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뷔트시겐이라고 이리 방자해도 되는 겁니까. 감히 황가의 사유지에 멋대로 기어들어 오다니. 이건 황실 모독입니다.”
이안은 줄곧 돼지 멱따는 소리로 지껄이는 근위대 대장을 직시했다.
그는 제 손목이 잘린 것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아는 것이다.
1황자의 직속 근위대 대장, 그 신분보다 위인 것이 뷔트시겐인 것을.
하여 물고 늘어질 명분으로 삼은 것이 황실에 관한 거였다.
“이 무도한 사안에 대해 제가 직접 폐하께 호소장을 작성할 겁니다.”
“호소장이라.”
“물론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습니다. 그년만 넘겨준다면 말입니다. 슈튼하노버는 애초 명문 반열에도 들지 못한 조잡한 가문. 굳이 고매한 뷔트시겐의 도련님이…….”
퍼억.
이안은 근위대 대장의 얼굴에 바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대지의 기운을 실은 한방에 그가 앞니를 쏟아내며 나동그라졌다.
“도련님, 저는 1황자의 수족…….”
“내가 입을 여는 걸 허락했던가.”
“전…….”
근위대 대장이 입을 열자마자 이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놈의 발목은 기괴하게 뒤틀렸다.
“크아아앗!”
피가래가 섞인 침을 질질 흘리며 대장이 발목을 감싸 쥐었다.
바윗덩어리에 짓뭉개지는 것 같은 고통.
정수리까지 찬 통증을 억지로 틀어막으면서 대장은 무미건조한 낯짝을 올려다보았다.
살기를 띤 것도,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아닌 이안의 눈빛.
그 앞에서 절로 무력해진 근위대 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라도 끄집어냈다간 진짜 골로 갈 것 같았으니까.
“…….”
근위대 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빙 에워싼 채 압박하고 있는 자들은 죄 뷔트시겐이었다.
제 수하들은 어디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마든지 저를 죽여버리고 말을 꾸밀 수 있는 상황.
공포심이 밀려든 대장은 주절주절 사과의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뷔트시겐 도련님에게 감히 대든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사과는 나한테 하는 게 아니지.”
“아, 그분께도 제가 따로…….”
“일 쳐놓고 사과한다고 다가 아니지. 그러니 일단 정산부터 하자.”
이안은 살짝 뒤틀려 있는 놈의 발목을 아예 뒤로 돌려버렸다.
“끄어억!”
빙글빙글 돌려 쥐어짠 뒤에는 도로 치유를 해주었고.
“살만하지?”
그런 다음 이쁘게 붙은 발목을 다시 부서트렸다.
그 작업을 무한으로 반복했다.
견디다 못한 근위대 대장이 바닥을 긁으며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릴 때까지.
* * *
본디 베푼 것은 잊어도 원수는 잊는 게 아니랬다.
에이프릴의 뒤틀린 발목 값을 되돌려받는 거야 너무도 당연한 일.
이안은 새벽같이 움직여 황궁으로 향했다.
미리 독대를 청한 덕에 꼭두새벽부터 포도 정원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기본은 지켜야 하는 법.
이안은 고개를 깊이 숙여 황제에게 예를 다했다.
“제국을 영원한 번영으로 이끌 위대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아해야.”
“예, 폐하.”
“네가 인사를 하지 않아도 나는 예의 없는 놈이라고 꾸짖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 정하였는데,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황제다운 발언이었다.
빙그레 웃은 황제는 탁자에 놓인 스콘과 포도잼이 담긴 접시를 이안 쪽으로 밀었다.
“하니 예는 됐다. 다과를 먹으며 편히 대화를 나누자꾸나.”
“예.”
황제가 권한 것을 어찌 거절할까.
용건이 목구멍까지 찼음에도 이안은 스콘 하나를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생전 처음으로 식욕이 일지 않았다.
꾸역꾸역 배 속에 밀어 넣은 후 이안은 침착하게 독대의 본론을 꺼내 들었다.
“폐하, 제가 조금 건방진 청을 하려고 합니다.”
“호? 예고까지 할 정도라니 자못 기대되는군. 거르지 말고 말해보게.”
“그럼 허하셨으니 거두절미하겠습니다. 1황자님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조사라……. 황족을 조사하는 건 정령사 협회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조사에 착수했는데 증거가 나오지 않을 시 도리어 황실 모독죄로 중벌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예.”
이안은 즉답을 한 뒤 꼿꼿한 자세로 황제를 직시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빛에 황제의 은색 동공이 찰나 이채를 띠었다.
황자를 걸고넘어진 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심중에 담긴 무언가가 드러난 것일 뿐.
황제의 기색을 훑어내리던 이안은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폐하, 협회는 자정 작용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
“한데 그 기관이 앞장서 잘못을 가려 덮는다면, 그 역할을 누군가는 대신해야지 않겠습니까.”
“협회가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소리 같구나.”
“폐하께선 줄곧 능청을 떠시고 계시지만 전부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흠. 그게 무에 중요할꼬. 지금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사안을 들고 내게 찾아왔다는 것이지.”
황제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지자 이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본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였다.
공명정대한 군주로 정평 난 황제일지라도 결국엔 1황자의 편일 수밖에 없다.
여태껏 1황자가 겁 없이 굴 수 있었던 배경도 이거였다.
황제의 묵인.
하여 이번 청은 결과가 어찌 나올지 불분명했다.
찰나의 침묵 후, 이안은 제 뜻을 다시 한번 황제에게 전했다.
“폐하, 결단코 황실을 능멸하려는 것은 아니니…….”
“네 뜻대로 하려무나.”
“예?”
“1황자를 지지든 볶든 네 원대로 하라는 것이다.”
“……허해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대도.”
이리 쉽게 허락이 떨어질 줄 몰라 이안은 다소 당황했다.
하지만 이를 금세 갈무리하고선 원하는 바를 냉큼 입 밖으로 꺼냈다.
이런 기회가 흔히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 그럼 이왕 주신 김에 통 크게 주십시오.”
“통 크게?”
“제가 협회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도 함께 주시면…….”
당돌한 모양새에도 황제는 옅게 미소 지으며 그의 청을 전부 들어주었다.
튼실한 성과와 실속을 알뜰하게 챙긴 뒤.
이안은 처음 왔을 때처럼 예를 다하고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서둔 걸음을 내보인 이안이 포도 정원을 벗어난 직후였다.
황제의 수호자가 이안이 앉았던 곳에 자리를 잡고는 턱을 괴었다.
“테시우스, 모든 것이 자네 뜻대로 흘러가는군.”
“절반은.”
“황족의 일임에도 가려 덮지 않는 것, 권력에 대항해 신념을 지키는 것, 독대로 저 아이, 벌써 이 두 가지를 통과했네 그려.”
“1황자 그 쳐죽일 놈의 일을 어찌 처결하는지까지는 두고 봐야지.”
“만약 이안 저 아이가 끝마무리까지 테시우스 자네 마음에 차게 하면, 정말 그리할 것인가. 자네가 결정 내린 대로.”
“그리 할 것이네.”
황제는 단호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단단해서 충동적인 결정이 아님을 짐작게 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네. 내 아집이 1황자란 괴물의 몸집을 키웠으니 바로잡을 걸세.”
“아집이라고까진 할 거 없지. 그게 다 황실을 위한 것이었으니.”
“나도 그리 여겼으나…… 4대 원소를 다루는 자가 황가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 사실이 내 눈을 가려 덮었지.”
황제는 여태껏 기다렸더랬다.
제 손주 대까지도 나오지 않은 마력핵이 없는 아이, 그 아이가 그들의 후손에게서 나오지 않을까 하여.
이 때문에 자식을 낳을 황족들을 귀히 여기며 잘못을 쉬이 용서해주었다.
그것이 성군이라 불리는 그의 또 다른 이면이었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
썩은 뿌리에서 난 나무가 어찌 건강할까.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성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거늘.
그런 개망나니에게서 난 자식이 특출나게 뛰어나 봤자 결국, 그 옆에 붙은 개망나니는 흠일 수밖에 없는데.
한데도 그 사실을 외면해 버렸다.
저를 마지막으로 수호자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의 바람이 이루어질까 봐.
1황자가 제 수하들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죽도록 패도 그저 경고만으로 끝내고 말았다.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경고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내 아집이 히에로스를 병들게 했으니 잘라내야지. 다음 대를 위해서.”
황실의 존속은 무척 중요했다.
하나 황제로서 무엇보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천년 넘은 히에로스의 존속이었다.
이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 황제는 이안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 * *
황궁을 나온 이안은 곧바로 중앙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곳에 얘기를 나눠야 할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스톨레 그자한테 가는 거지?]
“어. 1황자와 엮인 일이라 사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탈이 날 수 있어.”
[하긴. 자칫하다간 4대 가문이 황족을 핍박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으니 좋지 못하지.]
“그러니까 이왕 시작한 일 명분부터 챙겨야지.”
명분.
황족을 조사하려면 정령사 협회가 필요하다.
그들이 노상 하는 일을 하겠다는데 나달거릴 자들이 누가 있으랴.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선 협회를 방패막이 삼아야 한다.
다만.
“협회장이 나서 잘못을 덮은 일에 자원할 협회원은 없을 테고, 나 또한 그들을 믿을 수 없으니.”
[그래서 스톨레가 필요한 게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데다 그만한 지위도 갖추셨잖아.”
[그자가 협회 후계자 자리를 제 발로 차서 그렇지, 후계자에 준하는 프로보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니 뭐.]
“그만하면 이 일의 책임자로 최상이지.”
지위뿐일까.
아닌 건 아닌 스톨레의 성정이 1황자를 끌어내리는 데 한몫할 것이다.
해서 바지런을 떨며 중앙 아카데미로 왔더니만…….
평소엔 스산하다 할 정도로 조용한 아카데미가 웬일로 정문부터 수선했다.
아니지.
그냥 시끄러운 게 아니라 경악과 분노, 그리고 충격과 혼란이 넘쳤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안은 의문을 안은 채 인파가 촘촘히 박힌 본관 앞마당 쪽으로 나아갔다.
학생이며 교수며 할 거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중심부에 당도했을 즈음.
이안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눈을 크게 치떴다.
“!!”
……여학생의 시체가 있었다.
손과 발이 기괴하게 뒤틀린 채 피멍과 칼에 베인 자국만 수십 군데인 시체가.
고작 열다섯?
너무도 앳된 여자애가 본관으로 향하는 계단에 걸려 있었다.
마치 전시되듯이 말이다.
천으로 덮여 있었지만, 발견 당시 나체였음을 짐작게 하는 모양새였다.
“…….”
이안의 시선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시신의 복숭아뼈로 떨어졌다.
유달리 새하얀 그곳에 인두로 지진 리본 모양의 낙인이 찍혀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부러 주장해놓은 것처럼.
‘하. 1황자 그 뭣 같은 새끼.’
리본은 그놈이 납치한 애들에게 새기는 표식 같은 거였다.
이안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자 그에 동조하듯 바람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 바람에 시신을 덮고 있던 천이 들춰지며 그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데…… 생김이.’
말을 잇지 못하고 이안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시신은 언뜻 봐도 에이프릴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똑 닮아 있었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필시 에이프릴을 어쩌지 못한 화풀이를 비슷한 외모에 한 것일 터.
앳되고 푸르스름한 얼굴 때문일까.
문득 무언가가 이안의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역겨운 이번 사건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다.
처음 겪는 일인데도 기시감이 느껴진달까.
왜 눈에 익을까 생각에 잠긴 사이.
“이안.”
누군가가 생각의 틈새를 비집고 그를 불렀다.
의식의 흐름이 끊겨버린 이안의 앞, 굳은 낯빛의 스톨레 교수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