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도련님!”
코앞에서 광원이 번쩍 튄 순간.
알란과 호위대가 주저 없이 이안을 감싸 안았다.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붉은 화마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건물의 뼈대.
그것들이 주마등인 양 느리게 시야를 장악했다.
“…….”
처참하게 밟혀버린 공간, 그를 직시하는 이안의 입매가 비틀렸다.
저를 잡으려 수를 쓸 줄은 알았지만, 건물을 통째로 폭사시킬 줄은.
참으로 과분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과한 접대에는 그에 걸맞은 응대를 해야 하는 법.
이안은 살리카를 비웃듯 세 가지 원소를 단숨에 불러냈다.
손바닥 위에서 뱅글뱅글 도는 사각의 원소들.
그것들이 한 몸처럼 한데 뭉쳐지자 그는 가차 없이 손바닥을 내리그었다.
몽글몽글 맺히던 피가 흥건하게 원소를 적심과 동시에, 이안이 손을 뒤집어 그것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팽그르르.
피를 머금은 원소가 바닥에 퍼지며 빠르게 회전했다.
그 즉시, 발밑이 늪인 듯 쑤욱 하고 꺼졌다.
제 자리뿐 아니라 알란과 호위대, 그리고 클로에 교수의 발치까지 예외가 없었다.
털퍽.
삽시간에 신발 밑창이 차가운 지면에 닿았다.
그러자마자 이안은 만사 제쳐두고 일행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했다.
“다들 괜찮아?”
난데없이 어딘가로 이동된 것 때문인지 대답 대신 약간 얼이 빠진 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대체.”
“밀실.”
“밀실이요?”
이안의 단답에 알란이 얼른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신들만으로 꽉 차는 공간은 환하고 조용했다.
위에선 건물이 무너지고 그 잔재가 사방으로 튀며 난장판인데, 이곳만 마치 다른 세상인 양 평온했다.
꼭 무언가가 보호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흡사 어미 닭이 품은 알이 된 것 같았다.
안전하단 생각이 들자 알란의 시선이 어느덧 이안에게 가 닿았다.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뭔가 희한했다.
암호를 척척 풀었던 것도 그렇고, 연구소 밑자락에 이런 밀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그렇고.
살리카와 아무 연고도 없는 분이 어찌 이리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도련님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또 내 매력이잖아. 매력을 즐겨.”
“하하핫. 근데 정말 궁금해서 말입니다. 여기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알?”
알란의 이글거림에 이안이 웃으며 녹스를 보았다.
사실 이 밀실을 알려준 건 녀석이었다.
목적지가 렐리혼 연구소인 걸 안 직후, 귀가 따갑도록 주입 시켰더랬다.
<너도 알다시피 살리카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미친놈은 네가 대비한다고서 해서 대비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란 뜻이지.
해서 하는 말인데, 혹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거든 하나만 명심해라. 거기에 밀실이 있다는 거. 알았누?>
연구소 밑에 밀실이 있으니 살리카가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었다.
이 밀실은 초대 황제가 만든 것이었다.
몰래 만들고 녹스에게 찾으라고 했던 것 중에 하나.
녹스로선 번번이 성가셨다고 했는데 이게 또 이렇게 쓰일 줄이야.
이안은 녹스의 머리통을 박박 문지른 뒤 말문을 열었다.
“자고로 적진에 걸어들어올 때는 만 가지 대비책이 있어야지.”
“지당하십니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린 알란은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밀실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어떤 곳에도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에 갇혀버린 듯했다.
“한데 도련님, 여기서 어찌 나가야 합니까.”
“알란, 그 기술 쓸 수 있지. 고양이 울음.”
“예. 여덟 명이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럼 그걸 써서 상업 지구 북쪽에 있는 플랑드 언덕으로 가자.”
고양이 울음은 순간 이동기이다.
자신 외에 3~4인을 같이 이동시킬 수 있는.
알란의 경우는 이 기술에 많은 공을 들여 최대 10인까지 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발동이 느리다는 단점까진 아직 보완하지 못했지만.
“맡겨주십시오.”
말을 마친 알란은 속히 자신의 번개 정령을 꺼냈다.
나오자마자 알란의 다리에 비비적거리는 삼색 고양이.
알란이 녀석의 등을 쓸어내리자, 고양이가 길게 울음을 내뱉었다.
그 울음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내내 녀석은 무리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질주가 끝나며 빛무리가 임과 동시에.
스슷.
밀실에 있던 모두가 밖으로 신속히 이동되었다.
렐리혼 연구소에서 100미터가량 떨어진 곳으로.
안전이 확보된 즉시였다.
“알란, 교수님이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으시니까 먼저 안전 가옥에 모셔다드려.”
“예.”
칼답을 한 알란은 이번 역시 옆의 수하에게 명을 내렸다.
호위대 한 명이 클로에를 부축해 떠난 직후.
렐리혼 연구소가 무너졌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연구소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걸 본 이안은 걸음을 틀며 말문을 열었다.
“일단 자리를 뜨자. 살아있는 걸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
당장은 제가 죽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어야 여러모로 유리하다.
그래야 감시망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안의 발길이 어느새 인적 드문 언덕배기에 다다랐다.
야트막해도 언덕이라 시가지가 잘 보였다.
이안은 렐리혼 연구소가 있던 상업 지구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반대편에 있는 정령사 지구로 고개를 돌렸다.
“알란,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정오가 되기 직전입니다.”
“음. 이제 곧.”
정령사 지구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
어느 방향에서 봐도 항상 눈길을 사로잡는 유구한 역사물, 키리움 연구소.
이안의 청회색 동공이 고장 난 시계인 양 키리움에서 딱 멈췄다.
마치 그것이 시발탄인 듯.
콰아아아아앙!
키리움이 엄청난 폭발에 휩싸였다.
건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남은 건 오직 먼지 폭풍뿐이었다.
정처 없이 흩날리던 흙먼지들, 얼마 안 가 그것들은 이안이 서 있는 곳까지 불어닥쳤다.
“이제 더는 연구를 못 하겠지.”
“몇백 년에 걸친 자료가 날아갔으니 그렇겠지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이보다 완벽한 피날레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인데 완벽한 거야 당연하지.”
최초의 실험실이며 핵심 자료가 집약된 키리움 연구소.
이것의 폭발은 애초 예정된 일이었다.
살리카가 진행하는 밑 작업 중 실험실은 굵직한 수라,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던 일이었으니까.
“이제 그만 가자.”
“파호이로 말입니까.”
“어. 양 날개가 터져 바쁜 지금이 적기지. 그곳을 뒤질.”
* * *
수십 분 후 파호이 산.
목적지에 도착한 이안은 산자락에서부터 꼭대기까지 훑어 올라갔다.
역대 살리카 가주들의 무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 그런지 강대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성지라서 그런가 다르긴 다르구나.]
“역대 가주들의 마력이 녹아있으니 그렇겠지.”
[그래봐야 뷔트시겐의 무누스 설산만 못 하다.]
“오호. 우리 스승님 이제 뷔트시겐 다 되셨네.”
이리 어수선한 때 굳이 남의 조상 무덤에 찾아온 이유가 뭐겠는가.
어제 비밀 서고에서 발견한 광택 나는 양피지 때문이었다.
이안은 각종 기호가 즐비한 양피지, 아니 도면을 펼쳐 들었다.
“녹스 봐봐. 이 도면 중앙에 그려진 커다란 아치형 문 보이지.”
[문 한가운데 도마뱀 모양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구나. 어째 수상한 냄새가 난다.]
“그지. 딱 봐도 실마리 같지.”
[어. 홈이 뚫린 곳마다 비싼 보석으로 치장해 둔 것만 봐도.]
“빨리 가서 확인해 보자.”
[서두르자. 초대 가주의 무덤이라 꼭대기에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니.]
둘은 목적지를 향해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뭐가 말이냐.]
“보통, 가주의 무덤이 있는 산은 참배객 때문에 어떤 장치도 안 해 놓잖아.”
[살리카 뿐이냐. 뷔트시겐도 그러하지.]
“그러니까 고생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어서 좋다는 거지.”
개고생은 사절이었다.
왜 임무를 하면 고생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는지 모르겠다.
뭐든 몸과 마음이 고되지 않은 선에서 소득을 얻는 게 최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안은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후텁지근했다.
용암이 흐르는 산은 위로 갈수록 뜨거움의 강도가 올라갔다.
그러다 종내에는 용암 바다 한가운데 입수한 것 같은 뜨거움이 전해져왔다.
피부가 건조해지다 못해 쩍쩍 갈라지겠다 싶을 즈음.
초대 가주의 무덤, 그 입구를 마주할 수 있었다.
폴짝 뛰어간 녹스가 거대한 철문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밀어보았다.
[이건 가주가 사용하는 순수한 흰색 불로만 열린다.]
“이거 참 공교롭게 됐네. 내가 그걸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야.”
이안은 철문의 오목한 부분에 불의 마력을 주입했다.
그 즉시 철문이 어떤 삐걱거림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냉큼 들어오라는 듯한 부드러움에 이안이 발을 한 짝 걸친 순간.
전방에 환영처럼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도면에 있던 아치형의 석문이었다.
“……라세르타.”
석문을 수놓은 도마뱀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비, 오팔,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등등 아홉 개의 보석을 휘감은 채로.
이안은 석문과 양피지를 연신 번갈아 보았다.
그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녹스가 말을 걸듯 중얼거렸다.
[이걸 열려면…….]
“홈에 있는 보석들을 재배치하면 돼.”
보석은 장식용이 아니었다. 석문을 열 열쇠이지.
[어떤 순서로?]
“도면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시간이 지나면 물러진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무한함을 유한하게 만드는…….”
[음. 단단한 것과 무른 것. 경도를 말하는 것이군.]
“그럼 다이아몬드가 처음일 테고 제일 마지막이…… 오팔이겠다.”
순서에 맞게 보석의 배열을 마친 즉시였다.
두껍던 석문이 입을 벌리며 검은 속살을 드러냈다.
마치 관속에 있는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넓은지, 그 안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도.
하지만 그런 거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안은 안쪽으로 들어섰다.
화르르.
기척이 일자 횃불이 하나씩 발화했다.
조롱조롱하게 늘어선 횃불의 안내를 받아 그는 계속 나아갔다.
얼추 횃불의 밝기가 눈에 익었을 즈음 갑자기 조도가 바뀌었다.
지나치게 쨍했다.
예고 없이 태양을 맞이한 두더지 신세랄까.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눈이 단박에 찌그러졌다.
그 상태로 멈춰 있길 얼마간이려나.
거의 감다시피 했던 눈을 도로 치떴을 땐.
“……!!”
눈앞의 광경에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비단 저만 그랬을까.
저를 앞서갔던 녹스 또한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저,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대체 어떻게 된…….”
절대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눈앞에 있었다.
세상에 오직 하나라 현재로서는 결코 존재해선 안 되는 물건이 말이다.
“시간의 서가…… 왜…….”
* * *
다각 다각.
이안은 마차 창틀에 팔을 괸 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아.”
저는 심란해 죽겠는데 마차는 날씨만큼이나 경쾌하게 굴러갔다.
제가 탄 것뿐 아니라 로토투아를 나서는 모든 마차의 행렬이 그랬다.
회합이 파투난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아니, 파호이 산에서 퍼온 제 근심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없는 한숨까지 끌어모아 이안은 다시금 날숨을 토해냈다.
“시간의 서라니.”
[허허. 그게 버젓이 있는 것도 기막힌데, 그곳에 내버려 두고 와서 내내 뒷골이 서늘하다.]
“나도 그래. 근데 어쩔 수 없잖아. 방어 결계가 겹겹이 둘러 처져 있는데.”
허리춤 높이에 달하던 원통 모양의 결계.
수백에 달하는 그것은 마치 커다란 양파 같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거다. 살리카 그것이 해제를 꽤 진행한 터라 결계 중 이미 상당수가 꺼져 있었다는 것.]
“그렇지. 중앙만 남은 상태였지.”
이안은 입을 꾹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다 도로 열었다.
“녹스, 남은 결계를 전부 해제하는데 대략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일주일 정도 걸릴 거다.]
“일주일?”
[나를 포함, 결계학에 능통한 상급의 정령사 스무 명가량이 작업에 참여한다는 전제하에.]
“흠. 당장에 오늘부터도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할 텐데.”
[그놈한텐 남은 수가 그것뿐이니 죽자사자 매달릴 터.]
“하아.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네.”
[그래서 네 아비가 황제를 만나러 가지 않았누.]
시간의 서가 살리카에게 있다는 것을 듣고 난 후.
아버지는 뷔트시겐 가로 향하지 않고 황궁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살리카를 쳐야겠으니 인가해 달라 청할 요량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