따라 대지가 일어나는 광경.
이게 또 장관이었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명장면이기 때문일까.
거리 곳곳에서 파종제의 기원에 관한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되고 있었다.
커다란 화첩에 그려지는가 하면, 기예단은 춤으로 그를 표현했고, 광장의 한편에서는 연극으로 올려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벽화나 조각상에 새겨 연속적으로 나열해 놓았다.
정말이지 화려하고 볼거리가 차고 넘쳤다.
그 탓에 도리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이안의 관심을 잡아채려는 걸까.
[캬앙!]
사냥개가 씩씩하게 목청을 높였다.
카랑카랑한 부름에 이안은 고개를 내려트렸다.
“……아.”
녀석이 사과 사탕 꼬치를 파는 노점상 앞에 앉아있었다.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꼬리를 무작스럽게 흔드는 모양새가 마치 구애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지.”
입꼬리를 올린 이안은 노점상에서 과일 꼬치를 산 뒤 사냥개와 녹스에게 나눠주었다.
두 녀석 모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식욕이 돋는 모습에 이안 역시 과일 꼬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치아 사이로 설탕의 달콤함과 과일의 상큼함이 짓이겨졌다.
“코르키 네가 침 흘릴 만하다.”
셋은 사탕 꼬치를 우걱우걱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맛나게 다섯 개나 해치우고 있던 그때.
우웅.
공중에 떠 있던 씨앗 모양의 수정구가 파르르 떨렸다.
페네티오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그것들이 한꺼번에 진동하니, 흡사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송화색 물결을 남기는 수정구, 아니 음성석으로 이안의 눈길이 쏠렸다.
[어이 형제들. 파종제에 온 것을 환영한다.]
독특한 추임새와 흡사 바위 같은 묵직한 음색.
발리올 가주의 목소리가 음성석을 통해 새어 나왔다.
[자고로 축제란 건 밤새 즐기는 게 예의지.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면서 말이야.]
모두가 하던 일도 멈추고 가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6일을 그러기 위해 오늘쯤은 고생 좀 해야겠지? 일단 파종제의 마지막 날에 심을 씨앗을 얻어 와라.]
[시합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다만, 씨앗 정령으로부터 씨앗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정오부터 석양이 지는 6시로 한정한다.]
[물론 노력의 보상은 대지의 가시이다.]
[아, 사족을 좀 붙이자면 이번에는 풍요의 여신이 미소를 보냈다. 그 덕에 대지의 가시가 무려 다섯 개나 열렸지.]
다섯 개란 말에 광장이 술렁거렸다.
이는 기회와 확률이 대폭 넓어졌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시합의 우승자도 다섯이다. 행운을 빈다, 형제들.]
경쾌하기까지 한 발리올 가주의 끝말이 끊기자 음성석도 끊겼다.
그 즉시 씨앗 수정구는 언제 그랬냐는 양 진동을 멈췄다.
타닷.
정지한 음성석과 반대로 사람들은 속속 어딘가로 이동했다.
움직이지 않는 건 상인이나 축제의 운영회뿐이었다.
썰물처럼 빠져버린 인파를 보곤 녹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 많은 사람이 다 참가자야?]
“파종제의 시합이 특이하니까 본래 참석률이 높잖아.”
[하긴. 등급이 높다고 우승을 하는 게 아니니까.]
“도리어 씨앗 정령에게서 씨앗을 얻으려면 운이 좋아야 하지.”
파종제의 시합은 대련 형식이 아니다.
오롯하게 씨앗 정령의 부탁을 들어주고 씨앗을 얻는 방식이지.
가령 씨앗 정령이 사과 사탕 꼬치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치자.
참가자는 과일 꼬치만 건네주면 씨앗을 획득할 수 있다.
무척 단순한 방식.
하지만 이게 또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정령의 부탁을 완수한 후에야 다음 정령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구조지.’
거기다 그들의 부탁이라는 것도 상당히 까다로워 시합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다.
과일 꼬치 가져오기 같은 부탁은 열에 하나도 안 된달까.
오죽하면 역대 우승자들의 최대 전적이 씨앗 다섯 개겠는가.
6시간에 다섯 개라니.
시합이 어렵다는 걸 익히 아는 녹스가 양팔을 파닥거렸다.
[이번 시합에서 운의 최고봉은 수장에게 부탁을 받는 거 아니겠누.]
“그렇지. 수장이 씨앗 보따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보따리에 씨앗이 무려 서른 개나 들었다지.]
“뭐가 됐든 만나는 게 먼저니까 우리도 움직이자.”
이안은 서둘지 않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씨앗 정령이 사는 세멘티움 구역이었다.
본디 페네티오 지형은 호리병 모양이다.
구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왼쪽에 인간들이 살고 오른쪽에 씨앗 정령이 산다.
정령이 사는 오른쪽으로 향해 가길 30여 분.
불투명한 막이 앞을 가로막아 이안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정령 마을을 보호하는 방어 결계였다.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지만, 악의를 가지고 통과하면 몸이 잿가루가 되어버리는 결계.
방어막을 보자마자 녹스가 도도도 뛰어갔다.
친구라도 만난 모양새였다.
[오, 이 방어 결계. 오랜만에 보는구나.]
“응?”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누. 초대황제의 부탁으로 이곳에 결계를 짰다고.]
“아아.”
[사과 사탕 꼬치에 정신이 팔려 내 말을 콧등으로 들었구먼.]
“다 들었는데. 씨앗 정령을 보호하기 위한 거라고.”
[한 번도 결계가 깨진 적이 없다는 것도 들었어?]
“당연합죠.”
[에헴.]
콧대를 이마까지 세우던 녹스가 결계를 퉁 쳤다.
청아한 소리가 났다.
듣기 좋은 울림에도 이상하다는 듯이 녹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안, 이 소리 들었어?]
“응. 미세하게 눈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나는데?”
[그치. 어허허.]
결계를 통과할 생각은 않고 녹스가 막의 여기저기를 만지작댔다.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그러더니 웬걸.
갑자기 광대를 실룩거리며 게슴츠레하게 이안을 쳐다보았다.
아까 좌판에서 뭐를 잘못 주워 먹었나 싶은 낯바닥.
이에 이안이 왜 그러냐 물어보려는데 녹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캬캬캬. 제자야, 우승할 수 있는 필살의 묘수가 생각났는데 들어보련?]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런 괴상한 표정을.”
[그딴 건 신경 쓰지 말고. 이 결계에 답이 있다.]
“결계?”
이안이 결계로 동공을 이동했다.
탄탄한 방어막이 고요함을 물리치고 탄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가 저래서 잘 모르겠지만 요놈한테 살짝 문제가 생겼다.]
“아.”
[결계란 게 결국 풍화되는 바위와 같지. 아무리 나 같은 능력자가 짜도 세월에 장사 없다는 얘기다.]
“설마 이거 보수하고 수장의 부탁을 받자는…….”
[옳거니. 수장이라함은 일족을 보호해야 하는 자. 하니 문제가 생긴 결계를 보수해주겠다고 하면 우리의 부탁을 거절치 못할 것이다.]
“오오.”
[결계를 만든 놈이 난데 보수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그리만 된다면 나야 뭐.”
이안이 씨익 웃자 녹스의 콧대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모종의 작당을 발판으로 삼으며 이안과 녹스는 방어막에 발을 들이밀었다.
일렁.
감정을 감지한다는 방어막이 그들을 부드러이 받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