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타닷.
별장으로 되돌아온 카스티야는 아까 봐 둔 방으로 몰래 침투했다.
같은 말단이라도 그가 쓰임이 많았던 건 정령의 어떤 기술 때문이었다.
은신.
상급 탐지에조차 잘 걸리지 않는 그것이 제 주특기였다.
잽싸게 방안에 들어선 카스티야는 기절해 있는 에이프릴을 흔들어 깨웠다.
“야, 슈튼하노버.”
“…….”
묘하게 에이프릴의 숨에서 단내가 났다.
줄곧 별장에서 나던 그 냄새였다.
‘역시 미약이 아니네. 근데 이거…… 마력 고갈을 유발하는 약 같은데.’
그 약을 윗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 적이 있어 조금은 알고 있다.
무기력증을 유발하며 제가 가진 힘의 반도 못 쓰게 만드는 약.
그런 것을 에이프릴에게 먹인 의도가 소름 끼칠 정도로 징그러웠다.
카스티야는 소리를 죽인 채 계속 에이프릴을 불렀다.
“그만 처자고 일어나 보라고.”
“으응.”
“1황자 그 새끼가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니까. 얼른 일어나.”
피멍이 든 볼까지 치며 깨우자 그제야 에이프릴의 눈꺼풀이 들렸다.
겨우 한숨을 돌린 카스티야는 에이프릴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친 몸짓에도 에이프릴의 눈은 아직 흐리멍덩했다.
“험한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려.”
“……여긴.”
“설명할 시간 없어. 일단 여기부터 벗어나자.”
카스티야의 재촉에 에이프릴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똑똑해서 그런지 괜한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도리어 뭔가 생각난 듯 초조한 낯으로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자신이 뭣 때문에 납치당했는지 아는 눈치였다.
카스티야는 일단 사색이 된 에이프릴을 둘러매듯 대강 업었다.
발목이 뒤틀린 터라 그 수밖에 없었다.
“미리 알려주는 건데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이안한테 긴급 연락을 넣어놨다.”
“이안한테?”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그놈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뒷문을 통해 은밀히 빠져나왔다.
아직 별장이 조용한 것을 보니 에이프릴이 사라진 걸 모르는 듯했다.
“가자.”
두 사람은 방향을 동서쪽으로 잡고 빠르게 숲으로 이동했다.
수도의 뷔트시겐 저가 있는 곳.
그곳까지만 가면 1황자가 쫓아와도 시간을 벌 수 있다.
위세 등등한 황족이라 할지라도 4대 가문에겐 멋대로 행패를 부릴 수는 없으니까.
카스티야는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마구 내달렸다.
얼마쯤 갔을까.
정신없이 달리던 도중 카스티야의 얼굴이 험하게 우그러졌다.
“젠장!”
……추격대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목표 지점까지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이 속도로 가다간 금세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질주를 멈춘 카스티야는 나무 밑동에 에이프릴을 내려놓았다.
“야, 슈튼하노버. 마력을 약간이라도 쓸 수 있어?”
“약간은.”
“그럼 당장 네 발목을 고칠 수 있어?”
“그 정도는 아냐. 그래도 일단 통증을 못 느끼게 할 수는 있어.”
“그럼 마취하고 넌 이 방향으로 계속 달려.”
“카스티야 넌?”
“너란 짐 덩이만 없었으면 난 벌써 이 숲을 빠져나갔어. 그러니까 네 걱정이나 해.”
퉁명스러워도 도움을 준 그 마음을 어찌 모르랴.
짐이 되지 않으려 에이프릴은 미적이지 않고 발목을 감쌌다.
뒤틀린 게 돌아오지는 않아도 벌겋게 부은 건 다소 가라앉았다.
얼추 혼자 거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마자였다.
“고마워.”
단출하나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네고 에이프릴은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뒤틀린 발목 채로 절뚝절뚝 떠나는 에이프릴을 카스티야는 가만히 응시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려선.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진짜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하아.”
마른세수를 거하게 한 카스티야는 코트에 나뭇잎을 박박 긁어 넣었다.
얼추 사람을 둘러맨 것처럼 꾸민 뒤였다.
카스티야는 에이프릴이 떠난 반대 방향으로 열나게 뛰어갔다.
부러 온갖 기척을 흩뿌리면서 말이다.
요란하게 수선을 피웠더니 금방이었다.
“저 개새끼 잡아!”
근위대 대장이 얼굴을 구기며 새된 명령을 내렸다.
그에 카스티야는 화답하듯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약을 잔뜩 올리는 와중에도 절대 두 다리가 멈추는 법은 없었다.
속된 말로 그게 떨어지겠다 싶은 질주를 하며 숲을 누볐다.
“허어억.”
“감히 황자의 물건을 건드리는 겁도 없는 새끼에게는 본을 보여야 한다.”
“와, 힘이 없다고 이렇게 누명을 씌우시네. 대체 내가 뭘 훔쳤다고.”
내달리는 중에도 카스티야는 계속 주절거렸다.
두려움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위대 대장을 필두로 뒤쫓아오는 추격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최소가 카르티아 1성인 그들.
아주 대단하신 분들이 고작 페이라조 3성을 잡겠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드는 중이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게 우스워서 카스티야는 시원스레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잡는 즉시 사지를 찢어발겨라!”
그의 웃음에 짜증이 났는지 대장이 살벌하게 노성을 터트렸다.
굳이 힘을 빼지 않아도 카스티야는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거의 번개 정령처럼 내달렸더니 마력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으니까.
‘쯔읏. 이래서 살던 대로 살았어야 하는 건데.’
자아 반성을 대차게 한 즉시 카스티야는 추격대가 던진 올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쿠당탕.
제대로 구른 탓에 인중으로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썅.”
입술 새를 비집는 비릿함에 인중을 거칠게 문지른 사이, 근위대 대장이 그의 앞에 섰다.
놈은 오자마자 제 발치에서 나뒹구는 코트를 헤집었다.
낙엽뿐인 것을 확인한 직후 대장은 신경질을 내며 카스티야를 걷어찼다.
살기가 꾹꾹 눌러진 발길이었다.
“이거 어디 갔어.”
“뭘 말하는 걸까.”
“그년 어디 갔냐고!”
“그년? 난 황실 별장에 온 기념으로 나뭇잎 좀 모아 온 것뿐인데.”
“어디서 개소리를.”
“기념으로 챙기는 것도 안 되나. 와, 있는 분들이 더 하다고 진짜 쪼잔하네.”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나불나불.”
근위대 대장은 더 묻지 않고 카스티야의 어깨를 가차 없이 찔렀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푹. 푸욱. 푹.
“크으으읏.”
카스티야의 비명과 피가 튀는 횟수가 커질수록 대장의 입가가 짙게 비틀렸다.
사람깨나 죽여 본 살인귀의 모습이었다.
몸통 여기저기를 무작스럽게 찔러대던 놈이 선고하듯 뇌까렸다.
“분수에 맞지 않은 짓을 한 대가다. 인가도 멀어 구해줄 놈도 없으니 과다 출혈로 곧 뒈지겠지.”
카스티야를 일부러 방치한 추격대가 떠난 후였다.
“하아. 하아아.”
거친 숨을 가까스로 몰아쉬며 카스티야는 눈앞에 보이는 밤하늘을 눈에 담았다.
더럽게 맑았다.
죽기에는 참 아까운 날이구나 싶게.
그래서였을까.
반짝이는 별빛과 꺼져 가는 숨 어느 사이, 어떤 과거가 아무런 전조 없이 끼어들었다.
<트란 카스티야, 너도 갈래? 뷔트시겐으로. 뷔트시겐이라면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이안이 뜬금없는 제안을 했더랬다.
그땐 웬 헛소리냐고 대차게 깠지만 내심 솔깃해서 따라가고 싶긴 했다.
그건 기회였으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볼 마지막 기회.
그걸 아는데도 어째 본심과는 다른 거절의 말이 멋대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실 아예 거짓은 아니었던 게 살리카를 버리기 싫었다.
해준 것도 없는 일족에 무슨 충성심이 있겠냐만은 살리카라는 것은 제 정체성이었다.
저를 저답게 하는 그 무엇.
아무리 쓰레기라도 그런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 이안 너를 따라갔다면…….”
나는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까.
그 녀석을 보고 있자면 그저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며 살고 싶지 않아진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이 너무나 찬란해 보였으니까.
저는 가질 수 없는 것인데도 욕심이 났더랬다.
“어쨌든 빚은 갚았다…… 이안 뷔트시겐.”
저를 유일하게 사람 취급해준 녀석이 쥐여준 빚은 갚은 셈이다.
에이프릴이 1황자의 마수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으니 말이다.
어떤 홀가분함과 어떤 후회를 안고 카스티야는 흐려져 오는 눈을 몽롱하게 감았다.
* * *
카스티야의 연락을 받고 급히 수도로 온 이안.
그는 시종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에이프릴이 있을 숲을 질주했다.
이 길목, 뷔트시겐 저가 있는 테르델리 구역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한다.
거슬러 가다 보면 필시 에이프릴을 만날 수 있을 터.
이안은 에이프릴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속도를 높였다.
한데 아무리 속도가 붙어도 마음이 급해선지 모든 것이 느리기만 했다.
지나치는 풍경도, 시간도 전부 말이다.
“녹스 이대로 쭉 가면 엘로이 호수가 나오지.”
[조금만 더 가면 있다.]
“거기에 반드시 에이프릴이 있어야 할 텐데.”
[아마 그 아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가 있을 것이다. 영민한 아이이니.]
성치 않은 몸으로 마력 고갈이 일어난 상황.
쫓기는 사냥감이 되어도 에이프릴은 어리숙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도를 필사적으로 모색할 터.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야…….”
자신의 정령을 물의 근원지에 직접 닿게 하면 된다.
그러면 마력이 없어도 기술을 사용할 수 있어 싸울 수 있다.
물론 이 방식은 결속자에게 부담을 지운다.
해서 오래 사용할 수 없지만 적어도 맥없이 당하진 않을 수 있다.
타다닷.
사력을 다해 이동한 결과, 어느덧 호숫가 근처에 다다랐다.
그러자마자.
“쌍년이!”
험악한 욕설 뒤에 뭔가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속이 무자비했다.
“황자님의 하룻밤 상대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 것이지, 감히 도망을 가?”
“영광? 퉤! 그딴 개새끼는 줘도 안 가져.”
“감히 어디다 대고!”
에이프릴의 모욕에 근위대 대장이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그녀의 멀쩡한 왼쪽 발목을 사정없이 꺾어버렸다.
으드드득.
섬뜩한 뒤틀림과 함께 다시금 대장의 윽박이 내뱉어졌다.
“네년이 이리 아득바득 버틴다고 진상품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죽으면 죽었지 못 가, 이 개자식아.”
“그 이쁜 손마저 발목 꼴 나고 싶지 않으면 그 돌 놔.”
대장의 눈길이 에이프릴의 손에 머물렀다.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 돌부리를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있는 손.
그를 발견한 이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얼마나 반항했는지, 에이프릴의 손톱 사이사이가 전부 깨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X발!”
이안은 입가를 비틀며 즉시 마력을 휘둘렀다.
이에 크리스털 정령이 화살처럼 날아가 근위대 대장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깔끔하게 잘린 절단면에서 피가 콸콸 솟구쳤다.
“끄어어어엇.”
비명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 이안은 공간을 접어 에이프릴에게 다가갔다.
피가 튀지 않도록 그 앞을 막아선 직후였다.
다정한 얼굴을 내보인 그는 에이프릴을 감싸는 치유의 보호막을 만들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안.”
저를 발견한 에이프릴이 힘겹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하얀 얼굴에 깃드는 안도를 이안은 빤히 보았다.
괜스레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괜찮은 거야?”
“응. 카스티야 덕분에.”
“빨리 온다고 왔는데 늦어서 미안.”
“너 보니까 이제야 안심이 된다…….”
마음을 놓아도 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일까.
갈라진 음색으로 말을 잇던 에이프릴이 돌연 옆으로 고꾸라졌다.
긴장에 내내 닳아졌던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으며 점멸한 것이다.
타앗.
이안은 기절한 에이프릴의 어깨를 감싼 뒤 상태를 확인했다.
성치 않은 발로 움직인 탓에 여기저기 긁히고 베인 상처가 많았다.
옆으로 꺾인 발목은 말할 것도 없고.
“…….”
얼굴을 일그러트린 이안은 에이프릴의 발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떨리는 손에서 뻗어 나온 푸른빛이 발목의 부상을 원상 복구시켰다.
발목은 금방 제자리를 찾았지만, 이안의 손은 곧장 떼어지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는지.
그게 올올히 박혀서 쉬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채로 한동안 멈춰있다가 이안은 에이프릴을 가뿐히 들어 올렸다.
“알란.”
“불편하지 않게 모시겠습니다.”
이안이 따로 첨언하지 않아도 알란은 그 뜻을 헤아렸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표정과 기색만으로 차고 넘치게 전달이 되는 것을.
하여 알란은 에이프릴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저만 믿으십시오.’라고 굳건한 표정을 내보인 후에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알란이 떠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