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92화 (192/214)

제192화

“뭐 이만하면.”

이안은 제가 판 구덩이를 훑어내렸다.

얼마나 깊숙이 팠는지, 밑바닥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자칫하다 떨어지면 영영 기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깊이.

불길함마저 주는 구덩이를 훑은 뒤였다.

“덫을 팠으니 이제 덫으로 유인할 미끼를 구해야겠다.”

미끼가 평범해서야 쓰나.

대지 토룡이 환장하는 것으로 준비할 작정이다.

이안은 다시 스피오델라가 많은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보물을 탐사하듯 줄기의 밑동만 살피길 얼마간.

이안은 찾고 있던 뭔가를 발견하곤 손을 뻗었다.

그의 행동에 녹스와 사냥개가 고개를 쭉 뺐다.

호기심이 잔뜩인 고갯짓이 부산스럽다 못해 열렬했다.

그에 호응하듯 이안은 밑동의 알록달록한 열매를 가리키며 사근사근 말했다.

“이거 보이지.”

[눈썹 모양의 베리? 그거 루브럼 아니냐.]

“이게 대지 토룡에게는 캣닙 같은 거잖아.”

[오호. 일단 놈의 정신을 빼놓고 시작하겠다는 거구만?]

“일단은.”

루브럼을 따자 꼭지 부분에 꾸덕한 과육이 고였다.

킁킁.

달짝지근한 냄새에 코를 벌름거린 녹스가 과육을 찍어 먹었다.

[크으. 저 깊은 산속, 어느 토굴에서 장인 정신을 가진 꿀벌이 모은 것 같은 이 고농축의 맛.]

“대체 뭔 말이래.”

[대강 맛있다는 말이다.]

“예술이긴 하지. 단데 산미까지 있으니까.”

[마냥 달기만 한 꿀보다 더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러니까 토룡이 환장하지.”

녹스는 루브럼 열매를 양손에 쥔 채 본격 먹부림에 들어갔다.

난 먹을 테니 넌 채집하라는 확실한 의사 표명.

빈둥거리는 녹스를 두고 이안은 바지런히 움직였다.

발견하는 족족 열매를 따다 보니 금세 한 자루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섯 자루가 되었을 때, 그것들을 구덩이 주변에 흩뿌렸다.

물론 구덩이 안쪽에는 자루째 던져놓았다.

촘촘히 쌓인 스피오델라 줄기 위로 널브러진 자루.

자루 안에서 점성질의 과육이 터지며 벌건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실타래처럼 늘어지는 과육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그즈음.

콰르르릇.

땅이 거세게 요동치며 터질 듯이 들썩거렸다.

대지 토룡이 왔다는 신호였다.

낚시가 성공하자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역시 효과가 직방이네.”

루브럼이 놈에게는 환장할 별식이니 참을 수 있을 리가.

콰콰콰쾃.

볼록하게 올라온 땅이 매섭게 이안을 향해 질주했다.

곧장 들이박아 버릴 것처럼 사나운 기세였다.

단숨에 지척까지 온 흉흉함은 부지불식간에 위로 솟구쳤다.

캬아아악.

존재감을 각인하듯 포효하는 거대한 대지 토룡.

놈은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매섭게 아래로 내리꽂혔다.

뾰족한 송곳니가 창처럼 날카로웠다.

뚫리면 이대로 황천길 가겠구나 싶던 순간, 예리한 이빨이 구덩이 주변의 루브럼을 야무지게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토룡의 몸뚱이가 사정없이 구덩이로 떨어졌다.

쿠덕 하는 둔중한 울림이 곡소리처럼 메아리쳤다.

“확실히 몸집이 크니까 소리부터 남다르다.”

낙하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도 토룡은 루브럼을 짓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맛에 취해 아픈 줄도 모르는 거였다.

먹고, 먹고, 또 먹고.

열매를 미친 듯이 흡입하고 나서야 토룡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꺼어억.

놈은 트림을 거하게 발사하며 배불리 먹은 티를 냈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 이안을 쳐다보았다.

‘네가 이런 하찮은 함정을 팠니?’라고 묻는 눈빛.

거기에 대꾸하듯 이안이 씨익 웃자, 대지 토룡이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바닥의 쓸림이 빨라질수록 뭉툭한 갈색 꼬리가 점점 연해졌다.

‘지반이 약한 곳을 탐색하는 거군.’

아니나 다를까.

약한 곳을 찾아냈는지 토룡이 꼬리 흔들기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3시 방향의 벽체를 몸통으로 들이박았다.

단 한 번의 시도.

그만으로도 이안의 발치까지 진동이 전해져왔다.

“벽에 금 간 것 봐. 구덩이 절반 가까이에 균열이.”

[다시 덧대야겠는데?]

녹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

콰아아앙.

대지 토룡이 같은 곳을 몸통으로 연거푸 내리쳤다.

그 결과 벽체가 바스라지며 듬성듬성 떨어져 나갔다.

이때다 싶어 놈이 다시 벽체로 돌진했다.

쿠궁.

구덩이가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토룡의 몸이 움찔거렸다.

더하여 비늘이 지져지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

즉각 토룡은 모가지를 비틀어 제 옆구리를 보았다.

비늘과 속살이 얕게 그을려 있었다.

그를 확인한 토룡이 시선을 끌어 올려 다시금 이안을 주시했다.

처음과 확연히 달라진 눈빛에 이안이 답을 주듯 입을 뗐다.

“구덩이에 불 좀 지펴봤는데 어때, 뜨뜻하신가?”

스스스슷.

“네 약점이잖아, 불이.”

이안이 사실을 콕 집자, 토룡이 동공을 세모꼴로 좁히며 구덩이 위를 응시했다.

빠져나갈 곳은 저곳뿐이라는 확신을 담은 채로.

그 후, 토룡은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은 도약을 선보이며 대지를 박찼다.

“어림없지. 녹스, 그거 던져.”

[알았다.]

이안의 신호에 녹스가 얇은 피막 형태의 덮개를 던졌다.

대지 토룡이 막 등장했을 때부터 짜기 시작한 흙 덮개.

공중을 휘돈 덮개가 구덩이 윗부분을 틈도 없이 메꿨다.

투웅.

대지 토룡의 몸과 충돌한 덮개가 푸딩처럼 출렁거렸다.

힘으로 밀어내기보다 토룡의 힘을 부드럽게 받아냈기 때문.

탄력적인 덮개에 몸을 부닥친 대지 토룡은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녹스 불을 더 때자. 화력을 최대한 올려.”

이안은 구덩이 전체에 열을 가했다.

더불어 바람을 일으켜 끊임없이 순환하게 했고.

[이러면 곧 효과가 나타나겠구나.]

“몇 초 안에?”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자마자 부우욱 소리가 구덩이를 후려쳤다.

동시에 대지 토룡이 몸을 마구 뒤틀었다.

부욱. 북. 부우욱.

뒤틀림에 맞춰 토룡의 방귀 소리가 무작스럽게 난사되었다.

그때마다 크리스털이 퐁퐁 떨궈졌다.

쏟아지는 크리스털의 향연을 본 녹스가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불과 열매의 환장할 조합이로다.]

루브럼 열매는 가열이 되면 복통을 일으킨다.

또한, 엄청난 유독 가스와 함께 끊임없이 설사를 유발한다.

“아까 우리는 신경도 안 쓰고 달궈진 루브럼을 폭풍 흡입했으니 저 꼴 나지.”

[참 신박하면서도…… 잔인한 방법이다.]

“내가 임무만 아니었어도 이런 식으로 괴롭히진 않았을 거야.”

[저렇게 크리스털을 쏟아내면 똥구멍이 다 헐 텐데.]

녹스는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놈을 보듯 이안을 응시했다.

똥을 기진맥진할 때까지 싸게 만들다니.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드러운 짓이었다.

슬쩍 거리를 벌리는 녹스의 행태에 이안의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왜, 뭐.

모로 가도 슈바츠로만 가면 된다.

카르디아 2성을 상대로 출혈 없이 임무만 완수하면 되는 거다.

* * *

다시 페네티오.

이안은 땅거미가 지는 참에 올리브와 조우했다.

녀석은 저를 보자마자 대지의 가시를 흔들어 보였다.

“유일하게 장로의 부탁을 완수한 올리브 님 아니십니까.”

이안이 능글맞게 굴자 올리브가 받아치듯 허리를 굽혔다.

“허허. 존경스럽습니다, 형님. 수장한테서 씨앗 주머니를 받다니요.”

“형이라 함은 늘 아우님의 귀감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 귀감 한 번에 지금 페네티오가 발칵 뒤집혔소이다.”

수장의 부탁을 완수한 건 이안이 최초였다.

그 누가 와도 부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수장 때문이었다.

그 탓에 소싯적 시합에 참가했던 발리올 가주조차도 씨앗 주머니는 얻지 못하지 않았던가.

“히야. 최초라니. 나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허허. 동시에 우승자가 되어 아우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오다니, 크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낯뜨거운 금칠이 둘 사이를 통통 맴돌았다.

개구진 장난을 실컷 한 후, 올리브가 먼저 평소의 말투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이안, 가시는 먹었어?”

“받자마자.”

“고리는. 대지 고리는 생겼고?”

“어.”

궁금해하는 올리브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이안은 손바닥에 마력을 모았다.

그러자 흙으로 만든 구슬 하나가 생겨났다.

빙글빙글 돌던 구슬은 이내 불길에 휩싸여 고운 흙가루로 분해되었다.

“와우. 신기하다.”

바람이 다른 일족의 원소를 다루는 기묘한 광경.

언제봐도 놀랍고 적응이 안 돼서 올리브는 볼 때마다 감탄을 연발했다.

“그럼 이제 물의 가시만 남은 거지? 근데 물 축제는 3개월 뒤잖아.”

“일단은 미숙한 대지부터 잘 다뤄야지.”

“허허헝. 이안 네가 대지까지 다루고 혼자 다 해 먹으면 나는 어째야 하지?”

“어쩌긴 뭘 어째. 수련에 뼈를 갈아야지.”

둘이서 신나게 떠들고 있던 때였다.

“어이 소년들.”

이안의 뒤로 독특한 추임새가 날아들었다.

발리올 가주였다.

가주는 저와 올리브 사이에 끼어들어 어깨에 팔 한 짝씩을 걸쳤다.

“축하한다.”

“아, 감사합니다.”

“우리 꼬맹이들이 당연히 해낼 줄은 알았다만 이런 결과물을 가져올 줄이야.”

가주가 이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저 보는 것뿐이라도 일족을 다스리는 수장의 시선이기 때문일까.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 같았다.

하나 절대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에 설핏 웃은 가주가 이안의 어깨를 탁탁 치며 입을 뗐다.

“얻었다고 끝이 아니지.”

“…….”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면 없느니만 못한 법.”

하는 말마다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낯빛도 묘한 것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안이 가주의 의중을 파악해보려 눈을 가늘게 좁히던 차.

“따라오게.”

가주가 싱긋거리며 이안을 어딘가로 이끌었다.

명확한 목적이 있는 걸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발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의외의 장소에 당도해 있었다.

‘……토굴?’

발리올 가주의 별장 끄트머리에 있는 웬 토굴이었다.

“수련동이다.”

“아.”

“대지의 가시를 얻은 발리올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수련하지.”

가주는 양 손바닥에 힘을 주어 두 소년을 토굴 쪽으로 밀었다.

반박을 받지 않겠다는 양 그 손길이 엄중했다.

“오늘부터 회합 전날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

“대지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거든.”

저를 겨냥한 말인 듯 또다시 가주가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리 친해도 아버지가 제 비밀을 털어놨을 리 없는데.

그렇다는 건 순전히 가주의 감이라는 거였다.

목이 탔다.

생침을 삼키는 이안에게 어서 가자며 가주의 낮은 목소리가 종용했다.

“내가 가진 것들을 가감 없이 알려주겠다.”

“…….”

“열심히 해봐. 얼마큼 흡수할지는 너희들 손에 달렸으니까.”

발리올 가주는 귀한 것을 내어주었다.

그동안 그가 쌓아 올린 경험, 그리고 시간.

선뜻 손을 내밀면서도 그는 일족이냐 아니냐를 구분하지 않았다.

발리올이든 뷔트시겐이든 어차피 다 똑같은 정령사라고 여겼기에.

* * *

이안은 수련동에서 나오자마자 통신실로 들어섰다.

토굴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레브에게서 연락이 왔었단 하인의 보고를 받아서였다.

―바다 엘다 나무의 수액 건은 잘 해결됐어.

통신석에 비치는 레브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결과가 좋으니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어.”

―아, 난 여기서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맹약 때문에?”

―응. 일종의 의식이라 준비하려면 좀 걸린다네.

“얼마나?”

―한 일주일?

“일주일이면…… 얼추 가주 회합이 끝나는 때랑 맞물리겠다.”

―아, 좋은 소식. 여기 있는 동안 바다 엘프들이 내 수련을 봐주겠대.

“바다 엘프가 직접 수련을?”

―나도 좀 의아하긴 해. 그래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꽉 잡으려고.

“맹약 덕분에 이래저래 좋은 경험을 한다. 원류한테 가르침도 받고.”

―그러니까.

기대감 때문인지 레브의 동공이 더 환해졌다.

둥글게 웃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의아함을 표하고 있었다.

제 눈높이에서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거 뭐야? 마름모꼴의 크리스털.

“아, 이놈.”

레브의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사선으로 틀었다.

영롱한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물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저것은…… 대지 정령이었다.

“씨앗 정령의 수장이 내준 부탁을 하다 얻게 된 대지 정령.”

―대지?

대지 토룡이 남긴 크리스털을 줍고 있는데 그 틈바구니에 저놈이 있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와선 이유 없이 착 달라붙은 녀석.

잘그락.

붙임성 좋은 크리스털이 놀아달라며 이안의 어깨를 치댔다.

애교 많은 몸짓에 이안이 크리스털을 두드렸다.

“어쩌다 보니 주웠다.”

―와, 매번 참 놀랍다. 번번이 원칙을 깨부수다니. 바람이 대지 정령과 결속하는 초유의 사태를 누가 믿을까 싶다.

이안의 기연에 레브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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