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93화 (193/214)

제193화

다음날 이안은 새벽같이 수도로 이동했다.

가주 회합에 가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였다.

“이 새벽에 보는 도련님의 얼굴은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왜 더 잘 생겨 보이나 보지?”

이안이 호그의 휘파람의 주인장에게 넉살을 떨었다.

눈꼬리에 달린 웃음기가 장난스러워선지 주인장 또한 진한 미소를 내보였다.

“제가 여자였으면 당장에 달려들었을 겁니다.”

“그러기 전에 도망을 가야겠군.”

“하하핫. 말발로 내빼시는 것도 수준급입니다.”

주인장의 호쾌한 웃음이 별채의 복도를 에워쌌다.

도련님은 참 재밌는 분이다, 라는 사족을 단 주인장.

그는 모퉁이에 다다르자 이내 유들유들함을 버리고 표정을 굳혔다.

“그나저나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연통해서 폐가 되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어차피 내가 한 부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우선 이쪽으로.”

주인장이 안내하는 대로 이안은 가만히 따라갔다.

그렇게 걷는 동안 저만치에 있던 두 갈래의 복도가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주인장의 어조 또한 은밀해졌다.

“도련님, 요사이 파다하게 퍼진 소문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소문?”

“루하흐에 관한 것인데, 전대 가주가 독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음.”

“그 때문에 별별 말이 떠돌며 연일 제국이 시끄럽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주의 변고이니…….”

“예. 가주는 일족의 상징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니 소문이 흉흉해질 수밖에요. 한데 여기서 가장 이목을 끄는 건 이 대목입니다.”

주인장은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대 가주를 죽인 자가 현 루하흐 가주다, 라는 부분이지요.”

잘난 형을 질투해서 그를 죽이고 그 자리까지 뺏었다는 게 핵심이었다.

충분히 자극적인 소재라 소문은 쉬이 부풀려지고 번져나갔다.

단물이 빠지도록 씹어대도 흥미진진했으니까.

지고한 자리에 있던 자의 추락이라는 것은 그런 거였다.

그 심리에 기대 소문이 잘 퍼질 줄은 알았으나 예상보다 효과가 더 뛰어났다.

‘실상은 지금부터지.’

이제부터는 이 현상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때가 무르익으면 레브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데, 적어도 그때까진 소문이 살아있어야 녀석에게 도움이 되니까.

마침 주인장의 입에서 녀석의 일이 거론되었다.

“아, 그 불행 속에서 전대 가주의 핏줄이 살아남았다더군요.”

“천만다행한 일이군.”

“사실 생존 여부에 관해선 진짜다, 가짜다 말이 많은데 살아있다면…….”

루하흐의 권력 판도가 바뀔 것이다.

전대 가주의 핏줄이라는 정통성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현 가주가 통치하는 데에 있어 다소 강압적인 편이라 균열은 더 쉬이 일어날 터였다.

연신 떠들던 주인장이 갈림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주절주절 말이 길었습니다. 도련님을 새벽같이 부른 이유가 있는데.”

주인장은 두 갈래 중 왼쪽을 택해 나아갔다.

꼬불꼬불한 복도에는 눈을 피하듯 방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창이 없어 눅진한 은밀함이 풍기는 공간.

내밀한 복도의 끝자락, 묵직한 문 앞에 선 주인장은 찬찬히 문고리를 돌렸다.

“일전에 그러셨지요. 협회장이 그분을 만나면 언질을 달라고.”

“그리 말했지. 내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거든.”

“크흠. 절 구해주셨던 빚을 이제야 갚게 되었습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장이 벽 한쪽에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러자마자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

옆 방의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창.

“내가 여기를 꽤 오래 다녔지만 이런 장소가 있는 줄을 몰랐군.”

“별채의 이 공간은 주로 황족분들만 사용하시니까요.”

“음.”

눈가를 좁힌 이안은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원형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협회장과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순간 젊은 남자의 은발이 그의 몸짓을 따라 거칠게 흔들렸다.

음식을 나르는 점원의 허벅지를 발로 찬 탓.

“감히 내 앞을 지나가?”

절 무시했다고 짜증을 낸 남자는 쓰러진 점원을 잘근잘근 밟아댔다.

뼈를 아작내 버리겠다는 발길질이었다.

“크읏.”

점원의 신음에 더는 안 되겠다는 듯 협회장이 ‘1황자님’이라고 단호하게 불렀다.

그제야 남자는 혀를 차며 패악질을 관뒀다.

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찻잔 받침으로 점원의 신체 어디든 툭툭 쳐댔다.

그의 행패는 점원이 방을 나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실은 말입니다. 저 둘의 만남이 소문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연계되어 있다니.”

“본디 소문이라는 게 그렇지만, 이번만은 미친 속도로 활활 타고 있지 않습니까.”

“흐음.”

“그건 정령사 협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탓이지요.”

주인장은 옆방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1황자의 잘못을 감추려고 부러 시선을 돌린 겁니다.”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협회장은 줄곧 1황자의 패악질을 덮어왔다.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그를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제국 내에서 1황자의 민낯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 말해보라는 이안의 표정에 주인장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1황자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취향이 있지 않습니까.”

“……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좋아하는 거.”

“예. 며칠 전의 일입니다. 12살이었던가, 13살이었던가. 수도로 놀러 온 지방 영주의 딸을…….”

“…….”

“그 때문에 황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황제께서 1황자를 죽이네 마네 하셨으니까요. 황궁 내에선 이를 모르는 이가 없다 할 정도로 난리였습니다.”

“말이 샜겠군.”

“예. 소문이 나면 황가의 명예가 실추되니, 협회장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의 판을 키운 것이지요.”

“의도적으로 가려 덮었단 거로군.”

“그렇습니다.”

주인장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쁜 놈이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호를 받는 게 짜증 난다는 날숨.

오만상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을 이안은 유심히 보았다.

정보 수집만 빠른 게 아니라 분석 역시 예리했다.

흐름을 정확히 읽을 줄 알았다.

잠시 틈이 생기자, 주인장이 긴 대화의 핵심은 이거였다는 양 입을 뗐다.

“흐름이 어지럽습니다. 황가나 루하흐 쪽만 혼탁한 게 아니지요.”

“…….”

“몹시 정적인 살리카 쪽의 동향이 제일 수상쩍습니다. 부랑자나 고아를 납치하는 까닭이 대체 뭔지.”

앉아서 천 리를 보는 주인장다운 발언이었다.

그는 이안이 염려된다는 듯 신신당부를 했다.

“도련님, 무슨 일을 하시든 몸조심하십시오.”

* * *

그 시각 루하흐 저.

“아드리안!”

루하흐 가주는 충혈된 눈으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원수라도 마주친 모양새였지만 접견실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적막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공기.

그것을 뚫는 가주의 카랑카랑함이 공간을 후벼팠다.

“이번에도 날 방해할 심산인 게지.”

“…….”

“뒈져버린 네놈의 아들까지 끌고 와 별 같잖은 소문을 내?”

“…….”

“그런다고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 같으냐. 웃기는 소리!”

가주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댔다.

그걸로는 성에 안 차는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내던졌다.

화려한 융단을 물들이며 깨지는 와인병들과 물잔들.

째지는 파열음이 끊이지 않고 줄을 이었다.

가주의 발광이 도를 넘어가던 차.

단박에 그 흐름을 끊으려는 듯, 가주의 귓가로 낭창한 음색이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불러도 대꾸가 없는 겁니까.”

“……아.”

가주의 시선이 문가 쪽으로 향했다.

미형의 남자가 자색 연꽃 문양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가주는 남자의 손부터 확인했다.

산호 껍데기가…… 들려있지 않았다.

선물이라며 항상 가지고 오더니 두 달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가주는 떨리는 손을 누르며 남자를 응시했다.

“산호 가루는.”

“얼마 전 바닷길이 막히면서 조금…….”

“이번에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얘기군.”

가주는 남자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잘라버렸다.

그러더니 목이 타는지 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달달 떨며 잔에 물을 따랐지만, 조준에 실패하고 탁자만 흥건해졌다.

그것이 짜증 나서 가주는 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성마른 모습에 남자는 남몰래 비소를 머금었다.

‘어리석은 놈.’

현재 가주는 소금물을 마시는 것처럼 갈증이 일 것이다.

산호 가루를 장장 5년 넘게 복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본디 이것을 1년만 복용해도 인간의 몸은 사막화가 된다.

끊임없이 물을 갈구하게 된다는 의미.

한 마디로 물 밖을 나온 물고기 신세라는 것이다.

‘온당한 계승자를 죽였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남자의 눈이 일순 번득거렸다.

그렇다고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는 하수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 지정석인 가주의 옆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찰나의 정적.

그것을 삼킨 남자는 말꼬리가 잘렸던 얘기를 끌고 왔다.

“여기 산호 가루입니다. 가주님을 위해 제가 어렵사리 구해왔지요.”

구했다는 얘기에 가주의 동공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어서 내놓으라는 재촉이 뒤이어졌다.

이에 남자가 산호 껍데기를 무심히 건넸다.

뺏듯이 받아든 가주는 산호 가루를 욕심껏 입에 털어 넣었다.

그것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별일 없었다는 양 차분히 입을 뗐다.

“항간에 퍼진 소문 말일세.”

“무척 불미스러운 말이 떠돌더군요.”

“전부 날 시기하는 자들이 지어낸 말이지. 내 조카가 살아있다면 자네가 모를 리 없잖은가.”

“그렇지요.”

“망할 놈들. 내가 첫째가 아니란 이유로 못 미더워하면서 사사건건 날 깎아내리려 하는군.”

“…….”

“하니 자네도, 자네의 일족도 그에 관해선 신경 쓰지 말게.”

뻔뻔함이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시치미를 떼다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남자의 뇌리로 엊그제 일이 떠올랐다.

레브와 수장이 긴한 대화를 나누던 때가.

<시온 그대는 숙부가 잘못했다고 빌며 매달리면 어찌할 것인가.>

수장의 물음에 레브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일 수 있는 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지요. 그런 놈에게는 자비를 베풀 까닭이 없습니다.>

레브의 말마따나 루하흐 가주는 제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자였다.

매사 남 탓을 하며 그것을 핑계 삼아 자신을 합리화한다.

정말이지 이자는 고고하지 못했다.

전대 가주 때문에 가주가 못 된 거라고?

아니, 이자는 만약 첫째로 태어났어도 결단코 가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릇이 소스를 담는 종지보다 작은놈인데 무슨.

일찍이 알고 있던 바이긴 했으나 오늘따라 그 사실이 깊게 와 닿았다.

‘온당한 후계자도 찾았으니…….’

남자는 때가 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지루한 연극을 그만 끝낼 때가 됐다고.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가주가 얄팍한 눈을 부릅뜨며 은근하게 압박을 가해왔다.

“수장께선 아직이신가. 내게 낙인이 없으면 순환은 이루어지지 않거늘.”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바닷길 문제로 수장님께서 정신이 없으십니다.”

“루하흐가 바다가 되지 못하면 에드레이 나일이 어찌 될지 알면서. 바쁘더라도 짬을 내시라 전해주게.”

“기다리면 조만간 연통하신다 하셨습니다.”

“어쩐지 시간을 질질 끄는 것 같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 그렇다 해도 어차피 대안은 나뿐일 터인데.”

가주는 가주로서의 위엄을 적절하게 내보였다.

이럴 때 보면 참 말짱하고 예리하다.

산호 가루를 먹지 못해 중독 증상에 시달릴 때는 그냥 미친놈처럼 보이는데.

그 차이가 우스워 남자는 조소를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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