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01화 (201/214)

제201화

루하흐의 중심 도시 브니즈.

막 범선에서 내린 이안은 복작복작한 항구 도시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물의 정원이라 불리는 곳답게 소금기를 머금은 물 냄새가 자글자글하게 났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녹스 또한 콧구멍을 킁킁거렸다.

[역시 루하흐야. 수상 도시라서 물비린내가 장하다.]

녹스 말마따나였다.

포말이 이는 물 위에 도시가 동동 떠 있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다리를 끼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양새.

그게 흡사 개구리밥 같았다.

[이안, 저 섬 사이사이에 있는 곤돌라들 좀 봐봐라.]

녹스가 가리킨 곤돌라는 평범한 배가 아니었다.

어부들이 횟감을 치며 분주하게 음식을 판매하는 이동식 상점이었다.

즉석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낚아 요리를 해주는 것.

오직 루하흐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착착.

솜씨 좋은 어부의 손에 의해 히오나스가 연분홍색 속살을 드러내며 접시에 담겼다.

입맛을 돋우는 자태가 어찌나 영롱한지, 녹스가 침을 꿀떡 삼켰다.

[아이고, 맛나겠다. 이안 네가 해준 게 생각난다.]

“사줄까?”

[에이, 됐다. 지금 식탐이나 부릴 때가 아닌 걸 아는데.]

아쉬움을 덜어낸 녹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사람 참 많다.]

“풍어제를 지낸다 하니 구경꾼이 몰린 거지.”

[해마다 지내는 풍어제가 뭐 그리 재미있을꼬.]

“이번은 다르잖아. 바다 엘프가 동면을 철회하며 막힌 바닷길이 뚫리고 지내는 제니까.”

그간 얼어붙었던 해상 무역이 다시 활발해지고 있었다.

하여 루하흐 가주는 무역선의 안전을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내겠다고 공표했다.

전대 가주 독살 건으로 잃어버린 민심을 수습하려는 수작질.

가주의 심상은 그럴지언정 실상 사람들이 몰리는 건 그것과 아무 연관이 없었다.

단지, 루하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식을 보기 위함이었으니까.

상념의 끄트머리.

“이보시오, 도련님.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던데 함 잡숴 보시겠수?”

나이든 어부가 주름진 손으로 히오나스의 살점을 내밀었다.

싱싱한 생선 살과 사근사근한 태도.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 위로 불현듯 과거가 겹쳐졌다.

비렁뱅이 꼴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둣가를 헤맸던 당시.

제 앞에 있는 이 늙은 어부가 그에게 생선 머리와 내장을 적선하듯 주었었다.

그거라도 먹으라며.

동정심을 베풀곤 신경을 꺼버린 그때와 달리 어부는 손님인 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살점을 받아든 뒤 맛있게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금화 다섯 개를 도마 옆 나무통에 넣었다.

“아이고, 손님. 너무 많습니다. 이거면 제가 잡은 물고기를 다 드려도 모자랍지요.”

“동정을 베풀었던 선의의 대가라 치게.”

“예?”

어부의 되물음에 이안은 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공짜로 얻어먹었던 값을 뒤늦게라도 치렀단 생각에 마음이 조금쯤은 홀가분해졌다.

그거면 된 거라 금화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얼마쯤 가벼워진 걸음으로 브니즈를 쏘다니길 한참.

“이안.”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쳐서 서서히 몸을 틀었다.

그러자마자 훅 파고 들어온 건 시리도록 맑은 바다 향이었다.

“레브.”

그의 부름에 레브가 후드를 뒤로 젖히며 눈웃음을 지었다.

반으로 접히는 녀석의 눈동자가 심해처럼 짙었다.

부쩍 성장한 것을 티 내듯이.

“바다 엘프와의 수련이 효과가 그만이었나 봐. 머리 색도 진해졌어.”

“최고였지. 수장님이 직접 지도해주셨거든.”

그때를 떠올리는 듯 녀석이 다소 상기된 어조로 대꾸했다.

얼마나 좋은지 볼까지 붉어졌다.

잠시 잠깐 곱씹는 것 같더니.

“나만 성장하는 건 의미가 없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는 불쑥 목함을 내밀었다.

어서 받으라고 흔드는 손짓에 올올이 어려있는 뿌듯함.

평소와 다른 들뜸이라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레브가 입가를 실룩거렸다.

“어서 열어봐.”

재촉까지.

레브의 성화에 이안은 산호가 박힌 목함을 열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예상외의 물건이었다.

“이거.”

“지금 이안 너한테 제일 필요한 거잖아, 물의 가시.”

“대체 이걸 어떻게…… 구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닌데.”

가시란 이름이 붙는 영약은 원소마다 수확 시기가 다르다.

그래서 영약을 구할 수 있는 축제는 그때 맞춰 열린다.

루하흐의 경우는 그 축제가 여름의 절정인 5월에 열려서 수확의 때가 아직 멀었다.

그럼 미리 따놓은 것을 구하면 되지 않겠냐고?

그럴 수가 없다.

수확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녹아버려서 저장도 불가능하니까.

그런 것을 지금…….

이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자 그에 레브가 우쭐거렸다.

매사 덤덤한 이안의 반응을 끌어낸 것 때문이었다.

“내가 누구냐. 바다 엘프가 인정한 후계자야. 물의 가시 하나 못 구할까.”

“오오. 이리 귀한 물건도 턱턱 구해다 주고,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다.”

“그러니까 알아서 모셔.”

레브의 거들먹거림을 부추기려는 걸까.

파도가 크게 너울거리며 녀석의 발치까지 들이쳤다.

생각보다 찬 수온에도 레브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발재간을 치며 파도를 조정할 뿐.

혼자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레브가 대뜸 제 쪽으로 물 폭탄을 쏘아 보냈다.

아직은 물을 다루지 못하지, 라는 도발.

어쭈?

도발은 받아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잖은가.

이안은 물 폭탄을 레브에게 되돌려 주었다.

엎치락뒤치락 인정을 두지 않는 공방은 꽤 오래 이어졌다.

그렇게 옷이 다 젖고 난 후에야 급작스레 정신이 들었다.

한가하게 장난을 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멋쩍음에 헛기침한 이안은 뒤늦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크흠. 그럼 이따가 어찌할지 다시 되짚어볼까.”

“그러자.”

“풍어제의 대미는 루하흐 가주가 지내는 제지.”

“바다 엘프들한테서 들은 말인데 엄청 신경 썼다더라. 음식이며 악단이며 금화를 처발랐다고 그러더라고.”

“좋네. 레브 네가 등장할 무대를 미리 신경 써 주다니.”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무튼 루하흐 가주가 단상으로 나왔을 때 말이야. 레브 너는…….”

* * *

두웅.

묵직한 북소리와 함께 루하흐 가주가 단상으로 올랐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구경꾼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저열한 호기심이 녹은 온갖 감정의 호수 속, 가주는 단상의 중앙에 자리했다.

“…….”

내려다보는 눈빛에 깃든 위엄을 똑바로 마주할 자는 없었다.

누가 뭐라 하든 그는 루하흐 일족의 수장이었으니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풍요와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풍어제를 시작하겠다.”

말이 끝난 즉시였다.

가주가 단상의 제일 안쪽, 커다란 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북채가 닿는 채궁자리를 제외하고 전체가 푸른색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풍요의 북.

오직 수장만이 칠 수 있는 북 앞에 가주가 선 것이 일종의 신호였다.

두우우웅.

단상을 둘러싼 아홉 개의 북소리가 다시금 바다 너머까지 크게 울렸다.

뒤이어 악사들이 각자의 악기를 집어 들었고, 무희들이 춤을 출 준비를 끝마쳤다.

무희들은 루하흐 가주를 중심으로 놓고 꽃처럼 퍼졌다.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아무나 출 수 있으랴.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그 자격을 지닌다.

하여 풍어제에 선발된 무희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바다를 잠재우는 춤을 시작하라.”

근엄하게 북채를 잡은 가주의 손끝이 위로 들린 순간이었다.

“풍어제는 자격이 있는 자가 주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앳된 목소리가 손끝을 붙들듯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풍어제를 방해하는 것은 중죄였다.

루하흐라면 모를 리 없는 불문율에 구경꾼들이 어지럽게 웅성거렸다.

그러면서도 불온한 방해꾼을 보기 위해 부산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폭격이 고이는 곳, 그곳에 웬 후드가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자는 둘이었다.

그들은 단상을 향해 나아갔다.

하나는 앞서 걷고, 다른 하나는 호위하듯 뒤따르는 걸음.

그들의 움직임에 단상을 지키고 있던 기사단 단장이 외쳤다.

“접근을 불허한다. 멈춰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경고로 끝냈지만, 만면에는 살기가 범벅이었다.

당장 모가지를 딸 것 같은 기세에도 후드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불미한 걸음새에 명분을 얻었다는 양 기사단 스무 명이 전진했다.

슈슉.

그에 맞춰 정령들이 후드에게 돌진하며 오각형의 구체를 날렸다.

곧게 뻗어나가는 구체들.

구체는 제압용 물의 감옥이었다.

그것들을 막아내려 후드 중 뒤에 있던 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콰과괏.

후드의 손에서 분사된 진회색 가루는 얼음이 되어 구체들을 얼렸다.

돌진하는 정령들과 뒤에 있던 기사단의 발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이후.

“감히 제 주인도 몰라보는 어리석은 것들!”

곧바로 이어진 나직한 일갈에 기사단은 움찔했다.

무엇 때문인지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당황하는 그들을 일깨우려는 듯 후드가 서서히 모자를 뒤로 넘겼다.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드러난 얼굴.

“……수호검 데클렌?”

노인의 얼굴에 놀란 건 가주만이 아니었다.

나름 점잔 떨고 있던 장로들도 죄다 놀라 튕기듯이 일어섰다.

“어, 어찌.”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묻는다면 억울해서 죽지 못했다. 주인을 문 개새끼가 살아있는데 눈이 감기겠는가.”

데클렌의 노성에 구경꾼들이 노골적으로 흥미를 드러냈다.

그들은 직감했다.

현재 이 상황은 전대 가주의 독살 사건의 연장선상이라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다들 꾹 참고 관전했다.

여기에다 볼거리를 더하려는 건지 남은 후드가 모자를 벗으며 감질나게 입을 뗐다.

“오랜만입니다, 숙부.”

“……너.”

레브를 보자마자 루하흐 가주의 볼이 무작스레 떨려왔다.

흡사 유령을 맞닥트린 것 같은 표정.

눈자위가 까뒤집어지면서도 가주는 레브의 전신을 찢을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이…….”

가주의 독살스러움이 치닫자 이번엔 단상 아래에서 한 무리가 밀려들어 왔다.

슈튼하노버 가주를 주축으로 한 반군 무리였다.

그들은 레브의 뒤편으로 가 질서정연하게 자리했다.

그들의 비호 때문일까.

더는 누구도 레브를 막지 않았다.

거침없이 단상에 선 레브는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급작스러운 해후에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나이든 숙부를 배려해야 하나 지금은 그러지 못할 것 같군요.”

“하. 간이 크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히 가엾이 죽은 내 조카 흉내를 내다니.”

“흉내라……. 데클렌을 보고도 그리 말한다면.”

레브는 품에서 산호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 든 것은 푸른 장미가 새겨진 청옥이었다.

“이것은 기억하십니까. 제 생일 선물이라며 숙부가 준 것인데.”

“…….”

“정신없이 도망치는 중에도 이것만은 챙겼습니다.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줘야겠기에.”

“이제 보니 한낱 도둑놈이었군. 내 조카의 부장품까지 파내 일을 꾸미다니. 그깟 걸로 무엇을 증명하겠다고.”

“증명…….”

가주의 뻔뻔함에 레브는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증오도 분노도 깃들지 않는 그저 바다처럼 잔잔한 동공.

지극한 평온함에 가주가 이를 으드득 간 그때였다.

촤아아아악.

바다가 갈라지며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는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 엘프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총 열 척의 배, 그것의 주인은 바다 엘프였다.

그들의 등장에 누구보다 화색을 띤 건 가주였다.

‘적시 적소에 등장해주는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장의 낙인을 받으면 어찌 되겠는가.

이 찜찜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한 마디로 도둑놈 따위 우습게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것.

가주가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선 뱃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노도 무엇도 없이 유유히 움직이는 배.

물방울을 빛방울처럼 튕기던 배가 뭍에 닿자마자였다.

지면을 밟은 바다 엘프들은 열을 맞춰 나아갔다.

그들의 동선을 따라 구경꾼들이 양옆으로 재빠르게 갈라졌다.

인파를 가르며 거침없이 나아갔지만, 끝은 있었다.

단상 앞에서 멈춘 바다 엘프들은 가슴팍에 왼손을 얹고선 그 위에 오른손을 직각으로 얹었다.

최고의 예를 취한 뒤였다.

“루하흐를 이어나갈 온당한 후계자를 뵙습니다, 시온 님.”

그들이 레브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자, 대번에 가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보다 확실한 증명은 없었다.

레브가 전대 가주의 핏줄이라는 증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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