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뷔트시겐 가주는 그라나토스의 어느 호수 앞에 섰다.
아르테리아 호수라고 불리는 곳.
헤르세의 영역인 이곳에 그가 발을 들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안.”
가주는 호수 중앙에 눈길을 두었다.
무언가를 가운데 두고 빛기둥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그는 천천히 중앙으로 나아갔다.
소리 없는 걸음새가 멈춘 그곳, 잔잔한 수면 위에 이안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벌써 보름째군.”
씁쓸하게 중얼거린 가주는 이안의 창백한 손을 힘주어 쥐었다.
맥박이 잡히지 않았다.
흡사 밀랍 인형처럼 이안의 심장은 무척 고요했다.
분명코 맥동은 없으나 죽음에 이른 상태도 아니었다.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가주는 제 새끼를 땅속에 묻지 못했다.
“이안, 솔직히 말하자면 아비는 이곳이 싫다.”
가주의 음색은 힘없이 늘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녀석에게는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애써 별거 아닌 척하며 가주는 덤덤히 이안의 머리카락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정성껏 정돈한 뒤에 그는 다시 혼잣말을 이어갔다.
“이곳의 비밀이 네게 가혹한 의무를 지운 것 같아서 말이다.”
“…….”
“그게 무엇인지 아비에게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했으면 최선을 다해 조력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다 할지라도 무엇인들 못 해주었을까.
한데 이안은 제가 짊어진 짐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 혼자 삭이다 결국 전부 싸 짊어지고 훌훌 떠나버렸다.
“이 매정한 녀석.”
가족이라고는 저와 나, 단 둘뿐인데 어찌 이리 야박한지.
“…….”
가주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고는 치받치는 것들을 억눌렀다.
입을 열면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 턱을 악다문 가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슬픔에 잠겨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아니었다.
이안이 제 목숨을 희생하며 지키려던 것을 지켜야 할 때였다.
살리카에는 아직 그자를 따르는 잔당이 있었고, 루하흐도 마찬가지였다.
히에로스 곳곳에 아직 불온한 자들이 숨어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
그들을, 썩어버린 뿌리를 잘라내야만 한다.
‘너를 위해서라도 그리 해야지.’
가주는 딱딱한 걸음을 옮겨 호숫가로 향했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본디부터 일행이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꽃 모양의 지팡이를 쥐고 있는 노인.
헤르세 수장과 마주한 가주는 고개를 옅게 끄덕거렸다.
“내 아이가 염원하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군.”
“가주님 안색이 무척 지쳐 보이십니다.”
“일이고 나발이고 내 새끼 옆에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아.”
“도련님이 뷔트시겐 저에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볼 수 있으실 터인데.”
“그라나토스여야만 이안의 상태가 이나마라도 유지된다 하니 어쩔 수 없지.”
“4대 관리자께서 이게 최선이라고 하셨지요.”
“…….”
“언젠간 분명 차도가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가주님께서 심려치 않으시도록 저 또한 도련님을 성심껏 돌보겠습니다.”
“부탁함세.”
가주는 떠나기 전 이안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녀석의 주변에는 꽃과 아침 이슬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헤르세 나름, 이안이 깨길 바라며 교감력을 높여주는 이슬을 깔아둔 것이다.
어제보다 양이 많아진 것이 생기는 족족 가져다 두는 모양이다.
이런 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녀석이 어떤 해코지도 당하지 않고 곤히 잠을 잘 수 있겠지.
불면증에 시달리며 단 하루도 편히 자지 못했던 녀석일지라도.
그리 생각한 가주는 호수에 눌어붙어 있던 몸을 단호히 돌렸다.
뷔트시겐 가주가 떠난 즉시였다.
노상 그래왔다는 듯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호수 중앙으로 향했다.
* * *
찰박찰박.
투명한 호수보다 더 시린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 레브였다.
그의 곁에는 이안의 정령들이 붙따르고 있었다.
“수호자님, 정말 이대로 가주님께 함구해도 되는 걸까요?”
[희망 고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거라도 가주님께는…….”
[무어라 할 것이냐. 이안은 지금 시간의 틈에 갇혀 있다. 한데 레브 너라면 이안을 꺼내올 수 있다, 네 손목에 새겨진 초대 바다 엘프의 표식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뭐 그리 말할 것이냐.]
“…….”
[솔직히 그마저도 불확실한 일이 아니더냐. 결국 이안이 네가 내민 손을 잡지 않는다면 구할 수 없는 것을.]
녹스는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벌써 보름째이다. 그동안 이안 그 녀석이 네 부름에 답한 적 있더냐.]
“……아뇨.”
[그것 봐라. 시간의 틈의 1년은 현실의 하루이다. 보름을 환산하면 미몽 속 이안은 벌써 열다섯이 되었지.]
“열다섯……. 하긴, 오늘이 지나면 이안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러니 하는 말이다. 이안의 아비에게는 비밀로 하는 게 낫다.]
가주에게 헛된 희망만 심어준 꼴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어설프게 발설했다간 가주의 가슴에 두 번이나 대못을 박게 될 수도 있다.
녹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냉정하게 분석했다.
슬프지 않아서라기보다 어떤 각오를 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내일이면 죽음의 유예기간이 끝나며 이안을 짓누를 테니까.
느리게 뛰던 맥동도 멈출 것이고, 정말 송장이 될 터였다.
“하아.”
레브는 이래저래 나오는 한숨을 어쩌지 못했다.
무거운 숨을 푹푹 쉬며 그는 제 왼쪽 손목을 문질렀다.
그때마다 룬어들이 일렁거리다 사그라들었다.
‘도서관 사서가 새겨 준 것.’
이것을 전해주며 사서는 의미심장하게 눈꼬리를 접었더랬다.
<이 표식이 언젠가는 이안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
그 도움이 이날을 위한 거였다.
시간의 서를 없애려 이안이 희생한 이때.
하여 이안이 시간의 틈을 정처 없이 헤매게 된 이때.
이안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의 파편을 가지고 녀석을 구하라는 거였다.
눈썹을 찡그린 레브가 이안에게 왼쪽 손을 뻗었다.
일순, 이안의 발치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그의 귓가에 꽂혔다.
벌써 보름째 반복되는 똑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레브는 통곡하는 이를 쳐다보았다.
까만 소, 남쪽 관리자 로르였다.
물론 로르뿐 아니라 루체와 오쿨루스도 이안 곁에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유독 로르에게만 시선이 가는 건 너무 서럽게 울었기 때문이다.
따라 울고 싶어질 정도로 짠한 모습을 한 채.
분명 그러한데…….
로르가 눈물을 찔끔대며 발굽으로 인중을 문지르자 끈적끈적한 액체가 길게 늘어졌다.
갈 곳을 잃은 그 액체는 결국 이안의 발치로 툭 떨어졌다.
“으헝헝. 왜 안 깨어나지?”
[초상났어? 왜 재수 없게 울고 그래.]
“이안이 잠만 자니까 그렇지. 분명 이안의 몸이 터지기 직전에 우리가 구해냈는데.”
그라나토스를 벗어날 수 없는 관리자들.
결속을 맺지 않은 이들이라도 숲을 나갈 수 있는 예외가 있다.
바로 주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로 인해 관리자 넷은 이안이 자폭할 때 강제 소환당했다.
결과적으로 이안을 구할 수 있었고.
이는 관리자뿐 아니라 이안조차 몰랐던 사실이다.
[뒤틀린 시간의 서를 파괴한 반동이 와서 그렇다니까 그러네.]
“어헝. 이안.”
한정 없는 로르의 슬픔을 잡아채듯 줄곧 생각에 잠겨있던 루체가 되짚듯이 물었다.
“몇 시간이나 남았지?”
다소 조급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이에 녹스가 잠깐의 시간차도 두지 않고 즉답했다.
[아, 8시간 정도?]
“후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숲의 기운이 진한 북쪽으로 옮겨 볼까.”
[알지 않누. 레브 저 녀석 때문에 안 된다는 거. 표식을 발동시키려면 탁기가 없는 순도 높은 물이 필요하니까.]
“저 꼬맹이가 쉴 때만이라도 기운을 받고 오면 좋을 터인데.”
[흐음.]
“우리는 못 들어가도 수호자 너는 이안을 탑에 넣을 수 있잖아.”
[그럼……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이따 해보자. 어차피 남는 수도 없는데 뭐든 해 봐야지.]
녹스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레브가 이안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손목에 새겨진 룬어들이 너울거리며 사슬처럼 이안을 휘감았다.
부디 이번엔 이안이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아니, 응답하고 손을 잡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레브는 물의 기운을 세밀히 느끼려 애썼다.
* * *
“……여긴.”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소년의 손을 잡고 물안개를 빠져나온 것까진 기억한다.
한데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집무실?
먼지 한 점 없는 걸 보니 여태 누군가가 사용하던 공간임은 분명했다.
이런 곳에 왜 제가 와 있는 건지.
이안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주변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벽을 그득 메운 책장과 깔끔한 책상, 무척 편안해 보이는 소파와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
이로 보아 이곳의 주인은 다소 연륜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나저나 나 혼자인 건가.”
적막했다.
아니, 다른 인기척이 전혀 없어 스산함마저 감돌았다.
“흐음.”
공기조차 얼어붙은 이곳에서 이안은 어느 한 곳을 직시했다.
검은 벨벳의 책과 함께 영상석이 놓인 책상을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저걸 봐야 할 것 같았다.
저벅저벅.
이안은 일정한 걸음으로 책상에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금박 입혀진 책의 제목이 유독 반질거렸다.
꼭 저부터 봐달라는 것 같아서 그것에 손을 가져다 댔더니.
츠즈즛.
예기치 않게 옆에 있던 영상석이 먼저 반응했다.
미약하게 떨린 영상석은 그를 이끌듯 누군가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초대…… 황제?
황궁에서 봤던 초상화의 모습이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강인한 군주의 모습.
그의 등장에 의문을 표하자 황제의 환영이 말문을 열었다.
“이안 뷔트시겐.”
황제는 제 이름을 살갑게 부르며 다음을 이어갔다.
“너와 이런 식으로 만난다는 건 한 가지 의미일 테지. 네가 뒤틀린 시간의 서를 파괴했다는 것.”
“…….”
“너라면 내 해묵은 숙원을 풀어줄 줄 알았다.”
대화는 일방통행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말은 도통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하나 왠지 모르게 끝까지 들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네게 고맙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구나. 또한, 미안하다는 말도. 나로 인해 뜻하지 않은 고생길을 걸었으니.”
“……고생길.”
“서를 소멸시키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을 안다. 하나 너는 포기하지 않았지.”
덕분에 속박에서 벗어났다며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그에게선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벗어던진 홀가분함이 엿보였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너 역시 온전한 시간을 걷게 될 터.”
온전한 시간.
이 문구를 그가 곱씹어 볼 것을 짐작했던 걸까.
잠시 틈을 두던 황제가 이만하면 됐겠지라며 서서히 입을 뗐다.
“온전한 시간을 걷게 될 아이야, 네 스스로 선택하고, 네가 만들어가는 그 길을 나는 누구보다 먼저 축복한다.”
“…….”
“그리고 빌어주마. 너와, 네가 이끌어 갈 사람들의 평안을.”
황제의 음색은 한없이 보드라웠다.
“이 말들을 직접 전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이는 시간이 허락지 않는 일이기에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아이야, 언젠가 또 꿈에서 이 할아비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아무쪼록 잘 지내려무나.”
길었던 영상석의 내용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형상이 흐려지더니 이내 잿빛 가루로 화해 휘날렸다.
그 가루의 잔상마저 흔적없이 사라졌을 즈음.
“크읏.”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이 휘몰아쳤다.
눈알에서 뒤통수까지 누가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작열감.
바스라질 것 같은 통증 속, 이안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물밀듯이 치고 들어왔다.
마력핵이 없는 진짜 자신의 기억들이었다.
“미친. 이 중요한 걸 잊어버리다니.”
이안이 꽉 막혀있던 진실을 깨달은 즉시였다.
그의 몸이 깊은 해수면으로 빨려 들어가며 휘돌기 시작했다.
끝없이, 그리고 또 한없이.
더는 내려갈 곳이 없겠다 싶은 순간, 이안의 시야에 밤하늘이 맺혔다.
별빛이 총총했다.
여덟 살의 건국제 때 아버지와 함께 본 그 밤하늘처럼.
죽은 건가?
묘한 심상이 일어 피식거린 사이 얼빠진 소리가 섞여들었다.
[어?]
“애송이 살아났군.”
루체의 한 마디는 녹스의 목청에 금방 묻혀버렸다.
[이 못돼 처먹은 제자 놈아, 왜 이리 속을 썩여! 나한테 칼 꽂고 잠이 처 오디?]
말은 험하게 하면서도 녹스의 팔은 이안에게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집요한 움직임만큼 꼬리의 풍차돌리기 또한 초속이었다.
격한 모양새가 경쟁자를 부른 건지, 어쩐 건지.
“이아아아아안.”
로르 역시 육중한 몸을 날려 이안의 팔에 매달렸다.
작아졌다고 그 덩치의 무게가 어디 가랴.
뼈가 뽀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선 그가 켁켁거렸다.
방금 살아났는데…… 죽을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촌극이 벌어지자 여태 가만히 있던 루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총평을 내렸다.
“지랄들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