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이안 너도 알다시피, 4대 가문의 수장을 치는 일은 황제의 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일은 내가 폐하를 만나 마무리 지으마.>
<너도 마무리 지을 일이 있다 했으니 그 일이 끝나면 본가에서 보자꾸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이안은 마차 창틀을 톡톡 두드렸다.
아버지뿐이랴.
시간의 서로 인해 저도 꼭 가봐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에루리안.
정확히는 이 수수께끼를 던진 오쿨루스를 만나려는 것이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이안은 조여오는 무언가를 애써 누르며 창밖을 응시했다.
밖이 스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비장의 수를 감추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살리카 가주처럼.
“일주일이라.”
그 안에 결판을 내지 못하면…….
최악의 가정을 상기하며 이안이 조금 더 서두르라 명한 순간이었다.
콰지직.
땅바닥에서 일어난 덩굴들이 삽시간에 마차를 옥죄었다.
그에 맞춰 붉은 두건의 무리가 이안에게로 달려들었다.
무려 2개의 분대, 마흔에 가까운 숫자였다.
“살리카다! 막아라!”
알란의 외침과 함께.
콰르릉.
번개가 우중충한 하늘을 쉼 없이 강타했다.
번쩍번쩍 빛이 튈 때마다 삼색 고양이가 허공을 누볐다.
그렇게 알란의 번개 정령은 빛살 같은 속도로 살리카들 사이를 헤집었다.
고양이가 지나간 자리.
“크아아악!”
벼락에 맞은 살리카들이 게거품을 물며 꼬꾸라져 버렸다.
“씨X. 저 고양이 새끼.”
“저것부터 찢어 죽여.”
살리카의 분노에 불의 정령들이 넝쿨을 급속도로 생장시켰다.
그럴 때마다 넝쿨 사이사이가 터지며 불의 꽃들이 탐스럽게 만개했다.
피는 족족 불의 정령들은 만개한 꽃을 화살처럼 쏘아댔다.
슉. 슈슉.
화살촉으로 변한 꽃들이 번개 정령 쪽으로 날아들었다.
날렵하게 피한 녀석.
녀석이 있던 자리에 박힌 꽃들은 그 즉시 매서운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만개한 꽃은 어딘가에 박히면 저렇듯 자연 발화를 한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대기를 진동시켜.”
이안의 지시에 호위대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정령을 움직였다.
신호가 떨어진 직후, 바람 정령들이 살랑살랑 파동을 일으켰다.
공기의 파동은 느슨했으나 꽃을 밀어내는 손길은 매서웠다.
느리지만 유연하게 경로를 바꾼 화살촉.
이내 그것은 빨판처럼 살리카에게 흡착되었다.
“젠장!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꽃을 불태워라!”
살리카 부대장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낸들.
“그래봤자 이미 늦었는데.”
이안은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맞부딪쳐 튕겼다.
화아아악.
그의 손짓에 자연 발화한 불길이 얇은 막이 되어 살리카를 가뒀다.
“끄어어억!”
살리카 진영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덩이가 짓이겨지는 비명의 틈새.
이안은 얼마 남지 않은 살리카를 말끔히 정돈했다.
“후우.”
이제 숨 좀 돌리겠구나 했더니 그를 비웃고 싶었던 걸까.
에루리안으로 가는 내내 잘라내면 쫓아오고, 잘라내면 또 쫓아오고…….
그야말로 악귀처럼 살리카가 뒤따라붙었다.
이건 뭐 세포 분열도 아니고 무슨 놈의 분대가 이리도 끊임없이 충원되는지.
“허억. 허어억.”
이안은 정수리까지 찬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고작 스물의 인원으로 기백은 상대한 것 같다.
그것도 내리 2시간 동안 쫓기는 사냥감이 되어.
‘싸움이 길어지면 이쪽이 불리해지는데.’
숨을 정돈한 이안은 손등으로 턱을 닦다가 멈칫했다.
“…….”
쓸릴 때마다 욱신거리더니 손등의 살점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것으로 보아 뼈도 부러진 모양이다.
상태가 시원찮은 게 비단 저뿐일까.
알란과 수십의 호위대 또한 상거지 꼴이었다.
대중없이 찢긴 옷은 넝마였고 산발한 머리카락은 살점과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여기저기 그을리고 살이 뭉그러진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나저나 리오는 괜찮나.’
살리카들이 자폭할 때 저를 구하다 크게 다쳤는데.
이안은 살리카의 동태를 살피는 와중 흘끗 사선으로 시선을 던졌다.
넓적한 바위에 기대 숨을 가쁘게 내뱉고 있는 리오.
안색까지 허연 종이 같은 게 녀석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어떻게든 그라나토스까지는 버텨줘야 할 터인데.’
거기에 가면 치료는 물론이요, 살리카도 따돌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안은 사력을 다해 싸운 제 정령들을 훑었다.
녹스도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고 사냥개는 혀를 길게 빼물고 있었다.
크리스털은 빛을 잃고 거의 회색에 가까워졌다.
전력이 바닥나 버렸다.
‘갈 길을 좀 더 재촉해야겠군.’
그것만이 살길이라 이안이 에루리안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때였다.
11시 방향의 둔덕에서 붉은색 흙먼지가 일었다.
……2개 분대가 또 출몰한 것이다.
이에 이안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기어이 살리카 가주가 저와 끝장을 볼 모양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악착같이 살아남아 그놈 면상이 구겨지는 꼴을 봐야 할 터.
“호위대들 전부 내 뒤로.”
이안은 호위대에게 대지의 보호막을 씌운 뒤 그들의 앞에 결연하게 섰다.
어떻게든 이들만은 살려야겠다, 각오를 다진 순간.
까아아악.
귓바퀴를 진동시키는 나직한 울음이 일며, 까마귀 아홉 마리가 활강했다.
고아한 움직임이었다.
날갯짓하는 청금색 무리가 보이자 살리카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랑고바트?!”
누군가의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청금색 깃털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기묘한 빛깔의 깃털은 땅에 내려앉으며 반경 내를 늪지화 했다.
질척한 늪지에 발목이 잠긴 살리카들이 탈출하려 애쓰는 사이.
촤아아아악.
일어난 늪지가 살리카들을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불충한 칼브란, 도련님이 고초를 겪고 계시는데 늦었습니다.”
“……늦긴. 최고의 등장이었어.”
이안은 칼브란을 추켜세우며 빙그레 웃었다.
무한한 신뢰가 깃든 표정.
그 눈웃음에 차디찼던 칼브란의 낯이 삽시간에 훔훔하게 변했다.
* * *
회복을 위해 인근 마을에 들러 휴식을 취하는 참.
이안은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더는 쫓아오지 않는군.”
누워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일어났는데, 앉아있는 것도 편치는 않았다.
겨드랑이에서 배꼽까지 찢어진 탓에 옆구리가 자꾸 서걱거렸으니까.
이안은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슬쩍 떼었다.
그런데 하필.
“누워계시라니까 참 말을 안 들으십니다.”
훤한 유리창으로 미간을 구긴 칼브란이 비치며 눈에 들어왔다.
속상해 죽겠다는 눈빛에 이안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나 괜찮으니까 쫌 만 봐줘.’라는 너스레였다.
“이 정도 부상이야 침 바르면 나아. 그나저나 리오는?”
“그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원체 튼튼해서 그 녀석이야말로 침 바르면 나을 겁니다.”
“돌팔이 칼브란 덕에 리오가 고생 좀 하겠네.”
이안이 재차 웃음을 흘리는 사이 칼브란이 이불을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이안의 몸에 돌돌 감았다.
빵과 빵 사이에 낀 햄 신세와 다름없었다.
“의자에 묶어놓는 거야?”
“예. 어차피 안 누워 계실 테니 이렇게라도 해야겠습니다.”
“이 상태론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겠는데?”
“그거 다 제가 대신해드리겠습니다.”
“허어.”
이안이 실소를 터트리자 칼브란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댔다.
“저는 잠시 주방에 가서 회복에 좋은 차를 타올 테니 꼼짝 말고 계셔야 합니다.”
몇 번이나 당부를 한 후였다.
칼브란은 도둑을 쫓는 것처럼 부리나케 떠났다.
제가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저리 꽁지 빠지게 서두르는지.
그 뒤태를 보고 있자니 약간의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당분간은 효도 좀 해야겠다.”
[효도? 너 같은 청개구리가? 말을 잘 듣겠다고?]
되먹지도 않는 이안의 말에 녹스가 어이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표정도, 눈깔도 불량스러웠다.
녹스의 무시에 이안이 반발하듯이 주절거렸다.
“이만큼 다쳐서 속 썩였으면 그럴 때도 됐지.”
[이번엔 그 공수표가 얼마나 가려나.]
앙증맞은 입에서 얄미운 말만 튀어나왔다.
어찌 가만있을까.
그를 응징할 요량으로 이안은 녹스의 볼을 잡고 사정없이 늘렸다.
[아픙당. 느아라.]
새는 발음으로 녹스가 부탁하든 말든.
인정을 두지 않던 이안의 손이 돌연 작살 맞은 뱀장어마냥 튀었다.
더하여 녹스의 입술도 앙다물어졌다.
[……들었느냐?]
“이 소리…….”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결이 참으로 괴이쩍었다.
어린 짐승의 숨이 죽어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환희에 젖어 마냥 들떠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비탄 같기도, 분노에 가깝기도 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소리였다.
[저 희한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개미가 갉아먹는 것처럼 내 몸이 찌르르해진다.]
팔을 벅벅 문지르는 녹스뿐이랴.
저 역시 마찬가지라 도무지 무시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소리가 부르는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
[어허. 결국 효도가 몇 초를 못 가는구나.]
“효도는 일단 다녀오고부터.”
이안은 신경을 긁어대는 속삭임을 따라 무작정 여관을 나섰다.
조용히 나선다고 나섰는데, 알란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는 제 움직임을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조용히 붙따랐다.
* * *
소리의 근원지를 쫓아 도착한 곳.
어느 마을에나 있는 허름한 저장 창고 앞이었다.
이안은 부실한 잠금장치를 부수고 건물 내로 진입했다.
내부가 텅 비어있었다.
“여기가 맞는데…….”
[지하다. 지하에서 들린다.]
녹스의 말마따나 제 발밑에서 비명을 닮은 외침이 희미하게 울렸다.
이안은 더 생각지 않고 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깔끔하게 도려내진 곳에 계단이 나타났다.
“가보자.”
[요 며칠은 지하 탐방이 일상이로구나.]
점점 작아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둘은 계단을 밟아 나갔다.
넓고 구불구불한 토굴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리고 5분여 만에 도착한 계단의 끝자락.
그 밑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살점이 썩어가는 악취가 훅하고 올라왔다.
지하 묘지에서나 날법한 냄새였다.
후각에 가려 들리지 않던 소리를 따라 이안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구석 한 귀퉁이, 거길 전부 차지한 채 부패한 시체 더미가 천장까지 쌓여있었다.
“저 위.”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저기서 난다.]
시체 더미의 꼭대기엔 누군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고 있는 상태.
이안은 시체 더미로 천천히 다가갔다.
“라이……라프스?”
찰나 이놈이 이곳에, 왜 이런 꼴로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누가 답해주지 않아도 곧 납득이 갔다.
제가 알을 얻은 것을 알았으니 살리카 입장에서 라이라프스는 폐품이었다.
쓸모가 없어진 개를 살리카 가주가 놔둔 적이 있던가.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
이렇게 허무하게 버려진 놈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부지불식간에 제가 회귀 전 라이라프스에게 남긴 예언이 떠올랐다.
<가시로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시체 더미 위에서 썩은 물을 마시니 생이 고달프겠구나. 마지막 안식마저 평화롭지 못할지니, 너의 악업을 씻지 않는 한…….>
그 말 그대로였다.
쌓인 시체 더미에서는 파리와 구더기가 끓고 있었다.
온갖 벌레들의 집인 뭉그러진 살덩이들 사이에서 흐르는 싯누런 진액과 창자들.
그것들이 고인 웅덩이에서는 악취가 났다.
역한 냄새와 광경에 알란은 이를 악다물며 구역질을 참았다.
“이곳도 살리카의 연구실인 겁니까.”
“연구실은 아니고, 거기서 보내온 시체를 처리하는 소각장.”
이안은 무심히 답했다.
말투만큼이나 표정 또한 무척 건조했다.
그래서일까.
여태 반응 없던 놈의 흐린 동공이 그를 희미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들 저런들 이안은 의미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냉정히 돌아선 뒤 소각장 입구로 나아갈 뿐.
이렇듯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는 이안의 결정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용히 뒤따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