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이안이 깨어난 후로부터 또 보름의 시간이 지났다.
그날 동안 이안은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를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찌나 수선들인지.
<도련님, 발은 왜 움직이십니까. 아, 차가 드시고 싶다고요? 이 칼브란이 가져다드릴 테니 침대에 누워 계세요.>
<포크 들다 팔뼈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이 한스가 먹여드릴 테니 입만 벌리세요. 자, 아 해보세요.>
거의 신생아 취급이었다.
이러다가는 방구석 곰팡이가 될 것 같았다.
“아이고야.”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진 이안은 테라스로 나온 뒤 저 너머 연무장 쪽을 쳐다보았다.
무더위를 잊은 것처럼 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하고 있었다.
그게 내심 부러워서 이안의 잇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 나도 수련하고 싶다.”
[염병할. 아무리 곱씹어도 맘에 안 드네.]
이안의 중얼거림에 엉뚱한 소리가 대꾸로 돌아왔다.
그에 이안은 고개를 돌려 녹스를 보았다.
녀석은 특유의 코 평수 늘리기를 선보이며 씩씩대고 있었다.
뭔가 맘에 안 들거나 흥분할 때만 나오는 표정.
“뭐가 맘에 안 드는데.”
[뭐긴 뭐냐. 널 살리면서 재수 없게 그놈도 같이 건져진 것 말이다.]
“그놈? 아, 살리카?”
[그래, 그 육시랄 놈.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명줄 한번 길기도 하지. 어찌 딱 관리자의 보호막에 걸려선.]
“그러게. 그때 내가 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보호막 밖으로 밀어버렸을 텐데.”
[이 판국에 넌 농담이 나오니?]
“농담이라도 해야 분이 풀리지. 그래도 지금 인피투스에 갇혀 있으니 뭐.”
[거기에라도 갇혀 있지 않았으면 내가 당장 그놈을 찾아가 갈기갈기 찢어발겼을 것이다.]
인피투스.
황궁에 있는 감옥으로 무한의 감옥이라 불리는 곳이다.
악명이 꽤 높아서 대개의 범죄자는 인피투스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떤다.
오죽하면 그곳을 언급만 해도 없는 죄조차 술술 토해낼까.
[내가 주는 죽음보다 거기서 받는 고통이 더 클 테니 참는 게다.]
괜히 악명이 높으랴.
끊임없이 죄인을 회복시켜가며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무한으로 주기 때문이다.
고통을 주고 회복시키고, 고통을 주고 회복시키고.
그 덕에 죄수는 고통의 굴레에 갇혀,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게 된다.
[그놈 목숨줄이 엄청 질겼으면 좋겠구만.]
“그래야 그곳에서 오래오래 있을 테니까?”
[당연한 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실컷 떠들어대더니 녹스가 급 손사래를 쳤다.
[뭐 이쁜 놈이라고 그놈 얘기를 이리 길게 한 건지. 다 됐고. 이안.]
“응?”
[오늘은 거울 안 보누?]
“아. 휴대용 거울이 어딨지?”
[옛다.]
녹스가 던져준 작은 거울.
그 안에 비친 모습을 이안은 찬찬히 훑어보았다.
은은하게 치렁거리는 은발과 녹스와 똑같은 오색 눈동자가 검은색 한 점 없이 반사되고 있었다.
사실 깨어나고 제일 놀란 것이 이 두 가지였다.
한동안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만큼 말이다.
“이젠 염색으로도 물이 들여지지 않네.”
[자폭의 영향 탓이다. 세대교체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네 힘이 완전해졌다는 뜻이지. 하니 앞으로는 검은색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녹스가 단언하며 제 은발과 동공을 차례로 뜯어보았다.
특히 제 동공을 뚫어지게 보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봐도 봐도 신기하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한데 참 묘하다. 네 동공은 왜 황실의 색이 아닌 수호자의 오색일꼬.]
“그게 뭐가 중요해. 내 잘생김이 한층 성장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어우야. 생각도 방해하는 저 돼먹지 못한 자뻑.]
녹스가 몸통을 부들거리자 이안은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배가 당길 정도로 웃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간 별의별 일이 다 있어 도통 웃을 일이 있었어야 말이지.
이안은 눈꼬리에 물기가 맺힐 만큼 폭소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수다를 떨 시간도 있고. 제법 한가하다.”
[오만 사람들이 와서 네 쾌차를 빌어대더니 좀 뜸하구나. 아, 어제는 슈튼하노버 가주도 왔었지?]
“에이프릴과 함께 들른다고 하더니…….”
정작 에이프릴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했다.
그 대신 슈튼하노버 가주의 푸른색 머리칼을 지겹도록 보며 레브 얘기만 실컷 했더랬다.
왜 혼자 왔냐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부녀 사이에 아직 메워지지 못한 골이 있는 걸 아니까.
“그러고 보니…… 서신이 안 온 지도 꽤 됐군.”
드문드문 오던 것도 근 한 달간은 뚝 끊겨버렸다.
바쁜 일이 있겠거니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서운해졌다.
어찌 이리 단박에 연락을 끊어버린 건지.
평소엔 루하흐답게 부드러운 성정이면서 이럴 때 보면 또 칼 같다.
‘하긴. 나도 좀 무심했지.’
살리카 일에 제 몸 상태가 그렇다는 이유로 한동안 연락을 못 했으니까.
이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눈을 반개했다.
연락이 오길, 혹은 답장이 오길 마냥 기다리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됐어. 이제 몸도 다 회복됐겠다 찾아가 보면 되지.”
두 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딘들 못 갈까.
이안은 언제쯤이 적당할까 시기를 재보았다.
제가 외출하겠다고 하면 모두가 뜯어말릴 터라 신중해야 했다.
적당한 날을 고르고 고르던 차.
“도련님.”
열린 문틈에 공손히 서 있던 하인이 그를 불렀다.
이안이 손짓하자 얼른 안으로 들어온 그는 뭔가를 내밀었다.
늑대 모양의 패였다.
공을 세웠을 때 부단주 이상에게만 포상으로 지급되는 패.
이게 뭐냐 이안이 묻기도 전 하인이 먼저 입을 뗐다.
“수도의 저택에서 온 것입니다.”
“수도?”
“예. 도련님께서 주신 것이라, 반드시 도련님께 전해야 한다는 전언과 함께 말입니다.”
“내가 이 패를…….”
말을 하다 말고 이안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제가 이 패를 준 자는 한 명뿐이었다.
트란 카스티야.
절대 패를 사용하지 않을 것 같더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놈 자존심에 이걸 쓸 리 없으니까.
“날 찾아온 놈, 빨간 머리 맞지.”
“아닙니다. 그자의 말을 전할 전령이 따로 와 있습니다.”
“그래? 일단 만나보게 이리 데려와.”
이안은 하인이 전한 말을 곱씹으며 턱을 쓸어내렸다.
과연 카스티야가 패를 써야 할 만큼의 일이 무엇일까.
추측을 해보아도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녀석에 대해 뭘 알아야 그런 단서도 얻지.
그래도 딴에는 머리를 굴려 보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전령이 들어왔다.
* * *
이안에게 패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아니 카스티야는 멀뚱히 서서 앞쪽을 보았다.
“내가 황실의 별장을 다 와보고.”
황족 외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사유지가 코앞에 있었다.
저 같은 말단이 이곳에 온 이유야.
<가주님을 황궁에서 빼돌릴 수 있는 자는 그분뿐이다. 그분을 만나 이것을 보여주고…….>
카스티야 가에 떨어진 거지 같은 명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결단코 제 가문에 떨어질 리 없는 명.
하지만 재수 없게 낙점된 건 가주를 따르는 자들이 얼마 남지 않아서였다.
폰투스 가를 주축으로 한, 가주의 골수 충성분자들 말이다.
그들은 가주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움직임에 제약이 많았다.
뭘 도모하재도 클로에 측의 감시망과 불시검문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한미한 카스티야 가는 은밀한 심부름을 시키기에 적당한 패였다.
너무 하찮아서 눈에 들지 않고, 일을 도모하다 걸릴 시 꼬리를 잘라버리면 그만이기에.
치밀한 계산이 오고 간 결과에 카스티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 내가 까라면 까야 하는 따까리지만 그딴 놈을 위해 뭘 하긴 싫은데.”
일족을 실험체로 썼던 살리카 가주.
그자가 죽도록 싫었으나 카스티야는 명을 어길 수가 없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별수 있나.
저 같은 말단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카스티야는 애써 변명을 삼키며 황실 별장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멈춰라.”
지근거리까지 가자, 웬 남자가 카스티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근위대였다.
우락부락한 남자는 기사라기보다 왈패의 두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인상이 더러웠다.
살기를 짓쳐 드는 그에게 카스티야는 얼른 암호를 댔다.
“독수리는 썩은 고기를 먹는다.”
암호를 대도 남자의 경계심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혹 미행이 붙었는지 기감까지 세워 제 뒤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경계가 무척 삼엄했다.
“들어가서는 눈과 귀를 막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눈깔을 전부 도려낼 것이다.”
살벌한 경고까지.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남자는 따라오란 고갯짓을 했다.
앞장서 걷는 남자의 뒤에서 종종거리며 오솔길을 걷길 얼마쯤.
카스티야의 눈앞에 별장의 본관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휘황찬란하고 매우 고압적인 건물.
고작 건물의 위세에 눌린 카스티야는 어깨를 움츠리며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 발을 걸치자마자 남자의 경고가 재차 이어졌다.
“명심해라. 안에서 본 것을 발설할 시 네 가문 전체가 도륙당할 수 있음을.”
참 유난이었다.
남자의 위세를 잘게 씹으며 멈췄던 그의 걸음이 재개되었다.
현관 쪽에 있을 땐 몰랐는데…… 중앙부쯤 들어서자 묘한 향이 났다.
향수 냄새, 단 냄새, 시큼한 냄새 등등.
온갖 것이 뒤엉켜 어떤 오묘함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묘한 냄새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진해졌다.
냄새를 흡입하는 횟수가 많아지자 공연히 목이 탔다.
카스티야는 생침을 삼키며 남자가 열어주는 끝방으로 들어갔다.
단 내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진하게 밀려왔다.
“누가 왔다고?”
소파에 방만하게 널브러진 누군가의 말끝이 죽죽 늘어졌다.
그런데도 묘하게 권위적이고 찍어누르는 힘이 있었다.
카스티야는 날카로워지는 긴장을 삼키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1황자.’
은색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긴 1황자가 건성건성 말문을 열었다.
“벌레 새끼가 별장을 출입할 수 있는 암호를 다 알고.”
“…….”
“주제를 모르는 혓바닥을 찢어버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살리카 가주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니.”
1황자의 뱀 같은 눈빛이 카스티야를 훑었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가늠해 보는 눈빛이라 소름 끼쳤다.
주먹을 말아 쥔 카스티야가 버텨내자 1황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용건.”
“수장님께서 보내신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을 시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카스티야가 내민 서신을 1황자는 대강 읽었다.
보았나 싶게 빠른 속독을 하더니 그 채로 그는 서신을 구겨버렸다.
“여전하군, 살리카 그자는. 참으로 협박도 우아하게 해.”
“…….”
“네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니 협조해라, 이런 직설적인 화법 대신 돌려 까긴.”
1황자는 뭐가 우스운지 키득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징그러웠어. 썩은 내를 감추려고 고상한 척하는 독사 같은 놈이라.”
그러더니 말꼬리를 잡고 살리카 가주에 대해 계속 떠들어댔다.
추임새를 넣을 틈도 주지 않고 주절대는 것으로 보아 저 들으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독백에 불과했다.
이런 1황자의 태도가 익숙한지 근위대는 목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들 틈바구니에서 멀뚱멀뚱 있길 얼마쯤.
“그래도 뭐 나쁘지는 않아. 역겨운 황가 놈들보다 음습한 그놈이 더…….”
1황자가 지치지 않고 연거푸 말을 덧대려던 순간이었다.
“황자님, 명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며 포대를 짊어진 건장한 남자들이 지체 없이 들어왔다.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걸 보면 사전에 뭔가가 오간 모양이다.
남자가 신속하게 포대를 내려놓은 뒤 곧장 단단히 묶어둔 끈을 풀었다.
일련의 과정이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싱싱한 것으로 구했습니다. 황자님이 찍은 그것으로.”
“그것을 드디어 잡았나 보군.”
“예. 눈치 빠르게 도망가려 해서 이번엔 발목을 부러트려 데려왔습니다.”
알 수 없는 말들이 쫀쫀하게 오간 후였다.
으스대던 남자가 포획물을 자랑하듯 포대를 열어젖혔다.
놀랍게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슈튼하노버?’
에이프릴의 뺨은 퉁퉁 부어 있었다. 피멍도 올라와 있었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카스티야는 눈을 크게 치떴다.
당황한 것도 잠시, 기민한 눈치 덕에 그는 금세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에이프릴을 보는 1황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음심이 가득했다.
1황자는 음흉한 눈빛으로 입맛이 돈다는 양 혀를 날름거리더니, 에이프릴의 얼굴을 느끼하게 쓰다듬었다.
“그 방에 넣어 놔.”
“예. 하면 지금 바로 준비를 할까요.”
“당장 시작하면 좋은데 살리카 그 작자 때문에 황궁 좀 다녀와야겠어.”
“그럼…….”
“방해꾼이 없을 때 천천히 즐겨야지. 일단 허튼짓 못 하게 감시하고 있어.”
“예.”
남자가 믿음직스럽게 답하고 떠난 뒤 1황자는 카스티야를 삐딱하게 보았다.
“답을 너 같은 벌레한테 하는 것도 우습군. 네 상관한테 전해. 조만간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고.”
“……예.”
“얻을 거 얻었으면 그만 꺼져. 주워 먹을 거 없나 승냥이처럼 질척거리지 말고.”
1황자는 다 귀찮다는 듯 주위 사람들을 전부 내쫓았다.
어리바리 떠밀린 카스티야도 포함해서.
정문에 오도카니 선 카스티야는 마음이 무거웠다.
에이프릴이 무슨 짓을 당할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솔직히 말해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절 욕하건 비겁하다 손가락질하건 중요한 건 제 목숨이었다.
그 때문에 예까지 하기 싫은 심부름도 오지 않았던가.
모른 척하며 외면하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 싶은데…….
불현듯 에이프릴의 얼굴 위로 이안의 얼굴이 겹쳐졌다.
에이프릴을 각별하게 여기던 놈의 환한 낯짝이.
“아씨. 그 망할 놈의 여우 새끼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