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91화 (191/214)

제191화

“이곳만 딴 세상 같다.”

이안은 결계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로 쭉 뻗은 스피오델라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었다.

짙은 초록의 줄기 안에는 씨앗 정령의 집들이 콕콕 박혀 있었고.

“와, 저 연한 줄기 곳곳에 집들이.”

[씨앗 정령들이 스피오델라의 진기를 받아야 해서 그 안에 자리한 게다.]

흡사 강낭콩 같은 모양새였다.

호기심 어린 이안의 시선이 줄기를 타고 꼭대기까지 곧게 올라갔다.

줄기의 끝부분엔 연잎처럼 생긴 이파리가 양쪽으로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다.

평평하고 단단한 이파리.

그 위쪽으로 풍차가 힘차게 휭휭 돌아가는 중이었다.

“씨앗 정령이 씨앗을 가공할 때 나는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옥수수를 구울 때 나는 냄새? 양파가 적당하게 구워졌을 때 나는 냄새?

코끝을 스치는 구수한 향에 이안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냄새가 코를 자꾸 간지럽혀서 실룩거림이 참아지지 않았다.

[방앗간이니 으레 풍차가 돌 때마다 장하게 날밖에.]

끊이지 않고 돌아가는 풍차만 수십이었다.

그러니 냄새가 줄어들 틈 없이 마을 안을 꽉 채우며 휘돌았다.

이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굴러가는 건 축제의 마지막 날을 위함이었다.

[가공이 끝난 씨앗만 파종할 수 있으니 거의 막날까지 이럴 것이다.]

“하긴. 그냥 심으면 발아하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져 버리니까.”

[그나저나 씨앗 정령이 관심을 주지 않으니 참가자들이 말을 못 붙이는구나.]

“선뜻 다가가긴 힘들지.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이안의 눈길이 이번엔 씨앗 정령의 몸뚱이에 가 닿았다.

복슬복슬한 털, 둥근 꼬리, 짧은 앞발, 하얗고 기다란 귀.

겉보기엔 ‘오’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영락없이 귀여운 토끼였다.

한데.

[저것들 인상 봐봐라. 험하다, 험해.]

“험상궂게 생기긴 했네.”

토끼, 그러니까 씨앗 정령들은 본판 자체가 그랬다.

힘들어서 얼굴이 구겨졌다기보다 애초부터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다.

거의 일수 찍는 아저씨 같은 생김이랄까.

몸과 얼굴이 따로 노는 데서 오는 괴리감 탓일 거다.

참가자들이 먼저 나서서 부탁에 관해 묻지 못하는 것은.

이안은 그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가 가는 곳은 수장의 거주지였다.

가장 많은 씨앗을 획득할 수 있는 곳.

가는 도중 녹스의 고개가 연한 노란색 귀를 가진 씨앗 정령에게 꽂혔다.

[그나마 장로들은 인기가 많구나.]

“씨앗을 무려 다섯 개나 주니까.”

[다섯 개면 우승도 노려봄직하지. 짜식들. 인생은 한 방이라는 걸 아는구만.]

참가자들은 호기롭게 혹은 자신감 넘치게 장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장로의 부탁을 들은 즉시 태반이 죽상을 하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착상태.

그것을 생생히 목격한 참가자들은 바로 뒷걸음질을 했다.

씨앗 5개가 욕심나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

발목을 잡혀서 시간만 버릴 바에야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주민 정령들의 부탁을 들어주며 하나하나 얻어가면 되는데.

“결국 한 방을 노린 녀석들은 뭣 된 것 같은데?”

[인생사 새옹지마다.]

마을을 찬찬히 살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가장 안쪽이었다.

이안은 걸음을 멈추고 거대한 줄기를 쳐다보았다.

여타의 것보다 두껍고 탄탄하며 달랑 집 한 채만 박혀 있는 줄기.

누가 봐도 우두머리가 사는 곳이었다.

* * *

“수장이다.”

줄기의 아랫부분에 귀가 샛노란 토끼가 지팡이를 든 채 서 있었다.

턱까지 늘어진 허연 눈썹 수염에 비례하는 기백.

살가죽을 찢을 것 같은 성성함 탓인지 아무도 수장에겐 접근하지 않았다.

[어흠. 일단 내가 먼저 운을 띄워보마.]

눈을 찡긋거린 뒤 녹스가 단숨에 수장과의 간격을 좁혔다.

호기로운 발걸음만큼 녀석의 목소리 또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반가우이.]

“…….”

[그대의 인사를 듣기 전에 간단히 내 소개부터 하지. 나는 뷔트시겐의 후계자인 저 아이의 스승이라네. 물론 뷔트시겐 가주뿐 아니라 발리올 가주와도 한때는 막역한 사이였지.]

녹스의 주절거림에도 수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도 개의치 않고 녀석의 허세는 반질반질하게 이어졌다.

[아, 그런다고 너무 어려워하지는 말게. 부담 갖지도 말고. 그저 내가 하는 제안을 한번 곱씹어 보라 이르는…….]

……가만?

녹스의 말이 길어질수록 수장의 주둥이가 점점 찌그러졌다.

뭔가 못마땅한 듯한 비틀림.

‘뭣 때문이지?’라는 의문이 든 찰나였다.

파아앗.

수장이 뒷발로 땅바닥을 밀며 날아올랐다.

진짜로 토끼가 날았다.

어? 하는 사이, 수장이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아래로 쇄도했다.

포효하는 범 같은 자세.

사냥감을 노리는 지팡이가 눈 깜짝할 새 녹스의 이마를 가격했다.

빠각.

두개골이 빠개진 것 같은 된소리가 났다.

이게 말로만 듣던 뚝배기 깨기인 건가.

[끄억!]

비틀대는 녹스를 보니 얼마나 아플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이안은 잽싸게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이럴 땐 속도가 중요한 법.

마치 일행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멀찍이 벌렸다.

“…….”

빠른 태세 전환을 보인 게 저뿐이었을까.

제 옆에 있던 사냥개 또한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녀석도 제 두개골이 다 아프다는 듯 앞발로 이마를 짚었다.

둘의 얍삽함을 녹스가 흘겨본 즉시였다.

본론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어디서 개수작질을!”

수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신성한 씨앗을 편법으로 얻으려 해?”

[편법이라니.]

“방어막을 고쳐주고 내 부탁을 얻겠다는 것이 편법이 아니면.”

[우승할 수 있는 현명한 지름길일 뿐. 이를 편법으로 폄하하지 말게.]

녹스는 뻔뻔하게 대꾸하면서도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실제 이안과의 대화 자체가 편법이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의 불안한 눈빛과 거친 생각을 읽은 수장의 호통이 다시금 이어졌다.

“그대가 우긴다고 없던 일이 될까. 방어막을 통과할 때 내 다 읽었는데!”

[아…….]

녹스는 아뿔싸 했다.

제가 짠 결계, 그 덫에 제가 걸려들고 말았다.

‘그 결계의 술식이 악의만 걸러내는 게 아닌데.’

결계는 방어막을 넘는 모든 불온한 의도를 수장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러니 완전무결한 보호막이란 수식이 붙은 게 아니겠는가.

입을 삐죽댄 녹스가 ‘아, 결계 넘고 생각할걸.’이란 후회를 절절하게 하는 사이.

뒷수습을 위해 이안이 수장에게 말을 건넸다.

“그저 제 스승님이 제자를 위해 의욕이 앞섰습니다.”

“흥.”

“수장님이 씨앗 하나를 틔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듯 제 스승님도 그러하십니다. 씨앗인 저를 틔우기 위해 뭐든 마다치 않으시지요.”

“스승의 갸륵한 마음이니 봐 달라?”

수장이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선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양새가 딱 불량토끼였다.

금방이라도 저 입에서 ‘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뒷골목으로 따라와.’ 할 것 같았다.

수장의 까칠함이 넘실거리자 이안은 얼른 말을 덧댔다.

“오늘 일이 수장님의 입장에선 그닥 깔끔한 일이 아닐 수 있으나, 잘 생각해 보면 서로에게 이로운 거래가 아니겠습니까. 방어막은 고쳐지고, 저는 씨앗을 얻을 기회를 얻고.”

이안의 혓바닥 놀림이 예술이었다.

뷔트시겐 후계자라기보다는 뒷골목에서 평생을 굴러먹은 사기꾼에 가깝달까.

그게 웃겨서 수장이 지팡이를 현란하게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형평성을 고려하면 당장 내쫓는 것이 마땅하다.”

“…….”

“하나.”

……하나?

일말의 가능성이 덧대어졌다.

“이대로 결계가 부서지도록 방치하는 것 또한 내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지.”

“그러하면…….”

“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눈앞에 결계를 짠 자가 버젓이 있는데 빼는 것도 우습지.”

불량토끼가 녹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자고 수호자가 이런 애송이에게 붙어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무척 신선하긴 했다.

고대종으로서 천 년 넘게 살다 보니 솔직히 놀랄 일이 별로 없다.

한데 오늘은 주름진 뇌에 여러 번 자극이 쏟아졌다.

옆에서 좀 더 지켜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크흠. 일단은 보호막부터 고치고 오게. 내 그다음에 부탁을 내어줄 것이니.”

수장이 새초롬한 눈빛으로 종용 아닌 종용을 했다.

* * *

보호막이 원상복구 된 직후.

촛농처럼 찰싹 붙어 있던 수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내 부탁은 보호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호막을 수선하는데 필요한 대지 토룡의 심장을 구해오는 것이었지.>

<하나 이미 수선은 되었고 그 심장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래도 규칙은 규칙.>

<하여 나는 청한다. 원래의 부탁이 아닌 토룡의 정수를 구해달라고.>

그리하여 당도한 마을 외곽의 숲.

[대지 토룡의 정수면…… 투아타라, 거대 지렁이를 찾아야겠구나.]

녹스가 벌건 이마를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아직도 골이 아픈 듯 녀석은 인상을 팍 구기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짠하면서도 왜 이리 웃긴 것인지.

새어 나오는 웃음이 하릴없이 잇새를 자꾸 쳐댔다.

“토룡…… 크흠. 토룡의 정수면 지렁이 똥이네.”

[똥이 아니라 크리스털이지.]

“그게 그거지. 그 녀석이 싸는 똥이 크리스털일 뿐이니까.”

대지 토룡은 땅속 깊숙한 곳에서 사는 마물이다.

마물이라고 해서 딱히 해가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특히 똥, 이것은 씨앗 가공의 특효약이다.

크리스털 가루를 조금만 뿌려도 에테르계의 성질이 강한 씨앗이 물질계의 형질로 곧장 바뀌기 때문이다.

이마를 연신 누른 녹스가 당당하게 질문을 던졌다.

[한데 그 많은 크리스털을 어찌 구할 것이냐?]

“다 방법이 있지.”

[수장이 요구한 게 30개다. 무려 30개.]

“터무니없는 숫자긴 하지. 대지 토룡 하나가 1년 동안 만들어내는 크리스털의 양에 비하면.”

[여섯 개 안짝인 거 알고 있지?]

“물론입죠.”

[저 땅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것도 알고?]

“예.”

[고로 우리는 사기 당한 거다.]

“에이. 우리 스승님 또 멀리 가신다.”

농담조로 받았지만 사실 녹스가 우려할 만했다.

토룡의 특성 때문이다.

터전을 정한 즉시 그 영역을 장악한 채 사는 대지 토룡.

그들은 죽을 때까지 외부 토룡을 들이지 않기에 그 개체 수가 매우 적다.

가족 단위로 사는 종답게 말이다.

그러니까 세멘티움 마을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그 수가 네 마리뿐이다.

즉 이들이 1년 동안 싼 똥을 모조리 수거해도 30개가 안 된다는 말씀.

한데 어느 세월에 30개를?

결론은 이 임무 자체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였다.

생각을 정리하며 이안은 눈 앞에 펼쳐진 스피오델라 군락지를 훑었다.

대지 토룡을 잡기에는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우선은…….”

말꼬리를 흐린 이안은 발끝을 까닥거렸다.

익살스러운 발놀림에는 명확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다.

“땅을 파야지.”

[땅을 파?]

“대지 토룡을 가둘 땅을.”

[되지도 않는 소리다. 대지 토룡의 특기가 땅굴 파기다. 가두긴 뭘 가둬.]

“그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임시 덫으로만 쓸 거야.”

[흐음.]

“아주 잠깐만 가둘 수 있으면 돼.”

이안은 땅바닥 상태를 확인한 후 마력을 발에 집중시켰다.

땅을 팔 예비 동작을 마친 즉시.

“녹스 너도 동참해. 땅을 아주 깊고 넓게 파야 하니까.”

멀뚱멀뚱 뒷짐을 지고 있는 녹스의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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