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02화 (202/214)

제202화

풍어제 다음 날 꼭두새벽.

이안은 살리카를 치기 위한 첫 번째 작전을 위해 에루리안에 들렀다.

볼일이 있는 건 밀실이 있는 종탑 뒤편이었다.

“이곳이군.”

여기는 숲으로 이어지는 공터가 있을 뿐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지나칠 장소.

그런데도 이안은 공터 한편으로 가 바닥을 헤집었다.

수북이 쌓인 나뭇잎이 치워지고 나자 투박한 도르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도르래의 손잡이를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촤륵 촤르륵.

그와 동시에 조인 사슬이 풀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얼마쯤 그러다 소리가 멈췄을 땐 공터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안은 공터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각 방위마다 커다란 워프 게이트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중앙에도 있었다.

그 배치며 형태가 마치 히에로스의 축소판 같았다.

[게이트마다 각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서쪽은 뷔트시겐, 남쪽은 살리카, 동쪽은 루하흐, 북쪽은 발리올이네. 중앙은 황가고.”

[이런 곳에 각 가문과 연결된 이동진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꼬.]

“게다가 한 번에 수백을 이동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말이지.”

이런 대규모 이동진은 여기가 유일하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다.

살리카의 본거지로 대규모 병력을 단시간에 이동하려면 필요하기에.

이안은 보물을 보듯 게이트를 응시했다.

“그만큼 위험성도 커서 황제와 수호자만이 작동시킬 수 있는 거고.”

[정확히는 4대 원소를 가진 자이지 않누.]

“다행히 물의 가시 덕에 폐하께서 친히 오시지 않아도 작동시킬 수 있지. 우선 이것들부터 활성화하자.”

입을 놀리는 동안에도 이안과 녹스는 바지런히 움직였다.

토옥.

둘은 피를 내어 잿빛 게이트에 떨궜다.

그 즉시였다.

기다렸다는 듯 그들 외 누군가의 말소리가 붙따랐다.

“지금부터 게이트를 활성화하겠습니다.”

이안의 종아리밖에 오지 않은 녀석.

깃털 펜을 끄적거리는 건 데포르티 족이었다.

이들은 워프 게이트를 짜는 유일무이한 종족이다.

이등신에, 양 관자놀이 쪽에 달린 산양의 뿔, 뽀글뽀글한 머리카락.

얼굴은 인간의 형상이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양을 닮은 일족이다.

오직 이들만이 게이트를 변형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

차르르.

데포르티가 두루마리들을 넓게 펼쳐 워프 게이트를 덮었다.

빈틈이 있나 확인까지 마친 후였다.

끄적끄적.

깃털 펜을 쥔 데포르티가 둘의 피를 잉크 삼아 글자들을 써 내려갔다.

그게 또 무수한 글자가 되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될 때쯤이었다.

두루마리를 채운 문자열들이 일어나 꾸물꾸물 움직였다.

하나씩 하나씩 게이트 안으로 스미는 문자들.

그러자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회색빛이던 게이트가 점점 은은한 빛을 뿜었다.

“다 됐습니다.”

“…….”

“이제 이 게이트는 살리카와 연결되었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데포르티는 다른 게이트도 작동시켰다.

무척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이곳으로 군을 집결시켜 단박에 살리카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안은 어슴푸레함을 밝히는 게이트의 은색 빛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게 아니었으면 살리카까지 가는데 꽤 시간이 걸렸을 텐데.”

[이동에 시간을 까먹으면 결과야 빤하지. 살리카 그자를 막지 못했을지도.]

천만다행하게 시간을 벌었다.

이제는 단축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때였다.

일주일의 제한 시간 중 나흘째가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단 1초도 허투루 쓸 순 없지.’

이안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계획을 점검해 보았다.

* * *

각 가문과 에루리안의 워프 게이트가 연동된 후였다.

츠즈즛.

네 개의 진 중 살리카 것에서 붉은빛이 나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상대를 확인한 이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교수님.”

“잘 작동되는지 보려고 시범 운행을 해봤는데, 살리카와 원활히 작동되는구나.”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은 터라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이안의 안도에 클로에가 진한 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은 까도 까도 놀랄 만한 것을 끊임없이 내뱉는다.

이번 작전만 해도 그랬다.

이동진은 말할 것도 없고 작전 전반에 걸쳐 녀석의 입김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심지어 주도면밀했다.

어리고 경험이 없다고 절대 얕잡아 볼 수 없달까.

클로에는 범상치 않은 제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아, 살리카 가주는 며칠 전부터 파호이 산에 틀어박혔다.”

“그자로서는 시간의 서만 움켜쥐면 될 테니까요.”

“파호이를 지키는데 전력을 쏟아붓고 있어,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다.”

살리카 가주는 물이 새는 배를 버리려 하고 있다.

새로운 배로 갈아탄 뒤 자신의 청사진을 다시 그릴 작정인 것.

그리되면 초래될 결과야 빤하니 그자를 저지해야만 한다.

두 사람이 한참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불쑥 나긋한 음색이 끼어들었다.

“무도한 자가 허무맹랑한 꿈을 이루기 전에 막아야지요.”

부드러움에 대비되는 단호함.

목소리가 무척 낯익어서 이안은 얼른 워프 게이트로 고개를 틀었다.

“……스톨레 교수님.”

“오랜만이군요.”

화려한 안대를 휘날리며 스톨레가 진 위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정령사 협회원들이 속속 게이트를 넘어왔다.

그렇게 게이트의 빛이 줄어들었을 땐 그 수가 거의 기백에 가까웠다.

황가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협회장이 힘을 빌려준 것이다.

“이곳에서 다시 뵐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교수님을 보니 무척 반갑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제자의 소식을 언제나 기쁘게 듣고 있답니다.”

스톨레가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담백한 칭찬이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었다.

그를 따라 이안도 눈꼬리가 접힐 정도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짤막한 재회의 틈.

“어이 형제들, 제대로 싸우지 않는 놈은 나중에 나랑 특별 대련을 할 줄 알아.”

독특한 추임새를 넣으며 발리올 가주가 등장했다.

가주를 닮은 발리올 쪽은 벌써 투지가 정수리까지 차 있었다.

기세등등한 발리올을 포함, 모두가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슬슬 이동할 때라 발리올 가주가 물음을 던졌다.

“내 형제는 언제 오시는가.”

그의 기다림에 답하려는 건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뷔트시겐이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를 필두로 군더더기 없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정령 기사단.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이안은 열 일 제쳐두고 빠르게 다가갔다.

“아버지.”

“이안.”

옅게 미소 지은 가주는 이안의 어깨를 힘주어 쥐었다가 놓았다.

많은 것이 담긴 손길이었다.

염려와 조심하란 당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함.

특히나 이 미묘함은 시간의 서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부터 켜켜이 덧대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짐작하신 것 같달까.

이를테면 제가 시간을 역행한 회귀자라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절 그에 대해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타지에서 개고생하다 돌아온 자식을 보듯 할 뿐.

“가자꾸나. 이안 너를 위해서라도 이 전쟁을 속히 끝내야 할 터.”

* * *

에루리안에서 살리카의 로토투아까지 단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내딛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침입자를 막아라!”

워프 게이트에서 파호이 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살리카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독기로 가득 차서 겹겹이 인의 장막을 만든 그 모양새가 뭐랄까.

마치 화마에 쌓인 붉은 숲 같았다.

여전하게 가주를 따르는 자들.

가주의 최종 목적을 알든 모르든 물러서지 않을 자들이었다.

파호이를 지키려는 살리카와 그들을 뚫으려는 연합군.

두 진영은 물러섬 없이 팽팽하게 부닥쳤다.

특히 연합군 쪽은…….

북쪽은 발리올 가주를 앞세운 발리올들이.

동쪽은 스톨레와 그의 명을 받는 정령사 협회가.

남쪽은 클로에와 그녀의 편에 선 살리카가.

서쪽은 뷔트시겐 가주와 그를 따르는 뷔트시겐이.

사면에서 살리카를 압박하며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자비를 두지 마라.”

뷔트시겐 가주는 살리카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단 한 걸음.

산책 나왔나 싶은 보폭이었다.

그 무심함에 응하듯 가주의 주변으로 미풍이 불며 빳빳한 제복을 어루만졌다.

주인에겐 살가운 바람이었지만 살리카 쪽으로 흘렀을 땐 매섭게 돌변했다.

더없이 사나운 칼바람으로 화한 것이다.

“크으읏.”

그것은 생살을 찢는 칼날이 되어 살리카 사이사이를 휘돌았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서걱.

무형의 바람은 상대가 도망치지 못하게 발등과 발목 사이의 급소만을 잘라냈다.

먹잇감을 무력하게 만든 뒤.

놈들이 다신 덤벼들지 못하도록 맹렬히 찍어눌렀다.

털썩.

폭압적인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살리카들은 무릎을 꿇었다.

등급이 낮은 자들은 마냥 식은땀을 흘려댔고, 카르디아 1성 이상은 어떻게든 저항하려 애썼다.

“크읏. 역시 가주라 이건가.”

“하늘 위의 하늘이라더니 과연.”

비록 적이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을 지배하는 일족, 그 말을 오롯하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한들.

“물러서지 마라!”

장로들 셋은 위압에 저항하며 바들바들 몸을 일으켰다.

파호이 산을 지켜라.

자신들의 하늘, 살리카 가주에게 받은 임무를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주께서 명하셨다. 적들의 침입을 허용치 마라!”

필사적인 살리카들을 보며 뷔트시겐 가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충성스러운 자들이었다.

살리카 가주를 따른다 할지라도 충은 충이었다.

이 때문에 가주는 어느 한구석 안타까워졌다.

“마냥 충성하는 것만이 충은 아니지.”

가주의 나지막한 음색을 살리카들은 똑똑히 들었다.

비수처럼 꽂히는 한 마디.

신랄한 너그러움이 살리카 진영에 정처 없이 퍼져갔다.

“주군이 잘못된 길을 간다면 말리는 것 또한 충심. 한데 그런 자가 없다니 참으로 안타깝군.”

“주군이 가시는 길을 판단하는 것은 불충이외다.”

“마냥 따르기만 하는 것은 집에서 기르는 개도 할 수 있는 것.”

적어도 사람이라면 개 이상은 되어야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신랄한 충고가 이어지자 살리카 장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다만 제 신념과는 너무도 달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여 장로는 제 소신을 보여주듯 일족의 상징인 불의 정령을 꺼내 들고선 짓쳐 들었다.

“개가 되든 뭐가 되든 주군의 명은 절대적이오.”

“절대적이라…….”

“이곳에 있는 우리의 숨통을 끊어야 길이 열린다는 말이외다.”

불의 정령들이 저마다 쥔 사슬을 빙빙 돌렸다.

차랑 차라랑.

족히 기백은 되는 것들이 마찰하니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불꽃이 인 사슬이 뷔트시겐 진영을 향해 쇄도했다.

마치 물살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탄력적이었다.

촤아아악.

뷔트시겐 쪽으로 날아간 사슬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단순 연결이 아니라 제법 큰 감옥을 만들어내는 거였다.

족히 수십은 가둘 수 있는 촘촘한 사슬 감옥.

그것들은 뷔트시겐 진영의 여기저기에 빠르게 생성됐다.

이후 아가리를 벌리고 적들을 포획하려 무자비하게 불의 사슬을 내리쳐댔다.

흉포한 불길에 장로들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보다시피 우리를 섣불리 치워버릴 수는 없을 거요.”

“잔재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는지.”

장로들의 오만을 일깨워주려는 듯 뷔트시겐 가주가 눈썹을 구겼다.

미세한 동작.

하지만 그만으로도 가주의 주변에 수백 개의 나뭇잎이 생성되었다.

나뭇잎은 사슬 감옥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활강하는 매처럼 용맹하게 비행한 그것들은 사슬을 쉬이 끊어냈다.

고작 나뭇잎일 뿐인데 그 절삭력이 괴물 같았다.

“이 무슨…….”

장로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격의 차이가 확연히 와 닿았달까.

이를 악다무는 그들에게로 건조한 나뭇잎이 다시 쇄도했다.

살리카 진영으로 파고드는 나뭇잎.

그것들은 팽그르르 회전하며 초고온의 마찰열을 일으켰다.

화륵 화르르륵.

나뭇잎에서 피어난 검은 불길은 살리카들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삼켰다.

“크아아앗!”

불을 다루는 자들이 가짜 불에 잡아먹히는 기묘한 광경.

그 모습에 적군은 물론 아군인 뷔트시겐마저 숨을 죽였다.

미치도록 소름 끼치는 실력 앞에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이 같은 상황은 다른 진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쪽의 발리올 진영.

“다 덤벼. 하나씩 들어오지 말고 비겁하게 떼로 몰려오라고.”

발리올 가주가 주먹을 말았다가 쥐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삽시간에 일어난 대지가 살리카들을 이불처럼 말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뭐가 지나갔나 싶은 짧은 찰나에 그들은 삶은 콩처럼 으깨져 버렸다.

“…….”

비명도, 짓이겨질 때 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허용된 건 오직 침묵뿐이었다.

대지의 노래가 극의에 달한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

잔인하다 못해 흉악한 기술 앞에 살리카들은 망연자실해졌다.

비벼 볼 만해야 비벼보지.

충심이고 지령이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속절없이 지워져 갔다.

가주들이 앞장서서 싸운다는 것.

이것만으로 이미 승패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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