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99화 (199/214)

제199화

이안의 솔직한 심정은 그거였다.

죽든지 말든지.

현재는 아무 피해를 주지 않았더라도 과거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제 기억 속에 버젓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어디 라이라프스가 죽인 사람이 한둘이랴.

뷔트시겐만으로 드넓은 에드레이 나일을 채울 수 있다.

아니지.

채우고도 남아서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시체 더미에서 꽤 멀어진 순간 뒤에서 쯔걱 하는 소리가 났다.

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음이 난 뒤, 곧바로 지이익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에 돌아봤더니…… 그놈이 따라오고 있었다.

피가 줄줄 흐르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놈의 한걸음에.

<수많은 이의 목숨을 홀로 지고 가시느라 도련님은 참 많이 외로워 보이셨습니다. 그 외로움을 나눠 이고 싶었으나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부디 주군께서 너무 오래…….>

외팔의 정령 기사 리오의 목소리가 이안의 심장을 후벼팠다.

놈이 또 한 걸음을 떼자.

<도련님을 지켜 드리고 싶어요.>

제 피 묻은 손을 꽉 잡던 어린 소년의 열망이 이안을 내리눌렀다.

다시 라이라프스가 한 걸음을 떼자.

<내 도련님.>

칼브란의 다정한 음색이 제 숨통을 조이며 스러졌다.

이들 모두 라이라프스의 손에 처참히 목숨을 잃었다.

그 과거를 이안은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는데…….

“빌어먹을!”

앞만 보고 걷던 이안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살고자 따라오는 인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그게 안 돼서 제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어졌다.

이안은 거친 숨을 깊게 쉬곤 라이라프스의 발치에 뭔가를 던졌다.

제가 던진 것으로 굼뜨게 굴러가는 놈의 동공.

바닥에 놓인 것은 헤르세 모양의 비취 패였다.

아이루스 상단주가 목숨을 빚졌다며 언제든 사용하라고 준 것.

“그거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다.”

“…….”

“배곯고 살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까 거치적거리게 따라오지 말고 꺼져.”

그리 말하고 이안은 소각장을 나섰다.

냉기가 날리는 모습.

이에 알란은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품었던 의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이 이럴 분이 아니신데.’

평소라면 저런 자를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구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필히 말이다.

한데 어째서.

알란은 힐끗 뒤돌아 휘청이고 있는 소년에게 시선을 두었다.

열셋? 열넷?

작고 마른 소년은 살리카의 실험에 당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한 마디로 이안과 아무 연관이 없는 자란 얘기.

그렇기에 이리 야박하게 굴 이유가 하등 없었다.

풀릴 길 없는 알란의 의문, 이는 이안이 미처 가리지 못한 음울함 때문에 덩치가 더 커졌다.

그 음울함에는 뭐랄까.

본인 스스로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뭔가가 질척하게 묻어나온달까.

이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공간이 주는 찝찝함 때문인지.

가라앉은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죄어들어왔다.

* * *

작은 마을에서 그라나토스까지 소요 시간은 1시간.

새벽부터 서둘렀더니 어느덧 숲의 초입이었다.

그라나토스는 언제나처럼 고즈넉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저 흘러갈 뿐이라는 듯이.

그게 무척 이질적으로 다가와서 잠시 서 있는데, 숲을 보던 녹스가 입을 달싹거렸다.

[어제 말이다.]

“응?”

[소각장에 있던 라이라프스에게로 우리를 안내한 소리.]

“아, 라이라프스한테 깃들었던 녹스 네 근원이었잖아.”

[솔직히 좀 놀랐다.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상태더군. 그 녀석과 융합돼서 그 녀석화 되었다고 해야 하나?]

“재능은 있단 거지.”

녹스가 빚어낸 라이라프스의 마력핵.

그 핵은 어중간한 환술을 이용한 가짜가 아니었다.

녹스의 핵과 그라나토스의 기운까지 버무려진 진짜배기이지.

그만큼 정성을 들인 수공예품이라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제 주인이 죽어가자 우리를 부른 것만 봐도.

[여러모로 운이 좋은 녀석이다. 죽어가는 순간에 우리가 거기 있었으니까.]

“뭐 살 팔자였나 보지.”

건조하게 답하는 이안을 녹스는 흘끗 쳐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이나 어젯밤부터 냉기가 장난 아니었다.

옆에 붙어 있으면 제 발가락이 다 시려 올 정도로 말이다.

하긴.

악연으로 얽힌 인연이 달가울 리가 있나.

이안이 들추지 않으려는 얘기를 굳이 오래 이어갈 까닭이 없었다.

하여 슬그머니 주제를 바꾸려던 차.

바스락.

뒤쪽에서 풀 밟는 소리가 소슬하게 났다.

“…….”

서늘한 기척에 둘은 긴장을 조이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얼굴을 틀었다.

둘의 경계를 아는 것처럼 재게 정체를 드러내는 누군가.

“루체?”

하얀 사자는 고고하게 이안 앞에 섰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오쿨루스를 만나러 오는 길인가.”

“어. 물어봐야 할 게 있거든.”

“잘 됐군. 나도 그것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는데.”

루체가 불쑥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큼지막한 손바닥에 놓인 것은 산산조각난 다이아몬드였다.

붉은색과 담청색이 교묘하게 섞인 그것.

“애지중지하던 것이 깨졌네.”

“그제 갑자기 부서지더군.”

“그제?”

이안의 되물음에 루체가 꼬리를 휘휘 저었다.

뭔가를 억누르는 몸짓이었다.

“아마 네가 시간의 서와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루체의 말에 놀라서 이안은 이맛살을 위로 끌어올렸다.

시간의 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신이 이를 안 것도, 목격한 것도 고작 이틀 전인데…….

그런데 어찌 루체가.

제 의문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기도 전, 루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리 놀랄 것 없다. 그저 이 보석이 깨지면서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전부 살아난 것뿐이니.”

녀석이 다이아몬드를 뚫어지겠다 싶게 노려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눈빛의 상당 부분은 의외의 감정이었다.

배신감?

더하여 깊은 빡침도 동공뿐 아니라 수염에까지 올올이 박혀 있었다.

“묻고 싶겠지. 어이하여 시간의 서가 살리카에 있는지. 유일무이한 서가 왜 여즉 남아있는 것인지.”

“맞아. 사용해버린 서가 소멸하지 않았으니까.”

“그 답은 오쿨루스에게 가봤자 어차피 얻지 못할 것이다.”

“흐음.”

“이미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애초 수수께끼를 낸 자는 따로 있으니까.”

얘기 도중 루체가 파이프 담배를 흔들었다.

언짢음이 배인 손길이 중구난방으로 거칠었다.

“본디 담청색이었던 이 다이아몬드를 선물한 자가 주범이지.”

“……그걸 선물한 건 로르지 않아?”

“그놈은 일을 꾸밀 깜냥이 못 된다. 그저 내가 좋아한다는 걸 듣고 순수하게 건네준 것뿐이니.”

루체의 언짢음이 갈수록 짙어졌다.

“해맑은 그놈을 이용해 망각의 저주가 새겨진 다이아몬드를 내게 건네다니.”

“망각의 저주?”

“그로 인해 난, 그자의 의도대로 시간의 서에 대한 기억만 도려내졌지. 이 때문이었다. 그간 네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던 것은.”

천 년간 줄곧 속고 있었다.

제 성 곳곳에 박힌 담청색 다이아몬드가 붉게 변하며 제 기억을 갉아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친우의 선물이라며 그저 좋아했더랬다.

루체의 말을 쭉 듣던 이안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고대종인 루체 너를 이 정도로 강제할 수 있는 자라면.”

“더하여 오쿨루스가 수시로 탑의 상층에 드나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자, 그런 자라면 한 명뿐이지.”

말로의 탑을 세운 초대 황제.

초대 황제라는 말에 이안의 머릿속이 망치로 맞은 듯 웅웅거렸다.

애초 비중을 두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선지 무수한 의문과 궁금증이 쏟아져 내렸다.

한참을 그러다 종국엔 단 하나의 의문만이 뇌리를 점령하며 들어앉았고.

왜…….

“라에라트에게 직접 가서 물어봐라. 왜 그랬는지.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루체가 관리자의 길을 열며 파이프 담배로 이안을 밀었다.

지체하지 말라는 손길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인 사이.

순식간에 그의 몸이 말로의 탑, 결계 바깥쪽에 도착해 있었다.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답을 구하길 바란다, 이안.”

“응. 루체 네가 가지고 있는 의문까지 탈탈 털어서 얻고 올게.”

이안은 루체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실상 녀석이 궁금해할 건 하나밖에 없다.

자신의 기억을 굳이 지운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머리에 새기며 이안은 탑을 향해 나직이 외쳤다.

“라에라트.”

이안이 누군가의 이름을 혀끝에 담은 즉시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계단이 펼쳐지며 꼭대기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선뜻한 초대.

이에 이안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수수께끼를 풀어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일 수도 있는 자를 만나기 위해.

* * *

“왔느냐.”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을 맞이한 건 웬 꼬마였다.

뽀얀 피부와 평균보다 큰 키, 은발에 은색 동공, 길쭉길쭉한 팔다리.

황족임은 분명한데 초대 황제인지는 정확하지가 않았다.

저 나이대의 초대 황제 얼굴을 모르니 그럴밖에.

이안의 생각을 읽어낸 듯 꼬마가 미소를 내보였다.

“그리 헤집듯 보지만 말고 거기 앉거라. 이리 생겨 먹어도 그대가 찾는 자는 맞으니.”

“아, 실례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외형이라 그만.”

“하하핫. 그럴 만하지.”

호탕하게 몸을 들썩이면서 황제가 재차 소파를 가리켰다.

연이은 권유에 이안은 정중히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함이 정돈되자 황제가 부드러이 말문을 열었다.

“꽤 오래 걸렸지? 이리 대화를 나눌 수 있기까지 말이야.”

“솔직히 독대하게 되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대화의 포문이 유려하게 열렸다.

말이 오가는 중 황제의 시선은 줄곧 이안의 얼굴에 머물렀다.

짙은 눈썹, 기다란 속눈썹, 오뚝한 코, 야무진 입술.

영락없이 제가 가장 귀애했던 막내딸과 판박이였다.

아니지.

막내딸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똑 닮아있었다.

한편으론 신기하고 또 한편으론 간질거려 왔다.

“나는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

“그리고 내가 기다린 만큼 그대 또한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 하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잠시 호흡을 고른 황제는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제 손끝에 마력을 응집해 이안의 왼쪽 눈에 가져다 대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이안의 동공.

짙은 청회색을 비집고 수백 개의 도형과 문자열이 어룽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눈꺼풀 사이로 너울거리던 기묘한 표식.

표식은 이내 황제의 손등과 사슬처럼 연결되었다.

기기묘묘한 문양, 아니 시간의 서를 슬쩍 문지른 뒤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금제가 걸린 일에 답을 하기 위해선 확인이 필요했지.”

“제 왼쪽 눈을 말입니까.”

“그렇네. 거기에 뒤틀린 시간의 서가 존재하는지 말이야.”

“뒤틀린…….”

이안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황제는 손을 거둬들였다.

탁자 밑으로 내려지는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더는 말을 끌지 않으마. 그 속에 담아 둔 것들을 꺼내 보거라.”

“다른 무엇보다…… 저는 이 모든 일의 시작을 듣고 싶습니다.”

“흠. 시작이라…….”

이안의 단호함에 황제의 무거운 입이 속박을 벗어난 듯 서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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