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04화 (204/214)

제204화

애쓰는 발리올들을 북돋우려는 듯.

살랑살랑.

따스한 물의 타래가 그들을 감싸며 내상을 회복시켰다.

레브의 다중치유였다.

방패가 방패로의 역할을 다하면 레브가 그것을 견고하게 보조해주었다.

언제나 그랬다.

무엇을 하든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게 녀석은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했다.

콰과괏.

레브가 치유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얼음 정령을 움직였다.

결속자의 뜻에 따라 정령의 얼음 가시가 실험체에게 완곡히 박혔다.

박힌 가시를 통한 흡혈.

짱짱한 흡혈 덕인지 일순 치유력이 상급 정령사만큼 높아졌다.

“이안 지금!”

아이들의 지원을 받으며 이안은 목표물을 향해 솟구쳤다.

바람의 선을 접어 빠르게, 빠르게.

파아앗.

광포하게 휘두르는 실험체의 팔을 타고 위로, 놈의 어깨 위로.

목표가 코앞이었는데…….

퍼어억.

고개를 뒤로 꺾은 실험체가 혓바닥으로 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사정없는 손속에 이안은 그 채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크읏.”

대지의 보호막이 충격을 흡수해서 그나마 곤죽이 되는 건 면할 수 있었다.

저번에 다친 옆구리가 또다시 덜컥거렸지만, 그까짓 것.

슬쩍 갈비뼈를 문지른 이안은 재차 실험체에게 달려들었다.

질긴 벌레가 성가신가 보다.

실험체가 지금껏 사용하지 않던 날개를 퍼덕이며 육중한 몸을 띄웠다.

손바닥 높이 정도지만 분명한 비행이었다.

콰과광!

뜬 만큼 지면을 내려치는 강도가 무작스러웠다.

그 반동으로 이안은 도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쿨럭.”

핏물로 젖은 땅이 질척질척했다.

철퍽 소리가 나는 땅을 제약 없이 구르다 이안은 튕기듯 일어섰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고작 이 정도의 방해 공작에 꺾이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깟 놈 하나 못 잡아서야.’

발에 힘을 준 이안은 다시금 실험체의 몸을 발판 삼아 도약했다.

전장의 모두가 그를 보았으나 시선을 느낄 새가 없었다.

오직 이안이 집중하는 것은 실험체의 뒷목 뿐.

‘내가 너 하나는 죽이고 만다.’

투지는 이안을 실험체의 뒷목까지 인도했다.

스릉.

이안은 4개의 원소를 칼날처럼 벼린 뒤 놈의 뒷목에 내리꽂았다.

살을 가르는 서늘한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져왔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내리쳤다.

푹! 푹! 푸욱!

재생하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고 그 뼈마저 가루가 될 때까지.

칼날을 타고 누군가의 피가 흘렀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제가 죽인 하나, 이 하나가 흐름을 바꿀 것이다.

그러니 해내야 한다.

시뻘건 눈으로 미친 듯 쑤셔대자 어느 사이 실험체의 몸이 기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쿠우웅!

놈의 명줄이 다하며 재생이 멈추었다.

분명 동력이 끊긴 건 놈인데 어째 제 몸이 고장 난 듯 털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는지.

마력이, 아니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현기증이 일며 몸이 종이짝처럼 뒤로 넘어갔다.

중심을 잡아야지 싶던 순간 누군가가 그의 등을 살포시 받쳤다.

“수고했구나, 이안.”

아버지의 따스한 음색이 난자된 실험체 위로 드리워졌다.

그제야…… 해냈다는 실감이 났다.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지자 이안은 미소를 내보였다.

여유를 가장했으나 소리가 줄곧 아득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의식이 자꾸 끊기는 게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 * *

“허어어억!”

눈을 번쩍 뜬 이안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깐 눈을 감았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쯤 흐른 것일까.

이런 순간에 정신을 놓다니 단단히 미쳤지, 미쳤어.

자책하는 이안의 코끝으로 살점이 익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지독하게 풍겨왔다.

아직 전장을 헤매고 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살리카 가주가 시간의 서를 쓴 뒤의 미래?

혼란스러워하는 이안의 귓가로 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말아라. 악몽이 아니다.]

“…….”

[고작 5분 정도 기절해 있었을 뿐이다.]

“5분…….”

이안은 같은 말을 곱씹으며 전장을 직시했다.

다들 죽자 살자 실험체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직 길목을 뚫지는 못했다. 세 마리 남아서 방어막이 느슨해지긴 했지만.]

“헐거워졌다고?”

[죽은 놈이 많아지면서 결계가 약해졌으니 뭐.]

“그럼 결계에 작은 틈 정도는 만들 수 있겠네?”

[그렇겠지.]

“녹스, 시간의 서 해제까지 얼마나 남은 것 같아?”

[많이 잡아 봐야 1시간?]

“후우.”

이안은 까끌까끌한 입술을 축이면서 일어났다.

실험체의 결계가 완벽하게 해제되길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늦는다.

가슴팍에 손을 대 본 이안은 마력핵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력 고갈이 일어나 맥이 느리게 뛰었다.

기술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였지만 상관치 않았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나만이 쓸 수 있는…… 방법.

이안은 곧은 눈빛을 하곤 즉각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깔끔하시던 분이었는데…….

지금은 먼지와 핏물을 뒤집어쓴 채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아버지.”

“……조금 더 쉬거라.”

“다 쉬었어요. 그보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제가 꼭대기로 갈 틈을 만들어주세요.”

“틈이야 지금 상태라면 어떻게든 만들어 볼 수는 있다만 설마 혼자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혼자 가려 합니다.”

“위험하다. 살리카 그자를 상대하는 것인데 너 혼자서는.”

“그자를 피해 시간의 서를 파괴할 방도가 있어요. 근데 이 방법은 저 혼자 해야 하는 겁니다.”

“흐음.”

“혹시 몰라 그라나토스에서 미리 알아 온 건데, 꽤 안전한 방도에요.”

이안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 때문에 녹스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하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다소 엉뚱하게 굴어도 언제나 계획이 있는 놈이었으니까.

녹스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가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자를 피해 안전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면…….”

“실상 저 혼자 가는 것도 아니에요. 녹스가 같이 가잖아요.”

“……알았다. 무리하지는 말거라.”

“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잠시 틈을 두다가 웃으며 살을 덧붙였다.

“아버지, 혼란이 수습되면 또 같이 낚시가요.”

“그러자꾸나.”

부드러이 답한 아버지는 곧장 실험체를 공격했다.

무형의 바람이 놈을 쑤시고 묶고 괴롭혔다.

정점에 달한 자에게는 바람의 형태가 중요치 않았다.

바람 자체가 아버지였으니까.

무차별적인 공격에 실험체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그와 동시에 놈과 연결된 등 뒤의 결계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지금.’

기회를 엿보던 이안은 주저하지 않고 질주했다.

키에엑.

그의 움직임에 심기가 상한 듯 실험체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안을 붙잡지는 못했다.

바람에 손이 묶이며 자유를 억압당했으니까.

그 틈에 이안은 미끄러지듯 놈의 다리를 스쳐 나아갔다.

그렇게 실험체가 굳건히 지키고 있던 저지선을 넘어섰다.

‘이 방도도 세 마리밖에 안 남아서 가능한 거지.’

이안은 머뭇거리지 않고 실험체와 거리를 벌렸다.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호이 산을 올랐다.

그러자마자 실험체들이 그를 저지하려고 마구 내달려왔다.

쿵. 쿠웅.

지축을 뒤흔드는 걸음들이 섬찟할 정도였다.

멀었던 거리가 어느 사이 단숨에 줄어든 것 같았다.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연합군에 가로막힌 것이다.

그때에서야 이안은 뷔트시겐 진영 쪽을 돌아보았다.

전장을 지휘하는 아버지가 보였다.

언제나 존경스러운 아버지가.

잠시 눈에 담고 있자 아버지가 제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몸 성히 다녀오거라.”

“……예.”

이안의 대답에 포개지듯 무수한 눈빛들이 따뜻하게 쏟아졌다.

칼브란과 알란, 그리고 장로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무사히 다녀오라는 눈인사를 보내왔다.

무한한 신뢰 위로 아이들의 해맑은 손 인사도 쌓여갔다.

“대장, 먼저 가서 기다려. 이거 해치우고 금방 따라갈게.”

“수호자님, 우리 대장 잘 부탁드려요.”

“대장이 무리하려고 하면 꼭 말려주셔야 해요.”

아이들은 일제히 녹스를 보며 부탁을 했다.

각종 원소를 쓰며 싸웠는데 녹스가 수호자인 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애초 감출 생각도 없었기에 이안은 설핏 웃음을 내보였다.

* * *

“여깄다.”

이안은 산을 오르는 도중 화염모래초를 뽑았다.

화염모래초.

용암지대에만 피는 독초인데 마력 회복에 도움을 준다.

독초도 잘 쓰면 약이라 하지 않던가.

독을 빼는 방법이 쉬워서 회복제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우물우물.

흙만 턴 이안은 생으로 화염모래초를 씹어먹었다.

[이안!]

그의 행태에 놀란 녹스가 이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어서 뱉으라는 몸짓에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력을 회복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어이구, 이놈아.]

“물의 가시를 먹고 재생력이 높아졌잖아. 이 정도 독은 버틸 만해.”

[아무리 그렇더라도 독이란 말이다.]

“마력이 있어야 살리카 가주를 상대하지.”

[그래도 그렇지, 이 독한 것.]

“시간 없어. 가자.”

이안은 쉬지 않고 달리며 채집을 동시에 했다.

화염모래초를 씹어 회복한 마력을 이동에 쓰고, 또 주워 먹은 뒤 이동하고.

무한 반복이었다.

“쿨럭.”

독초를 먹은 이안의 입가에선 쉴 새 없이 핏물이 흘렀다.

흙에다가 설컹거리는 조각도 같이 씹혔다.

독에 녹은 내장 덩어리인가.

“퉤.”

무심하게 뱉어낸 이안은 오로지 꼭대기를 향해 나아갔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차마 말릴 수 없는 녹스는 남은 마력을 쥐어짜 치유를 도왔다.

그마저도 이안이 말려서 도중에 관둘 수밖에 없었지만.

“마력 아껴둬. 꼭대기에 가면 녹스 네가 할 일이 있어.”

[할 일?]

“가주의 수호검이 안 보였어. 그렇다는 건…….”

[그렇다는 건 가주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겠지.]

“어. 수호검을 상대하는 건 녹스 너야. 그 참에 난 가주를 만나고.”

[한데 말이다, 이안. 대체 방도가 무엇이냐?]

“아, 그거.”

[살리카를 막을 방도를 라에라트가 알려준 적 없잖으냐.]

“있어, 그런 게.”

[뭐길래 나한테도 안 가르쳐주누.]

“보면 알아.”

이안은 대충 얼버무렸다.

방법은 간단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녹스가 말릴 것이다.

그렇기에 절대로 알려줄 수 없었다.

제가 입을 다무니 녹스가 어서 말해보라며 자꾸 채근했다.

궁금해하는 녀석에게 침묵으로 대응하는 사이, 어느덧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호검 에일라 폰투스.”

수호검이 초대 가주의 무덤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사실 그녀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면 성향이 누구보다 클로에 교수님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본성은 선하나 가주를 위해서는 악귀가 될 수 있는 자.

묘한 이중성을 확인할 때마다 차라리 애초 클로에를 주군으로 모셨다면, 이란 마음이 몇 번이나 들었었다.

그러나 가정일 뿐이었다.

수호검은 언제나 살리카 가주의 수호검일 뿐이다.

말로 설득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녹스.”

수호검을 무력으로 상대하는 건 녹스에게 맡겼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살리카 그자를 만나야만 하니까.

펄럭.

녹스의 등에서 돋아난 바람 날개가 수호검의 발치로 내리꽂혔다.

그 즉시 불을 품은 돌개바람이 일었다.

뼈를 녹이는 위력에 수호검이 바람을 피하려 몸을 비틀었다.

잠깐의 틈.

이안은 이번 역시 쥐구멍을 통과하는 쥐처럼 돌진했다.

“이안 뷔트시겐!”

수호검의 외침이 들렸지만 이내 대지가 일어나 소리를 먹어버렸다.

벽을 쾅쾅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든 저지하고 싶겠지만 수호검이 상대해야 하는 건 녹스였다.

수호자 녹스.

힐끗 흙벽을 일별한 이안은 무덤 깊숙이 들어갔다.

한동안. 서두는 그의 발소리만 내부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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