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발소리마저 먹혀버린 곳.
시간의 서를 감싼 원형의 결계가 전부 꺼져 있었다.
기묘하게 발하던 빛이 모두 사그라든 자리.
어둠이 얼룩진 그곳에 서만 적막하게 놓여있었다.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을 오롯이 받으면서.
“때맞춰 왔군, 이안 뷔트시겐.”
살리카 가주가 비소를 띄우며 시간의 서에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내비치는 손짓.
저 보라고 부러 저러는 거였다.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다는 과시를 하기 위해 말이다.
그러니 해제해 놓고 제가 올 때까지 버젓이 놔둔 것일 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루하지는 않았네. 네놈의 일그러진 표정을 볼 생각을 하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마지막 만찬은 충분히 즐긴 셈일 테니까요.”
“하. 그것도 회귀한 자의 자만인가?”
“…….”
경이롭다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자였다.
저 좋은 머리를 되지 않는 야욕에 쏟아부어서 그렇지.
물론 황제가 되겠다는 꿈이 나쁜 건 아니다.
그것을 위해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문제일 뿐.
제 꿈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권리가 저자에게는 없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나 역시 그러한 것을.”
살리카가 열망 어린 눈빛을 하곤 시간의 서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알의 주인이라는 것, 그것은 결론이 아니었지. 또 다른 의문의 시작일 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내가 선수 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단 거군요.”
“고심하다 보니 어떤 결론에 다다랐지. 네놈이 시간을 역행했을 거라는.”
“마침 시간의 서도 있으니 미친 생각은 아니란 확신이 들었겠고요.”
“눈앞에서 본 것처럼 얘기하는군.”
“아, 자만이 아니라 제가 좀 잘났습니다.”
이안의 능청에 살리카가 실소를 터트렸다.
회귀까지 했음에도 결국 실패를 목전에 둔 늑대 새끼.
그런 자가 부리는 여유가 참으로 가소로웠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그 작은 허세 정도는 너그러이 눈감아주지.”
“오만한 건 그쪽인 것 같군요. 뭘 눈감아주겠다는 건지. 어차피 오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텐데.”
“하. 시건방진 놈.”
“아, 들렸습니까. 혼잣말이 너무 컸나 봅니다.”
너스레를 떤 이안은 짝다리를 짚고 건들거렸다.
자세는 이래도 절대 시간의 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왕 들린 혼잣말, 제가 회귀자로서 조언 하나 해드릴까요.”
“조언?”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더군요. 아는 것이 많으니 오히려 잠도 안 오고, 뭣 빠지게 노력해야 하고, 무튼 진창을 굴러야 하지요.”
“…….”
“그것을 고매한 가주님께서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위하는 척 시비 거는 재주가 제 애비를 똑 닮았군.”
비아냥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안 또한 말을 가릴 필요가 없어 속엣것을 전부 끄집어냈다.
“아, 그거 아십니까. 자신이 똑똑한 줄 아는 놈들이 꼭 제 꾀에 스스로 넘어진다는 거.”
“…….”
“지금만 봐도 뭐. 나 같았으면 진즉 시간의 서를 발동시켰을 텐데.”
“무력감에 발버둥 치는 늑대 새끼는 보고 가야지.”
“하. 손이라도 흔들며 배웅이라도 해줄까요.”
“뭐 나쁘지 않겠군.”
“뜻대로 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겠습니다. 말 그대로 회귀까지 했는데 실패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실패할 수 없다? 곧 죽을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요.”
살리카를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다.
그게 설령 목숨을 내놓는 일일지라도.
하여 그는 회귀한 이후 단 한 순간도 내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오늘을 살아내는 것에 최선을 다했을 뿐.
과거에서 살아 돌아온 망령이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였다.
그가 매사 느긋하게 굴었던 까닭도 이 때문이고.
그러니 지켜내겠단 애초의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죽음 따위는 결코, 두렵지 않다.
망령이 본디 있어야 할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조소를 날린 이안은 삐딱하게 입을 열었다.
“살리카 가주, 나는 그저 오늘만 살 뿐입니다.”
“…….”
“한데 가주는 내일을 보고 걷는군요.”
“하. 그건 누구나 그렇지.”
“그러니 영영 평행선이겠군요.”
가주를 막고, 저는 돌아가고, 그럴 수 있는 절묘한 방법이 있다.
‘저자와 서를 통째로 날려버리면 돼.’
이안은 가슴팍에 손을 얹고 녹스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이안, 명심해라. 각기 다른 마력의 고리에 똑같은 양의 마력을 채워선 안 된다. 그러면 네놈의 몸이 ‘펑’ 터져버릴 것인즉.>
이거였다.
이 방법이면 쥐꼬리만 한 마력으로도 살리카 가주를 막을 수 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마지막인 것 같으니, 가주님께 조언 하나 해드리지요.”
“조언?”
“다리 뻗을 곳을 모르는 치기는 자칫 목숨줄을 끊을 수 있습니다.”
“하. 내가 네게 했던 경고를.”
“본인 얘기인 줄도 모르고 어찌 그리 찰지게 하시던지.”
이안이 환하게 웃자 살리카가 본능적으로 시간의 서를 손아귀에 쥐었다.
위기감을 느낀 손길이었다.
쫓기는 건 저인데 어째서 가주가 쫓기는 표정을 지을까.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여긴 모양이다.
살리카가 시간의 서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에 맞춰 이안은 마력의 고리에 마력을 채웠다.
똑같은 양.
한 방울이라도 그저 똑같기만 하면 된다.
바람의 고리, 불의 고리, 대지의 고리, 물의 고리에 일정하게.
찰랑.
이안은 채워지는 마력에 귀를 기울이며 살리카에게 달려들었다.
3m, 2m, 1m…… 점차 좁혀지는 거리.
그에 따라 몸 안에서 터지는 은색 빛이 그를 마구잡이로 찔러댔다.
죽음과 닮은 빛무리 사이로.
[이안!]
녹스의 외침이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조차 환청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모호한 부름보다 오직 살리카 가주를 잡는 것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까.
가주의 손을 쥐었던가, 놓쳤던가.
이 또한 잘 모르겠다.
노란색인지, 청록색인지, 보라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를 알록달록한 빛이 덮쳐 온 탓에.
이안은 그저 아득한 빛 뭉치에 싸여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 * *
쾅. 콰아앙.
하늘을 찢는 소리가 파호이 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진동에 뷔트시겐 가주의 시선이 산꼭대기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이안이 말한 어떤 계획이 성공한 줄 알았는데.
“……!?”
산에 머무른 가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안이 있던 꼭대기가 통째로 날아갔으니 그럴 수밖에.
산허리가 잘린 채로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었다.
경악을 금치 못한 가주는 팬 곳을 향해 무작정 걸음을 내디뎠다.
“이안.”
제 아이가 저곳에 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저곳에 홀로.
감당키 어려운 고통에 몸부림치며 애타게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안!”
가주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내달리며 이안을 부르짖었다.
담담히 웃어 보이던 녀석의 마지막 모습이 어쩐지 마음 한편을 긁어내리더라니.
먼저 낚시 가자며 청을 하던 입가가 유난히 살갑더라니.
이러려고 그랬나 보다.
살리카 가주와 함께 죽으려고 그리 다정한 말을 남겼나 보다.
일그러지는 그의 시야가 자꾸만 얼룩졌다.
차가운 바람결에 말라도 말라도 그러지 않은 것처럼.
그사이에도 폭발로 인해 생긴 아득한 빛 뭉치는 무심하게 끝도 없이 솟구쳐 올랐다.
.
.
.
“빛이…….”
이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태양 빛에 눈을 감았다.
광원이 희한하리만치 저를 쑤셔댔다.
참아지지 않는 시큰거림에 그저 가만히 서 있는데.
“도련님, 이안 도련님.”
내리쬐는 햇볕을 뚫고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안은 상대를 보려고 손차양을 만들다 멈칫했다.
……손이 작았다.
한데 작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왤까.
이질감에 주먹을 말았다 폈다 하는 사이.
“어찌 나와 계십니까. 볕이 따가운데.”
칼브란이 차양을 씌워주며 차가운 레몬 에이드를 건넸다.
정작 줘놓고 배탈 나니 조금만 마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부산 떠는 그의 모습에도 지나가는 사용인들은 그러려니 했다.
집사장의 극성은 도련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거였으니까.
하여 무덤덤했으나 솔직히 그 마음이 이해되긴 했다.
도련님을 보면 절로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칼브란이 매일 빗겨줘서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
다소 창백한 얼굴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 붉은 입술.
거기다 앙증맞은 체구까지.
정말 인형 같은 외양이니 아니 그럴까.
“칼브란.”
“예, 도련님. 도련님도 등급 결과를 받고 기쁘신 것이지요. 해서 이 무더위에 나와 스승님을 기다리고 계신 것 아닙니까.”
“성취? 스승님?”
“여덟인데 에르그 2성을 달성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것이라 가주님의 기쁨이 크시답니다.”
칼브란의 기쁨에 동조하듯 누군가가 말꼬리를 잡았다.
햇볕을 등지고 등장하는 웬 노인 둘.
“껄껄. 가주님뿐인가. 이 노부도 기쁘다네.”
“오늘만은 1장로의 말에 동의해야겠군. 제자의 성장이 예상을 훨씬 웃도니 말일세.”
1장로와 2장로였다.
그들은 이안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들뿐일까.
정원을 지나가던 기사단도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분명 그러한데, 어째 심장 한편이 묘하게 낯설었다.
왠지 모를 이질감마저 든다고 해야 하나.
마치 간절히 바라던 것을 관조하고 있는 느낌?
무엇 때문인지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저는 마력핵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마치 없는 사람처럼 왜 이리 초조한지.
알 수 없는 간극을 누르며 이안은 시간을 채워갔다.
그렇게 여덟 살, 열 살, 열두 살, 열다섯까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이질감이 옅어져 갔다.
어떤 위화감도 사그라들었고 말이다.
“도련님.”
“……응?”
창밖을 보던 이안은 다정한 부름에 눈길을 돌렸다.
칼브란이 가죽 가방에 옷가지를 넣고 있었다.
“또 멍하니 계셨습니까.”
“아. 날 부르는…… 아니야.”
사실 이안은 간혹 저를 부르는 나직한 소리를 듣곤 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목소리.
귀에 익은 소리는 뭔가를 일깨워주려는 것 같았지만 그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어쩐지 명확하게 들어선 안 될 것 같단 느낌이 든달까.
이안이 상념에 빠진 틈에도 칼브란은 입을 놀렸다.
“벌써 도련님이 중앙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가 되시다니.”
“…….”
“이 칼브란 감격스러워 눈물이 납니다.”
이안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는 칼브란을 한참이나 달랬다.
15년을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서운할 만도 했다.
저 또한 그랬고.
한바탕 쏟아부은 칼브란이 떠난 뒤, 심란해진 이안은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혼자 있으니까 다시금 어떤 소리가 들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문득문득 들렸었던 나지막한 부름이.
애써 지워내도 끈적하게 달라붙어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번만은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귀를 기울여 보니 어디에선가 바다 향이 났다.
홀린 듯 그 향을 따라가는 동안 줄곧 파도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정박해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던 차.
이안은 물안개가 잔뜩 낀 어느 공간에 다다랐다.
그리고 누군가와 조우했다.
푸른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과.
소년은 손목에서 피어나는 룬어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이지러지는 언어들은 모두 고어였고,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해서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단어만은 제가 아는 것이라 망막에 꽂히듯이 들어왔다.
‘시간.’
그것을 읊조리자마자 불쑥 소년의 말이 머리통을 울렸다.
“이안 뷔트시겐.”
목소리가 선명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을 것을 알아. 네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이 그곳에 있으니까.”
“내가 바랐던…….”
“하지만 그대로는 시간의 틈바구니에 영영 갇혀버릴 거야. 네 나이 열다섯이 마지노선이니까.”
“갇힌다고?”
“설명할 시간이 많지 않아. 이젠 틈이 손마디 정도도 안 남았거든.”
소년은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았다.
“틈이 닫히기 전에 돌아가야 해.”
“…….”
“현실이 이 꿈보다 쓸지라도 너는 현실을 살아내는 놈이잖아. 내가 아는 너는 그런 놈이지. 그러니까 이젠 그만 헤매고 가자.”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재촉하지 않는 손을 이안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참 이상한 건 소년은 재촉하지 않은데, 그의 손목에 새겨진 룬어들이 저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스멀스멀 제 쪽으로 기어 오는 문자열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진해지는 룬어들을 보다 이안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나고 자란 뷔트시겐 저가 물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서 있던 정원조차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정말 꿈속을 헤맨 것인가.
이안은 느릿하게 소년 쪽으로 고개를 틀고는 잘게 떨리는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