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파죽지세로 밀고 가다 보니 어느새 파호이 산이었다.
산의 초입, 이안은 시체가 쌓인 전선을 돌아보았다.
더는 저항할 살리카가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자조차도 대개가 전투 불능 상태였으니 말해 뭐하랴.
“이게…… 진짜 끝인가.”
이안은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문지르며 파호이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가주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 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 모습이 이상했는지, 아니면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인지.
아버지가 이맛살을 좁히며 이안에게 말을 건넸다.
“이상하리만치 쉽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예. 살리카 가주 그자답지 않네요. 서 때문에 시간을 벌어야 하는 자가 고작 저들로만 방패막이를 삼다니.”
“흠.”
“아버지나 발리올 가주만 움직여도 지금 같은 결과가 생길 걸 알 텐데.”
“그자라면 모를 리 없지. 한데 고작 하루도 못 버틸 전력이라니.”
“…….”
찝찝함이 떨궈지지 않았다.
어쩐지 뒷골이 서늘했지만, 실체가 없는 불안이었다.
살리카 가주에 대해 잘 알다 보니 괜한 걱정이 든 것일지도.
“공연한 노파심에 걱정이 늘어졌네요.”
“아니다. 신중해서 나쁠 거 없지.”
“이제 꼭대기까지 단숨에 치고 가야겠어요.”
이안은 마력 상태를 점검하며 다시 전투에 돌입할 채비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끝마무리였다.
남은 한 걸음, 그 한 걸음만 차분히 밟으면 확실하게 매듭을 지을 수 있다.
이제 곧…….
“뒤로 물러나라!”
이안의 상념이 잘림과 동시에 뷔트시겐 가주가 고함을 내질렀다.
골을 울리는 외침에 연합군은 자동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막 자리를 벗어난 즉시였다.
파아앗.
지면을 뚫고 무언가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
사방으로 날리는 뿌연 흙먼지에 가려진 형상들.
그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육중한 몸집만은 또렷하게 잡혔다.
대체 뭐지?
뼛속까지 쑤시는 한기에 이안은 기감을 날카롭게 벼렸다.
먼지가 가시며 대번에 드러난 것은…….
“키메라?!”
실로 괴이했다.
사람의 머리통에 고래처럼 육중한 몸집, 네 개의 팔과 등에 달린 날개.
무어라 부르기 힘든 괴생명체가 연합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총 서른.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호이를 에워싼 그것은 지난 생에선 본 적이 없는 거였다.
설마…… 실험이 이미 성공했던 건가.
어느 틈에, 어떻게.
머릿속에 의문이 꽉 들어찼지만 당장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슨 놈의 등급이…….”
실험체의 등급이 아예 가늠되지 않았다.
미정.
미지 만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또 있던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동요를 감지한 듯, 실험체가 목구멍을 비틀고 울부짖었다.
끼에에에엑.
귀청이 나갈 듯한 초음파가 쏟아진 전방.
“끄어어억!”
일직선상으로 공기가 잘게 떨리며 연합군의 신체 여기저기가 잘려 나갔다.
분해된 피육과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거였구나.”
이안은 저도 모르는 새 중얼거렸다.
어쩐지 살리카 가주가 너무 쉽게 본진을 내어준다 했다.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닌데 말이다.
저것들을 방어선 삼을 요량이든 어쩌든 확실한 건 그거였다.
저 실험체가 비장의 수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싸움이 쉽지 않을 거라는 것.
다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연합군 측에 침묵이 흘렀다.
‘이 상태로 흐름이 꺾이면 안 되지.’
이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오쿨루스의 결을 시전 했다.
등급 미정인 저것의 약점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식하게 강하다 해도 약점은 있기 마련.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그것이었다.
하여 이안은 꼼꼼하게 실험체를 살펴보았다.
“……뭐지.”
실험체는 마력의 흐름이 과한 탓에 모든 부위가 약점이었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거기가 급소라는 뜻.
이러면 얘기가 쉬워진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맘이 드는 것일까.
* * *
“허억. 허어억.”
이안은 단내가 나는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었다.
쉴 새 없이 마력을 쏟아부었더니 호흡이 달렸다.
“이런 미친.”
이안의 치닫는 숨이 초음파를 쏘고 있는 실험체에게로 향했다.
연합군의 공세에도 놈들은 아주 팔팔하게 움직거렸다.
사방 천지가 약점?
저것들은 약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약점을 한 방에 덮어버리는 능력이 존재했으니까.
바로 초속의 재생력.
“어떻게 저런 속도가.”
불화살 수백 개가 꽂혀 피가 철철 나는데도 화상을 덮으며 살이 차올랐다.
거죽이 원상복구 되는데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어중간한 공격은 먹히지도 않았다.
적어도 장로급은 되어야 다리 한 짝이나마 재생을 늦출 수 있는 정도?
이런 실정이라 파호이 초입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저것들이 그냥 산지기가 아니라 결계라는 거였다.
즉, 저것들을 죽이지 못하면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얘기.
콰과과광.
잠깐 탐색하는 사이 지근거리의 땅이 폭발했다.
실험체가 팔을 휘두른 것이다.
뿌연 흙먼지가 하늘로 솟구쳤고, 고함과 비명이 한데 뭉쳐 울렸다.
연합군이 살점과 피를 처참하게 뿌리며 꼬꾸라졌다.
검붉은 핏물이 게워진 대지.
붉은 웅덩이를 이룬 그 땅은 얼마 안 가 물처럼 녹아내렸다.
심지어 산성화된 그 자리가 점점 커지며 연합군이 설 자리를 뺏고 있었다.
전투를 벌일 장소를 협소하게 만들 뿐일까.
녹아내린 자리에 까딱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산화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죽어가는 자가 내는 비명이 지축을 뒤흔들어댔다.
전선 여기저기서 울리는 소리라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
멍멍한 귀로 전장을 담은 이안은 쥐어짜듯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
그 일념에 전신에서 푸른 빛이 용오름 치며 일어났다.
쏴아아아.
이내 땅의 균열을 메우려는 듯, 연합군의 밭은 숨을 봉합하려는 듯 비가 내렸다.
치유의 비가 끊임없이.
실타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친애하는 얼굴이 다가왔다.
아버지였다.
“이안, 괜찮은 것이냐.”
“……아, 괜찮습니다.”
“너와 레브를 비롯한 루하흐 덕에 버티고 있다. 아비로서는 무리하지 말라 말하고 싶으나…….”
“버틸 만합니다.”
이안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 끝을 위로 당겼다.
눈앞이 어지러웠으나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이 멍하기 때문인지 시간 감각마저 놓쳐버린 것 같았다.
“아버지, 교전한 지 얼마나 지났어요?”
“하루가…… 지났다.”
“하루. 그럼 실험체는 얼마나 처치됐어요?”
“고작 세 마리 처치했다. 나와 장로들이 합심해서 고작 셋.”
상황이 좋지 못했다.
녹스가 말한 일주일 중, 벌써 닷새가 지났고 이제 이틀 남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도 성과 없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타개책이 없을까.
마력을 때려 부어 처치하는 것 말고 다른 수가.
“목을 노려. 다른 곳 말고 뒷목을.”
이안의 고민에 답을 주듯 누군가가 확고한 목소리를 냈다.
소리의 주인은…… 라이라프스였다.
대체 저놈이 여기에 왜 온 걸까.
가라고 했더니 말 안 듣고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진짜 답이 없는 놈이었다.
“뒷목을 4가지 원소로 동시에 공격하면 돼.”
이안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라이라프스가 설명을 덧댔다.
“밑져야 본전인데 내 말대로 한번 해봐. 내가 실험실 최고참으로 있으면서 들은 정보니까 확실해.”
놈이 이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웃음을 내보였다.
저번에 장담한 대로 제 존재가 도움이 될 거라는 자신감이 엿보인달까.
놈의 의도가 뭐든 방도가 있다면 잡는 것이 상책.
“그렇게 되면…….”
이안의 말은 도중, 또 다른 청아함이 끼어들며 잘려나갔다.
“내가 저 아이의 말대로 해보죠.”
“……5황녀님.”
라이라프스의 뒤로 독수리 문양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우아한 위세가 넘쳐났다.
“너무 늦게 온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5황녀는 은색 머리카락을 질끈 묶으며 멋쩍게 웃었다.
“명분 따지기 좋아하는 국무원 늙은이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았어요. 이보다 제국을 흔드는 중요한 사안이 어디 있다고 이리저리 재는지.”
국무원은 가문의 경우로 치환하자면 원로원이었다.
“제국을 지키는데 방만한 국무원을 대신해 내가 여러분께 사죄하겠습니다.”
5황녀가 고개를 숙였다.
보여주기식일지라도 효과적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그녀는 라이라프스가 알려준 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키이이익.
방법이 먹혔는지 실험체가 고통스러워하며 울음을 빼물었다.
재생력도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고.
돌파구가 생기자 침잠하던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각 원소들과 공조하라!”
“무조건 뒷목을 노려야 한다!”
사령관들의 외침을 따라 조를 이룬 연합군이 전장을 활발하게 누볐다.
이전보다 전투가 확실히 유연해졌다.
그렇다고 마냥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장로들 여럿이 달려들어야 상대가 되는 실험체가 호락호락할 리 없잖은가.
어렵사리 그 수를 줄여나갈수록 날짜도 같이 줄어들어 갔다.
닷새째, 엿새째가 저물고 어느덧 마지막 날.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 * *
‘더는 지체하면 안 되는데…….’
이안은 사선으로 고개를 틀어 11시 방향에 있는 한 무리를 보았다.
칼브란과 1장로, 그리고 클로에 교수가 주축인 무리.
그들은 합심해서 실험체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각 원소를 뒤섞은 마력탄을 끊임없이 생성해내면서.
까아아아악.
탄이 생성된 즉시, 바람 까마귀들이 마력탄을 움켜쥐고 활강했다.
추진력에 탄력이 더해지자 녀석들은 실험체의 뒷목에 탄을 박아넣었다.
단단한 외피를 단박에 뚫은 후 숨통을 끊겠다는 전략.
탄이 박힐 때마다 실험체의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연이은 공격에 치명상을 입은 실험체가 팔들을 기괴하게 꺾으며 발광했다.
기기긱.
각도에 제한이 없는 팔들이 까마귀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예측할 수 없는 동선.
이로 인해 까마귀가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이런 육시랄!”
늘 웃는 상이던 칼브란의 얼굴이 한껏 구겨지고 말았다.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고도 칼브란조차 고전하고 있는 상황.
그 광경에 이안은 일자로 입을 꽉 다물었다.
총 서른 마리 중 이제 남은 실험체는 다섯이었다.
다섯.
애초 후미에 있던 저것들은 지금껏 상대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최후의 방어선이기 때문일까.
장로들의 공격조차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만들어버렸다.
거기다 뒷목을 집중적으로 공격해도 잘 먹히지 않았다.
그 탓에 접근할수록 도리어 사상자만 늘어가고 있었다.
고작 하나를 상대하는데 이전 실험체들을 죽이며 나온 사상자의 합보다 현 사상자의 수가 더 많았다.
푹! 푸슉!
실험체의 팔이 누군가의 생살을 찢을 때마다 피육음이 섬찟하게 들렸다.
연합군 중 누군가가 또 죽었다.
죽음은 이토록 가깝고 생은 언제나 너무 멀리 있다.
이안은 사상자와 사라져가는 시간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는.’
돌파구를 위해 그는 지척에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레브, 올리브.”
“응!”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두 사람은 이안의 의도를 명확하게 읽어냈다.
상황을 반전시키며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자는 그들뿐이었다.
이곳에서 제일 약했으니까.
약한 자의 투지는 다른 이들에게 틀림없이 자극제가 될 것이다.
이를 알기에 누구도 망설이지 않았다.
타다닷.
여기저기 산개해있던 C반은 전부 이안에게로 몰려들었다.
“대지의 보호막. 무조건 이안을 보호해.”
올리브의 외침에 발리올들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들의 신호에 대지의 정령들은 일제히 보호막으로 화했다.
이안을 겹겹이 감싼 보호막은 궁극기였다.
정령 자체가 보호막이 되었으니까.
단단함을 덧입고 이안은 실험체에 돌진했다.
투캉!
실험체의 팔이 이안에게 쇄도했지만 전부 가로막혔다.
보호막 하나가 깨지면 다른 하나가, 또 하나가 깨지면 뒤의 보호막이 차례로 그를 수호했으니까.
“크으윽.”
그 탓에 모든 충격이 시전자인 발리올들에게 전해졌지만 다들 버텨냈다.
뒷발에 힘을 주느라 땅바닥이 패이며 축축한 흙이 발등을 수복하게 덮었다.
“버텨!”
“이안이 저 괴물한테 접근할 때까지.”
왈칵 쏟아진 핏물이 입술 새로 새어 나와도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