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그 시각 살리카 가주의 집무실.
“그동안 눈뜬장님이었군.”
살리카 가주는 가주들이 머무는 별채 쪽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생애 처음으로 감정의 폭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새끼 늑대의 기운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깨달아서다.
오늘 본 이안의 기운은…….
제가 데리고 있는 새끼 쥐, 라이라프스와 닮은 게 아니라 완벽하게 똑같았다.
전에는 이란성 쌍둥이 같았다면 지금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인달까.
“진정…… 새끼 늑대가 진짜라면.”
삐걱대며 맞지 않았던 조각들이 전부 설명이 된다.
라이라프스의 성장이 더딘 것도.
심장을 갈라 확인해 본 마력핵이 어딘가 이질적이었던 것도.
놈이 제 계획을 예측한 듯 사사건건 가로막은 것까지 모조리 말이다.
평소와 다른 가주의 상념을 지켜보며 수호검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결국 라이라프스가 가짜라는 말씀이십니까.”
“빤히 보이는 것을 내게 질문하는군.”
“죄송합니다.”
“뷔트시겐의 피라면 누구보다 알과 가까운데, 그간 잊고 있었다니.”
“아, 그 피…….”
그제야 수호검은 저 역시 망각하고 있던 것을 상기해냈다.
그 피가 어떤 피던가.
지고에 가까운 완벽한 피였다.
“까마득하게 오래전의 일이 아닙니까. 누구도 쉬이 떠올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변명들이 실수를 만들고 무능을 만드는 것이지.”
“…….”
가주의 신랄한 면박에 수호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딱히 가주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 생각에만 골몰할 뿐.
“그 알 덕에 예지도 가능한 것일 터.”
“조건을 갖출 시 북쪽 관리자와 결속을 맺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빛의 정령이라면 능히 설명되지.”
말을 덧댈수록 그는 제 실수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일을 그냥 넘긴 것이다.
적어도 수도에서 마주쳤을 때 눈치채고 싹을 잘랐어야 했다.
그런 후회가 스쳤다.
하지만 그것을 곱씹거나 되새김질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제 입맛에 맞게 고치면 될 터.
“흠. 점심 이후 새끼 늑대의 동선은.”
“클로에 님을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눈 후 저택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갔다?”
“예. 종려나무의 지저귐이란 여관에 들어간 뒤, 그곳의 칼조네가 일품이라며 걸신들린 것처럼 먹고 있다 합니다.”
“흐음.”
종려나무의 지저귐은 고급 여관이 아니었다.
근무를 끝낸 보초병이나 값싼 곳을 찾는 여행자가 들르는 하급 여관이지.
그런 곳에서 뷔트시겐의 적자가 음식을 먹는다?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이나,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고 다니는 게 이안 뷔트시겐이었으니까.
미식에 환장해 맛있는 거라면 똥이라도 주워 먹을 인간, 그게 이안이었으니.
살리카 가주는 별채 쪽으로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평상시와 같으나 이조차 의심해봐야 한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신중히 다뤄야 할 때였기에.
“일대의 순찰을 강화하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게 잘 따라붙어.”
“명 받잡겠습니다.”
“그리고 클로에는…….”
가주가 무어라 작은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에 수호검이 토씨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상체를 깊이 굽혔다.
어떤 지시든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결연함이 배어 나왔다.
그 심상을 타고 가주의 집무실의 밤이 깊어갔다.
* * *
수행원으로 온 것이라 가주의 곁을 떠나는 단독 행동이 길면 안 된다.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해서 이안의 개인 시간은 점심 혹은 저녁 이후 몇 시간이 다였다.
여관 한편의 작은 방.
“수고 좀 해줘, 리오.”
이안은 나갈 채비를 하며 슬금슬금 일어섰다.
“아닙니다. 마땅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것뿐입니다.”
“제 할 일을 다 하는 거, 그게 수고한다는 거야.”
이안이 고맙다는 뜻을 담아 리오의 어깨를 가벼이 짚었다.
그 도닥임에 리오가 옅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감시자들의 눈을 꽉 붙들고 있을 테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살리카 그것들 빡세게 굴리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면서.”
“예.”
리오의 역할은 단순했다.
이안에게 붙은 눈들을 떼어내는 것.
이게 좀 어려워 보여도 생각보다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선입견을 이용하면 되니까 말이다.
개인 호위는 절대 주인의 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리오가 내 개인 호위인 것을 모르는 자는 없으니.’
씨익 웃은 이안은 공중을 유영하는 대지 정령을 쓰다듬었다.
―도플갱어.
이안의 지시에 대지 정령이 기분 좋게 폴짝거렸다.
발랄한 몸짓을 보이다 녀석은 점차 이안과 똑같은 형상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몸이 사라지며 투명해졌다.
대지 정령이 기술을 쓸 때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
이 틈에 여관을 빠져나가야 한다.
투명화가 끝나기 전 얼른 후두를 쓴 이안은 여관을 나섰다.
일대에 순찰대가 쫙 깔려있었다.
여관만 노려보고 있는 꼴이 제가 뭘 하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어제보다 순찰 인원이 늘었다.
[하여간 질긴 도마뱀 새끼.]
―어휴. 꼴도 보기 싫다. 어서 가자.
[그러자. 이러다 도마뱀 새끼가 뭐라도 눈치챌지 모르니.]
둘은 어제 보지 못한 자료를 마저 보기 위해 서둘러 비밀 서고로 향했다.
침입 방법은 똑같았다.
벽을 통과해 서고에 들어간 이후 지체하지 않고 자료를 읽어내려갔다.
“라세르타를 언급한 게…… 하나도 없다.”
[이안, 여기서 최악은 뭔 줄 아누?]
“우리가 이 서고에서 실마리를 못 찾게 되는 거?”
[으억! 다음은 생각하기도 싫다. 살리카 전역을 어찌 뒤져.]
“일단 밤새 찾아보고…….”
말꼬리를 끊은 이안은 들고 있던 자료를 쥔 채 기감을 세웠다.
아까부터 어떤 소리가 귀에 거슬리며 자꾸만 달팽이관을 쑤셔대서였다.
왠지 무시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해서 미세한 속삭임에 집중했더니.
타박타박.
어느 사이…… 발밑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찰대에 의해 지하 수로가 발각된 것이다.
이안과 녹스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움직임을 멈췄다.
두꺼운 흙벽에 가로막혀 소리가 뭉개졌지만, 말의 알맹이는 똑똑히 들렸다.
“이런 곳에 지하 수로가 있었네.”
“가주님께 보고하자. 하나라도 놓쳤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까.”
“아까 발견한 하수도도 같이…….”
연신 저들끼리 떠들던 순찰대의 발걸음이 멀어져갔다.
보고하러 가는 길일 터.
그간 발견치 못했던 지하 수로가 있었다고 하면 필시 살리카 가주가 올 것이다.
곧 닥칠 섬뜩한 현실에 넋 빼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졌다.
이안과 두 정령은 더욱 분주해졌다.
[보고하고 어쩌고 넉넉잡아도 1시간밖에 여유가 없다.]
“1시간.”
이안은 마른 목을 축이며 자료를 속독했다.
라세르타, 혹은 도마뱀자리.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동안 점차 시간이 줄어들어 갔다.
50분, 40분, 30분…… 그렇게 어느덧 10분.
더는 미적거릴 수 없어 나가는 게 좋겠다 싶던 때였다.
새것인 듯 유난하게 광택이 나는 양피지가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녹스, 이거…….”
[아이고, 수로 입구에 순찰대가 더 늘었다.]
바깥에 집중하느라 녹스는 이안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저 멀리, 조용하던 입구에서 말소리가 불어나고 있는 탓이었다.
[안 되겠다. 그만 나가자.]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고를 나와 수로의 어둑한 길을 되짚어 나가는 길.
둘은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침착하게 움직였다.
얼추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이안은 벽에 바싹 붙어 바깥쪽을 살폈다.
어스름하게 보이는 그림자 일곱.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그들의 뒤태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여기서 들통나면 뭣 되지.’
살리카의 비밀 서고에 침입한 뷔트시겐의 적자라니.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곤란해질 사람은 당연하게도 수장인 아버지였다.
로토투아가 처음이라 관광하다 보니 여기였다?
그런 우스운 변명이 먹힐 리 없잖은가.
의도를 추궁당할 테고, 그 과정에서 살리카가 어렴풋이라도 제 목적을 눈치챈다면.
‘그것만큼 최악은 없지.’
이안은 밀려오는 속삭임을 들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녹스, 저들의 눈을 돌리자. 불을 일으켜서.
[호오. 살리카 영역에서 불이라……. 맞불 작전이로구나.]
이안과 녹스는 마주 보며 얄궂은 미소를 띠었다.
그 후 네 맘이 내 맘이라는 듯 동시에 바닥을 내리쳤다.
즉각, 수로와 다소 떨어진 공터에서 콰르릇 하는 굉음이 나며 땅이 갈라졌다.
“어?”
벌어진 틈에서 용암이 분출되자마자, 보초병 일곱이 한꺼번에 시선을 돌렸다.
의도가 먹혔다.
저들이 한눈을 판 이때가 기회였다.
이안과 녹스는 사냥개의 은신에 기대 지하 수로를 재빨리 빠져나왔다.
한데 얼마 안 가 또 보초병 넷과 마주쳤다.
좁은 길을 게걸음 쳐 빗겨 가는데 그들의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혹여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발소리를 더욱 죽였다.
그렇게 최대한 길가로 붙은 찰나…… 보초병의 고개가 움직거렸다.
“…….”
이쪽을 보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곳곳에 포진된 보초병들을 피해 가까스로 좁은 길을 벗어났다.
흔적을 남기진 않았으나 안심할 순 없었다.
용암 폭발로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기 때문.
이안은 인파에 요령 있게 섞이며 은신을 해제했다.
이런 순간엔 은신하는 게 더 수상쩍어 보이니까.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면 되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던 차.
“불구경 나온 건가.”
누군가가 이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 * *
……살리카 가주.
발소리를 듣지도, 기척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심장이 쿠웅 소리를 냈지만 이안은 건조하게 뒤돌아섰다.
“아, 가주님. 새벽 산책이라도 나오신 겁니까.”
“여기 좀 봐달라 성화를 부리니 봐줘야지 않겠나.”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용암이든 불벼락이든 결국 본질은 불. 저 화산을 일으킨 자에게서는 살리카의 냄새가 나질 않는군.”
귀신이었다.
가주의 탐색을 단 채로 이안은 화산 진압 현장을 보았다.
치안대가 화산을 조정하고 있었다.
합을 맞춰 하나처럼 나아가는 손짓에 화산은 순한 강아지가 되었다.
점차 수그러드는 화산.
역시.
이안의 예상대로 별 피해 없이 끝이 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살리카 가주와 무난하게 헤어지는 거였다.
어쩌나 싶던 그때.
“도련님.”
시기적절하게 알란과 그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 찾았는데 여기 계셨냐는 표정을 하고선.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알란은 공손히 살리카 가주에게 묵례를 했다.
예의를 갖추되 이안에게 향한 신경을 거두지는 않았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때라 돌아다니는 것은 이해하나, 자칫 무례가 될 수 있으니 적당히 하란 질책을 담으셨습니다.”
상대가 물고 늘어지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친 거였다.
‘우리 애가 좀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내가 사과할 테니까 그냥 넘어가자. 좀스럽게 걸고넘어지지 말고.’
가주의 속뜻을 넌지시 내비친 거랄까.
여기에 말을 보태게 되면 좀스러운 인간이 되는 거였다.
좀스러운 인간.
그런데 어디 살리카가 그런 것을 신경 쓸 인사던가.
이를 무시하고 가주가 서늘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럴 나이지. 다리 뻗을 곳을 모르는 치기는 자칫 목숨줄을 끊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의 그 마음, 제 가슴 깊이 새기며 간직하겠습니다.”
공손한 응대였으나 뒷맛이 깔끔하지 않은 대꾸였다.
이에 슬쩍 눈살을 구긴 가주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만난 김에 벗의 아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줘야겠군.”
“…….”
“어느 둥지에 새가 열 마리 있었네. 아홉은 뜻이 같았는데 하나가 뜻이 달랐지.”
“하나만 말입니까.”
“그 하나. 그것이 둥지를 망치려 드니 별수 있나. 날개를 부러트려 절벽 아래로 밀어트릴 수밖에.”
생뚱맞은 이야기였다.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얘기일지라도 이안만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뜻이 다른 하나…… 클로에 교수님을 일컫는 거였다.
즉 교수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
대체 왜 교수님을.
무슨 목적으로.
머릿속이 바쁜 이안을 두고 가주는 먼저 가겠다며 멀어져 갔다.
냉기 날리는 뒤태를 보길 잠시간.
이안은 뇌까리듯 클로에 교수의 행방을 물었다.
“알란, 클로에 교수님은?”
“최대한 빨리 계신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살리카 가주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자였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이안은 서둘러 살리카 가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