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00화 (200/214)

제200화

몇 시간 후.

녹스는 에루리안으로 향하는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녀석을 따라가지 않은 건 초대 황제에게 아직 물을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이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녹스는 몸을 틀었다.

앳되디앳된 모습의 황제가 줄곧 책장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를 보니 뭐랄까.

비슷한 나이인 것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하나.

마치 그가 말로의 탑을 처음 찾아왔을 때 같았다.

[다시 말해보게]

“무얼?”

[시간의 서에 대해.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정령사가 왜 이 꼴로 탑의 망령이 되었는지에 대해.]

“흠.”

[어서.]

황제는 검은 벨벳의 예언서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한바탕 쏟아냈는데도 다시 말하려니 어려웠다.

묵혀둔 만큼 끄집어내기 힘든 얘기였기 때문.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예지몽에서 비롯되었네.”

[예지몽이야 종종 꾸지 않았나. 빛의 정령과 결속을 맺어 예지 능력이 있었으니.]

“그날만은 달랐으이.”

[달랐다, 라.]

“앞날을 안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닐세. 내 경우만 해도 그러하지.”

[…….]

“어쨌든 특별한 꿈을 처음 꾼 건 히에로스를 세우고 고작 반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이었다네.”

아직도 황제의 뇌리에 생생하다.

장마가 시작되는 우기의 꿉꿉한 공기와 비릿함을 품은 바람의 냄새.

먹장구름 가득하던 하늘의 형태까지,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부딪히는 희한한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유달리 축축 처지는 기분이 들어, 하던 일을 접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마력핵이 없는 뷔트시겐의 아이를 말이다.

낯선 듯 친숙한 느낌의 녀석은 오색 동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묘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 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접했더랬다.

처음에는 그냥 혼몽인 줄 알았으나…… 꿈은 계속 이어졌다.

마치 끝을 봐야 한다는 것처럼.

“드문드문 이어지는 꿈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았어.”

[한데.]

“아이가 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네. 제국이 망한다는 것을.”

황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닌 말로 제국을 세운 지 300년쯤 되었다 치자.

그러면 300년이나 해 먹었으니 뭐, 그러면서 납득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반년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품은 소망도 컸던 때에 그런 악몽이라니.

“등줄기가 서늘해져서 대비하기로 작심했으이.”

[예언서를 써서 말이지.]

“맞네. 예언서는 내가 꿈에서 본 것들을 적은 일종의 일기지. 황가의 역사서인 계승의 서와 엮어 이안만 보도록 설계된.”

이를 이안이 쥐게 되면 강력한 무기가 된다.

앞날을 안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도서관 사서까지 하나로 묶어 안배했지만, 황제는 불안했다.

예언서를 얻고도 실패한다면?

그때를 대비한 것이 바로 시간의 서였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시간을 역행하려니 참 많은 손이 필요하더군.”

[바다 엘프의 초대 수장과 시간의 정령 라트비아?]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여신의 힘까지 끌어와야 했지.”

[하긴. 여신의 입김이면 바다 엘프가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지. 그들이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 신탁이니까.]

“바다 엘프의 수장을 통해 밀서를 전달하게 하고, 시간의 정령을 소멸시켜 시간의 서를 완성 시킨 것까지는 순조로웠지. 한데 간과한 게 있었어.”

[시간의 서의 절대 규칙. 서를 사용한 자는 죽는다는.]

“그 규칙을 피하려면 이안을 대신할 목숨이 필요했다네.”

[그게 자네의 목숨인 거고.]

“그건 새삼스러울 거 없을 테고. 중요한 건 녹스 그대지.”

[나?]

“예정된 운명. 황태자가 죽으면 알도 죽는다는 명제를 제거해야 했지. 다 준비됐는데 이안이 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게 수장의 목숨이었네. 그의 목숨으로 그대를 살렸으이. 50년을 벌었지.”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렇게 정해진 것들을 이리저리 뒤틀다 보니 당연한 결과로 이곳에 매인 몸이 되어버렸고.”

[순리를 어긴 대가로군.]

녹스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어쩐지 심란해 보이는 그 낯을 보며 황제도 잠깐의 틈을 두었다.

이 일에 바다 엘프의 수장, 시간의 정령, 여신만 가담했으랴.

오쿨루스 역시 한 손을 거들며 황가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안이 성장하기 전에 황가 쪽에서 그 존재를 알지 못하도록 막는.

그리고 서쪽 관리자는 망각의 저주를 심었다.

수호자의 알과 담청색 다이아몬드에다 줄곧.

황제가 기다리는 사이, 얼추 생각을 정리한 녹스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라에라트, 그 수많은 역할 중 내 역할은 뭔가.]

“그대의 역할?”

[내게서 특정 지식이 누락 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한데.]

“있지. 그 채로 그대는 이안 뷔트시겐의 수호자가 되어야 했네.”

[이안의? 알을 먹으면 당연히…….]

“당연? 황족이 아닌 자가 알을 취하면 수호자는 그 무도한 자를 죽인다, 맹약을 잊었는가.”

[……!!]

“맹약 자체를 잊는 게 그대의 역할이었지. 망각. 마력핵이 없는 아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그렇다면 설마 루체가 시간의 서에 대해 망각한 것도 전부…….]

“어쩔 수 없었네. 루체나 그대나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없었으니까.”

[황가만을 위해야 한다는 명제, 그게 박혀 있는 우리가 이안을 죽일까 걱정해서 그리했다는 겐가.]

“그렇다네.”

[소름 끼치게 치밀하군. 라에라트 자네는 정말이지…….]

녹스는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너무 빈틈이 없으니까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다.

제멋대로 남을 재단하고, 한 마디 상의조차 없이 일을 진행한 것에 대해 따져야 하는데.

[혼자서 단정 짓지 말고 언질을 줬으면 좀 좋아? 그러면 일이 이리 꼬이지 않았을 것을.]

“말을 했으면 따라는 왔을 테고?”

[됐고. 그럼 말해 봐.]

단호한 녹스는 황제의 형식적인 물음을 잘라버렸다.

어차피 제가 동조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던지는 떠보기였을 뿐이니까.

[왜 이안이 회귀했는데도 시간의 서가 남아있는지. 그것도 살리카 그놈 구역에.]

“내가 한 안배들은 정해진 모든 것들을 뒤트는 거였네.”

[잡설은 집어치우고.]

“크흠. 뒤틀리면서…… 변수가 생긴 거지.”

[변수? 허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겐가.]

“앞날을 안다고 모든 것을 알 수…….”

[그 역시 됐고. 가장 중요한 거, 그 시간의 서가 아직 힘이 남아있나.]

“불행히도…… 최소 5년 전까지로는 회귀할 수 있으이.”

[이런 썅!]

결국 녹스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황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홉 가지를 잘하면 뭐하나.

하필 제일 중요한 물건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을.

퍽. 퍼억.

황제의 정강이를 연이어 걷어차며 녹스가 목청을 있는 대로 높였다.

[5년 저어언? 그럼 지금까지 했던 노력들이 다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잖아!]

“…….”

[그런 문제가 있었으면 재깍재깍 빨리 알려줄 것이지, 왜 단서 쪼가리나 던지면서 이제야 알게 한 건데!]

“말했잖은가. 순리를 거스르며 끌어쓸 수 있는 모든 대가를 치렀네. 더는 값을 지불할 수 없어 전부를 말해줄 수 없었으이.”

[염병!]

“그러려면 아직 대가를 치르지 않은 그대나 이안이 값을 내야 했거든.”

그럴 순 없었다.

회귀를 유도한 저 때문에 의도치 않게 고생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녀석에게 대가까지 치르라 할 순 없었다.

만약 이안이 뭔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건 미래였다.

살리카와의 결착이 난 후의 미래.

녀석이 선택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미래 말이다.

*  * *

다그닥 다그닥.

그라나토스에서 다시 뷔트시겐으로 이동하는 마차 안.

이안은 어딘가 심란해 보이는 녹스에게 말을 걸었다.

“어땠어?”

[뭐가 말이냐?]

“오래된 친구를 만난 거.”

[그놈은 여전하더구나. 하도 똑같아서 시간이 뛰어버렸단 느낌조차 들지 않더군.]

“그래서 회포는 다 푸셨고?”

[회포는 무슨. 상황이 상황인지라 질문하기 바빴다.]

“하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창밖을 보며 매끄럽게 말을 이어가던 이안이 돌연 눈가를 좁혔다.

뷔트시겐의 정문, 그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즉각 이안은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마부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쏘아진 화살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즉시였다.

내내 딱딱하게 서 있던 보초병들이 웃음을 머금었다.

“도련님.”

고개를 숙이는 그들에게 이안은 손을 저어 보였다.

인사는 됐다는 신호 후, 그는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머리 색만으로 단박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물 빠진 붉은색에 오색이 섞인 오묘한 보라색.

이런 색을 지닌 자는 히에로스에서 단 한 명뿐이다.

녹스의 마력핵, 그 일부를 가지고 있는 자.

“라이라프스.”

이름이 불리자 그제야 놈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저를 직시하는 하얀 낯짝이 속이 다 비칠 만큼 투명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뷔트시겐 네가 패를 줬으니까.”

“그게 무슨.”

참 어이없는 발언이었다.

아이루스 상단을 찾아가라고 패를 줬더니 그걸 들고 이리로 오다니.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참으로 해맑다고 해야 할지.

평생을 연구실에서만 처박혀 산 놈이라 그런지 사고가 남달랐다.

눈썹을 꿈틀한 이안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꾸했다.

“너도 알지 않나. 그 패는 이곳에서 쓸 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알아?”

“나는 그 패를 이용해서 뷔트시겐에 데려다 달라 요구했어.”

“허허.”

상한 고기를 제대로 처먹었는지 아주 맛이 갔다.

그 패가 어떤 패던가.

수도의 분점은 아니더라도 작은 도시의 분점 정도는 가질 수 있는 패였다.

남들은 못 가져서 안달인, 권력이 될 수 있는 패.

한데 그 패를 고작 이동 수단으로 써 버린 것이다.

헛웃음을 터트린 이안은 가만히 라이라프스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라이라프스가 천진하게 말을 덧댔다.

“이안 뷔트시겐, 나는 4대 원소를 다룰 줄 알아.”

“그래서.”

“그리고 열넷인데 벌써 에르그 3성이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 그러니까 나는 쓸모가 많은 인간이라고.”

“…….”

“결론은 이 쓸모 많은 능력을 가지고 네 곁에 있겠다는 거지.”

“하.”

살면서 들었던 어처구니없는 말들 가운데 이 말이 최고봉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리를 내뱉는 건지.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그만 가라. 그래도 내가 구한 목숨이니 살리카한테 잡히지 않게는 해 줄게.”

이안은 단칼에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랬더니 저를 붙잡듯 삽시간에 제 뒤통수로 여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 그거 유기다.”

“유기?”

“주워놓고 아무 데나 갖다버리는 건 유기거든.”

“네가 개새끼냐? 그런 비유를 쓰게.”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

그런 말을 참 담담히도 한다.

놈의 평온한 낯짝에 이안의 말문이 잠시 잠깐 막혀버렸다.

참 우습게도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사람 말문을 막는 재주가 어찌나 탁월한지.

이런 놈과는 계속 말을 섞어봐야 제 입만 아플 뿐이었다.

“진짜 개도 아니면서 알아서 살아. 들러붙지 말고.”

축객령과 함께 이안이 야멸차게 몸을 틀었다.

미적지근함 따위 없었다.

라이라프스가 그 자리서 박제가 되든, 떠나든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조금 전 일이 없었던 것인 양 이안이 정문 안으로 발을 내리누르던 차였다.

“도련님!”

우람한 덩치의 여자가 저만치서 이안을 향해 뛰어왔다.

세상 바쁘게 질주하는 여자는 전서구를 관리하는 관리인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표정을 정돈하더니 곧장 이안에게 얇은 서신을 내밀었다.

“긴급 서신이라 서둘러 왔습니다.”

“긴급?”

서신을 받아든 이안은 냉큼 내용을 확인했다.

루하흐 쪽에 심어둔 첩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본론만 적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루하흐 가주가 군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시기는 풍어제가 끝난 직후, 목적지는 살리카의 로토투아입니다. 한 가지 다행한 점은 우리 쪽의 움직임을 파악한 이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 그자들이 로토투아에 주둔해 있으면 골치가 아파질 것은 자명한 일이기에 이리 서신을 보냅니다.》

“이런 젠장.”

이안의 인상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급하게 꺼야 할 불이 생겨버린 상황이었다.

살리카를 칠 준비를 할 시간도 빠듯한데 루하흐부터 손 봐야 하다니.

이리되면 루하흐와 관련된 계획을 또다시 앞당길 수밖에 없다.

‘일단은 레브한테 연락해야겠군.’

일거에 루하흐 가주의 발목을 묶으려면 녀석이 있어야 한다.

녀석은 가주의 유일한 치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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