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지금쯤이면 이안 그 아이, 살리카에 당도했겠군.”
오쿨루스는 뭔가를 끄적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앳된 목소리가 꼬리를 물듯 붙따랐다.
“그렇겠지. 가주 회합이 오늘부터이니.”
소리의 진원지로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틀어졌다.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책장 앞.
이마에 주름을 기운 채 초대 황제가 책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 아이의 여정도 오늘부터 시작이겠군. 안 그래, 라에라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나?”
“묻길 뭘 물어. 달랑 라세르타란 단어 하나 던져줬는데.”
“단서를 흘린 것은 오쿨루스 그대일세.”
“하. 내게 그런 역할을 맡긴 것은 라에라트 그대지.”
사실을 콕 집은 오쿨루스는 젖살 말랑한 초대 황제를 직시했다.
감정이 넘치는 듯 무감한 눈동자.
그 오묘함에 오쿨루스의 시선이 절로 아래를 향해 미끄러졌다.
황제의 작은 손 아래에 놓인 두툼한 책…….
그걸 펼쳐 들 때마다 황제는 늘 저런 표정을 지었다.
“라에라트 그대로선 최대한의 도움을 준 것이지만, 수수께끼를 쫓아야 하는 쪽에선 달갑지 않을 걸세.”
“인과를 어그러트리지 않으려면 개입은 최소한으로 해야 하네.”
“그놈의 인과. 그를 위해 취한 것들이 후회로 남지는 않는가.”
“후회?”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면 초대 황제인 그대가 그 꼴로 말로의 탑의 망령이 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그러지 못해 이 꼴인 것을 어쩌겠나. 그래도 후회는 없네.”
“흐응.”
오쿨루스는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백 번을 물어도 언제나 똑같은 대답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수 세월 간 한 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을 수 있는지.
고지식도 저런 고지식이 없다.
“라에라트 난 후회한다네.”
“오쿨루스 그대가?”
“맛있는 꿈에 낚여서 천 년 넘게 고생할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 후회하는 것인가? 흐음. 그럴 리 없을 텐데.”
“하앙? 예언자라고 남의 마음까지 속단하는 거야?”
“나와 달리 그대는 원하면 언제든 그라나토스를 자유로이 벗어날 수 있지 않나.”
“그 자유에도 황가를 감시해야 한다는 임무가 대롱대롱 달려있는데 뭘.”
“가암시? 그대가? 사리사욕을 챙긴 건 아니고?”
“사리사욕이라니.”
오쿨루스의 발뺌에 초대 황제는 그녀가 끄적거리던 무언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능글능글한 표정은 덤이었다.
“그거 말일세, 그대가 쓰고 있는 그거.”
그 고갯짓이 가리키는 곳으로 오쿨루스의 청록색 동공이 굴러갔다.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 Ⅳ』
“크응. 이건 사리사욕이라기보다…….”
“녹스를 꼬시기 위한 미끼지. 장장 천 년간 준비한.”
“흘흘흘.”
오쿨루스의 음흉한 미소가 수선하게 내려앉자 야설의 붉은 표지가 들썩거렸다.
오직 한 명만을 위한 책.
극도로 저를 경계하는 녹스를 무장해제 시킬 비장의 무기.
수호자를 낚을 회심의 역작이 드디어 출정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출간일이 한 달 뒤이던가?”
“영상석 때문에 지난번에 엎어지지만 않았어도 진즉 녹스의 품에 안겼을 터인데.”
오쿨루스의 들뜬 낯이 동동 떠다니자, 초대 황제의 입술도 함께 피식거렸다.
“그대의 노력도 참 가상하이. 번번이 그 녀석의 취향에 맞는 작가가 되다니.”
“크흠.”
“그 녀석은 여즉 모르지? 자기가 여태껏 좋아하던 작가들이 전부 그대라는 것을.”
“쉿. 비밀일세. 최소한 출간일까지는.”
“출간일에 그 녀석 뒤집어지겠군. 그 표정을 내가 기필코 봐야 하는 건데.”
초대 황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필시 배꼽 빠질 명장면이 도출될 것이다.
하나 탑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니 그런 것도 생눈으로 목격할 수가 없다.
그래도 별수 있나.
“어쨌든 얘기라도 듣고 싶으니 어서 책을 마무리 짓게.”
“에휴.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줄 알아.”
“글이야 그냥 쓰면 되는 것을.”
“흥. 창작의 고통을 그대가 알 리가 없지.”
오쿨루스는 천년을 묵힌 것 같은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밖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인간들의 꿈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제 책을 좋아하는 녹스는 달콤한 보상이었고.
분명 두 달, 아니 석 달 전만 해도 그러했었다.
한데…… 지금은 통 영감이 떠오르질 않는다.
샐쭉거린 오쿨루스의 눈길이 초대 황제가 쥔 책으로 향했다.
“나도 글이 자동으로 써지는 책을 갖고 싶군.”
“하하핫. 이런 특별한 책은 아무나 가질 수 없지. 주인공을 위한 거니까.”
초대 황제는 복잡다단한 손길로 검은 벨벳의 표지를 쓸었다.
창백한 손이 옆으로 지나갈 때마다 금박의 제목이 서서히 드러났다.
‘난쟁이가 야매 정령사로 살아가는 법’
황제는 책, 아니 예언서를 탁자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책장이 절로 넘어가며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여백을 드러냈다.
* * *
살리카 종가에 있는 대회의장.
‘분위기가 아주…….’
이안은 회합이 열리고 있는 대회의장을 훑었다.
기다란 탁자에 띄엄띄엄 앉아 있는 가주들.
그들의 표정이 짜기라도 한 듯 지극히 건조했다.
생판 남을 만났어도 이보다는 살갑겠다 싶을 정도였다.
특히 살리카 가주.
원래가 목각 인형처럼 메마른 자인데 오늘은 유독 일말의 온기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그의 냉기에 먼지마저 어는 것 같을까.
그 차디찬 시선이 아버지와 발리올 가주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떻게든 속내를 읽어 내려는 것.
그건 아버지와 발리올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물밑의 탐색전은 소리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이 와중에 거리를 두고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루하흐 가주.
‘저잔 내리 관망만 하는군.’
세 명의 가주를 번갈아 보며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하기 힘든 침묵이었다.
아마 여기저기 퍼진 독살 소문에 관해 고심하고 있을지도.
우두머리들이 이럴지니 수행원들의 분위기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같이 제 주군의 심기를 살피느라 뭣 빠지게 바빴다.
“각 영지의 관문을 통과할 때 내는 통행세는…….”
치열한 눈치 싸움 중에도 회의는 순탄하게 굴러갔다.
가주 회합은 1년간 각 영지의 외교에 관한 전반을 다루는 회의였다.
여기서 통행세라던가 관세 같은 것이 조율이 안 된다?
그러면 1년 내내 크고 작은 분란이 지지치 않고 일어난다.
각자의 꿍꿍이를 품고 치열한 공방이 오가길 세 시간.
“결론이 나지 않으니 식사 후 다시 얘기하세.”
아침부터 시작된 회합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일단락되었다.
삼삼오오 모여 1층의 식당으로 이동하는 무리의 틈바구니.
‘난 이 틈에 돌아다녀 봐야겠다.’
이안은 다른 이들과 달리 아예 별채의 대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이거 도마뱀 천지군.”
별채에 꽂힌 깃발부터, 문, 담벼락, 건물까지 도마뱀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찾으라고.
눈썹머리를 문지른 이안은 느릿한 발걸음을 옮겼다.
잘 정돈된 돌길을 걷는 내내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같은 단어가 되풀이되었다.
―라세르타, 라세르타…… 도마뱀 자리.
그에 맞춰 어깨 위에 내려앉은 텔로스가 청아하게 우짖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스가 속살거린 거였다.
[완전한 문장은 라세르타가 시작되는 곳에서 실체를 잘 들여다보라는 거였다.]
―곱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짜 광범위하다.
[그게 광범위한 정도니? 살리카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특정을 지어보재도 생각보다 여러 곳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너무 동선이 확실한데? 너 지금 본관으로 가는 거지.]
―그나마 가능성이 제일 큰 곳이니까. 시간이 많지 않을 땐 선택과 집중을 해야지.
[하긴. 가주 회합이 닷새이니 그 안에 매듭을 지어야 할 터.]
앞을 응시하던 녹스가 머리통을 요리조리 흔들었다.
[한데 보안 문제로 본관 주변을 막아버려서 가도 소용없을 텐데.]
―멀리서 정탐 좀 해보려고. 눈에 익게.
[본관은 클로에가 조사해준댔으니 무리하지는 말고.]
―어. 내 동태를 주시하는 것들도 있는데, 꼬리 잡혀서 일을 망칠 생각은 없어.
감시자들이 그를 밀착 감시 중이었다.
이는 그만큼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관건은 그들을 얼마나 잘 따돌리고, 속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안의 보폭이 움직임을 멈췄다.
저 멀리 본관이 보였다.
―저기를 들어가 보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본관에 비밀 서고가 있어서?]
-가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동쪽 관리자가 한 말은 몹시 모호했다.
그 말만 따라가다간 살리카의 지박령이 되도 단서를 못 찾을 것이다.
하니 이정표가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비밀 서고엔 있을 것 같았고.
* * *
가주 회합 1일 차의 야밤.
살리카의 장로들이 사는 구역의 외곽에서 낯선 인기척이 났다.
그 인기척에는 긴장과 경계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최대한 은밀히 움직이던 포동포동한 인기척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녹스의 물음에 이안은 옅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미지고 외진 공터에는 아주 오래전에나 썼을 법한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 물길이 말라버린 지하 수로가 있었다.
벽에 붙은 이끼마저 바스라지는 게 사용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으면 눈에 띄니까 일단 들어가자.
[아, 그러자꾸나.]
이안과 녹스는 얼른 지하 수로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텁텁하고 건조했다.
그 덕에 바닥이 바싹 말라 오히려 발소리가 잘 감춰졌다.
둘은 숨마저 죽인 채 좁고 어두컴컴한 곳으로 나아갔다.
휘청거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이 수로가 살리카의 본가와 이어져 있댔지?]
“어. 정확히는 비밀 서고와.”
[그렇다면 곧 가주에게만 허용된 자료들을 볼 수 있겠구나.]
“맞아. 비기, 건축 도면, 밀서, 계약서 그런 것들을 훑으면 라세르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도.”
[이럴 때 보면 회귀한 티가 난단 말이야.]
“누구보다 열심히 굴러먹은 대가지.”
[한데 이 지하 수로 말이다. 살리카 가주를 암살할 방법을 찾으려고 이것저것 파보다 우연히 알게 된 거랬지?]
“그 당시에는 다들 필사적이었어.”
전쟁이 끝나려면 살리카 가주가 죽어야 한다.
당연한 명제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을 자처했다.
그자에게 접근할 방법만 찾으면 남은 사람들이 살 수 있으니까.
불확실한 희망이지만 그렇게 불나방처럼 몸을 던졌었다.
“너무 늦게 발견해서 결국은 써먹지도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활용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누.]
“그러게.”
조용조용 말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수로의 끝이었다.
막다른 곳에는 흙벽밖에 없었다.
이안은 흙벽으로 손을 뻗어 조심히 쓸어 보았다.
손끝을 따라 얼굴 모양의 부조가 드러났다.
[이곳을 지키던 수호령인가 보구나.]
“발길이 끊기면서 동력원을 잃고 석화가 됐네.”
수로 곳곳은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수호령과 방어 결계 모두 손길을 받지 못해 풍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제 어디로 가누?]
이안은 대꾸보다 먼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이 위쪽이 바로 비밀 서고야.”
[위쪽? 허. 이리 간단히 비밀 서고까지 올 수 있다니]
녹스는 훌쩍 날아 천장의 이쪽저쪽을 눌러보았다.
혹 특별한 비밀 장치가 있을까 했으나 그냥 벽일 뿐이었다.
[별다른 장치도, 결계도 없는 것을 보니 천장만 뚫으면 진입할 수 있겠구나.]
“뚫지 않아도 들어갈 방법이 있잖아.”
[대지의 입맞춤? 오호. 대지를 개방하자마자 이리 써먹게 되는군.]
대지의 입맞춤.
벽을 통과해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이다.
단, 텔루륨이란 암석으로 만든 벽에 한해서이다.
그리고 비밀 서고는 대개가 텔루륨을 이용해 지어진다.
술식이 잘 새겨지고 오래간다는 특징으로 인해 애용되는 것이다.
[준비해라.]
녹스는 이안의 팔을 꽉 잡고 그를 천장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주 서서히.
위산에 녹는 것처럼 스며들며 둘은 이전의 장소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삽시간에 목적지에 입성했다.
“후우.”
이안은 울렁증을 가라앉히려 숨을 내쉬었다.
채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1년처럼 느껴지며 온몸이 욱신거렸다.
[조금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게다.]
“생각보다 기술이 세네.”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에 이안은 비밀 서고를 휘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한눈에 담아질 만큼 크기가 작아서 자료가 그닥 많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다행이었다.
자료가 많으면 찾는 데만 해도 한세월일 테니까.
“찾아보자.”
[라세르타라는 단어가 포함된 글귀 혹은 도마뱀 모양의 별자리를 찾으면 되겠지?]
“어, 일단은.”
이안과 녹스 그리고 사냥개는 재빨리 흩어졌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는 각오로 셋은 자료를 움켜쥐었다.
책이든 건축 도면이든 양피지든 그게 뭐가 되었든 모조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