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10화 (210/214)

제210화

스톨레와 함께 당도한 황실의 비밀 별장.

이안은 인간의 낯짝이 얼마나 두꺼울 수 있는지를 체험했다.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는데 1황자가 여유롭게 그들을 맞았다.

당황한 기색은 일절 없었다.

“공무에 노고가 많군.”

“노고랄게 있나요. 다 변태 새끼 잡자고 하는 일인데.”

“어차피 성과가 없을 거, 괜한 수고를 하니 하는 말이지.”

“지금까지는 그랬겠지요. 하나.”

이안은 부러 말을 끊었다.

유들유들한 1황자의 낯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역질 나는 짓거리를 하고도 어찌 저리 평온한지.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제가 나섰으니 말입니다.”

“흠. 시건방지군. 뷔트시겐이라 이건가.”

“예. 뒷배가 커서 아주 달달합니다. 그 변태 새끼가 어떤 지위를 가졌건 물불 안 가려도 되니까요.”

이안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1황자의 입매가 옅게 불룩거렸다.

자기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거리하는 게 맘에 안 드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1황자의 심기 따위 모르쇠로 일관하며 가차 없이 수색이 이어졌다.

뷔트시겐이든 협회원이든 능수능란했다.

남의 집 꽤나 뒤져본 장인의 솜씨를 장착한 채 속속들이 헤집고 돌아다녔다.

서너 시간쯤 이 잡듯이 별장을 훑은 뒤였다.

“도련님, 잠시만.”

상황을 진두지휘하던 알란이 스윽 다가와 이안에게 눈짓을 주었다.

힐끗 1황자를 본 이안은 느릿느릿 자리를 이동했다.

1황자와 제법 멀찍이 떨어진 거리.

그쯤이 되어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알란은 바싹 붙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거의 복화술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예. 역할 정도로 마력 고갈증 약의 단 향이 나긴 하나…….”

“그건 소지하고 있어도 불법이 아니지.”

“예. 어찌할까요?”

“흠.”

역시나.

1황자가 저리 자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탈탈 털어봤자 아무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해서였다.

물론 보이는 곳에 버젓이 증거를 둘 멍청이가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깔끔할 리가.

이안은 지나친 깨끗함에 도리어 의구심을 품었다.

이런 경우 아예 별도의 공간이 있거나 별도의 입구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재차 곁눈질로 1황자를 본 이안은 눈매를 얇게 구겼다.

“알란, 정보부가 밤새 1황자를 감시했댔지.”

“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주시했습니다.”

“한데도 그 짓거리를 하고 사람까지 죽였어. 그리고 보란 듯이 중앙 아카데미에 전시했지.”

“그렇다는 건 정보부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이군요.”

“만약 밀실이 있다면…….”

“그렇다면 전부 설명이 되긴 합니다.”

“한데 그 밀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거야. 필시 밀실과 연결된 외부 통로가 따로 있을 테니 정보부에게 알려.”

“예, 더 면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알란이 떠난 뒤 이안도 지체하지 않고 별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허탕 치고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까.

그렇게 탐색을 거듭하다 이끌리듯 걸음이 멈춘 와인 저장고.

이곳 또한 딱히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도 석벽 구석구석 살피던 이안은 오른쪽 귀퉁이를 보곤 눈썹머리를 내려트렸다.

아스라이 꺼져 가는 마력의 흐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저처럼 스톨레 역시 뭔가를 감지한 듯.

“자주 사용하는 것일수록 마력의 잔상은 오래 남죠.”

그가 거침없이 손을 뻗어 거무튀튀한 벽돌 하나를 뺐다.

그나마 잔상이 진하게 남은 벽돌이었다.

“예상대로군요. 이 안쪽 벽돌에 뭔가가 새겨져 있네요.”

“……왜 여기에 고래 문양이.”

고래는 디오크스 가의 문양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기드온 가문의 것이었다.

루하흐 변방의 한미한 가문이라 황족과 연관될 일이 전혀 없는 가문의.

“흠. 디오크스 가가 이곳에 올 이유는 없을 텐데…….”

엉뚱한 장소에, 그것도 꼭꼭 숨겨진 벽돌에 한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문양을 관찰하는 이안의 눈매가 한층 깊어졌다.

누군가가 싸지른 더러운 짓을 도맡아 처리했던 청소부 기드온.

그리고 추악한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도 들통나지 않았던 1황자.

두 사람을 엮어보니 답이 쉽게 도출되었다.

기드온이 1황자의 뒤처리 전담반이었을 거라는 것.

추론을 이어가며 이안은 문양 안에 파인 홈을 유심히 보았다.

홈의 난잡한 선이…… 굉장히 낯익었다.

‘이 모양,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듯한데.’

결은 다르지만 중앙 아카데미에서 느꼈던 기시감과 비슷했다.

대체 그게 무얼까.

잠깐의 고심이 이어졌지만, 곧 이안의 입가엔 웃음이 짙게 달렸다.

기드온이 제게 준 것.

그러니까 그가 죽기 며칠 전에 건넸던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다.

“녹스.”

[이안 너도 그것을 떠올렸구나.]

녹스가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여태 꽁꽁 숨겨 보관하고 있던 반쪽짜리 열쇠였다.

어쩐지 이게 딱 들어맞을 것 같아서 이안은 신속하게 홈에다 끼워 넣었다.

애초 제 것이었던 양 쏙 들어갔다.

“아, 반쪽인 게 너무 아쉽다.”

“하나가 되려면 나머지가 있어야겠죠.”

이안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스톨레가 정령을 불러냈다.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랬지만 그는 곧장 표범 정령에게서 뭔가를 받았다.

……반쪽짜리 열쇠였다.

“나도 기드온에게 받은 것입니다.”

“어쩐지.”

“응?”

“기드온이 열쇠를 몸에 보관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시체를 샅샅이 분해해봤는데 도통 열쇠를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아.”

“그 반쪽이 교수님 손에 있어서 못 찾았던 거네요.”

스톨레가 가진 반쪽까지 끼워 넣자 곧바로였다.

귀퉁이에 있는 벽돌들이 꾸물꾸물 갈라지더니 두 명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겨났다.

밀실……?

아무래도 이 구멍이 밀실로 가는 통로인 듯했다.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스톨레가 중얼거렸다.

“필히 저 안에 1황자를 잡을 증거가 있을 겁니다. 기드온이 만약을 대비해 뭔가를 남겨두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분, 그분 하더니 뒤통수 칠 준비는 확실히 해뒀네요.”

“그나저나 기드온 그자도 참 대범하군요. 등잔 밑에다 무언가를 숨겨 놓을 생각을 하다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안전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면에서요?”

“황족은 시종이 모든 것을 해주니 굳이 이런 시설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고, 사용인들은 기드온이 황자의 심부름꾼인 걸 아니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겠네요.”

좁고 협소한 통로를 지나자 또 개구멍이 나왔다.

1황자 몰래 만드느라 고생 꽤나 한 것 같았다.

조악해도 이렇게 조악할 수가.

낑낑대며 구멍을 통과한 즉시 두 사람은 다소 당황했다.

기드온이 남긴 증거품이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웬걸.

“웬 방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네 개씩,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방이 보였다.

대체 뭐 하는 곳일까 했더니.

그 안의 광경을 마주한 스톨레는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1황자 이 개자식!”

유리창 너머엔…… 적게는 13살부터 많게는 17살인 소녀들이 있었다.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옷 한 장만 걸친 채로.

뭉쳐두면 반항할까 각 방에 한 명씩 넣어진 상태였다.

몽롱하게 풀린 그들의 동공 위론 무력감과 무기력증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래선지 누가 다가가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음울함이 그득한 방들을 지나자 비어있는 방 하나가 나왔다.

얼마 전까지도 누가 있었는지 생활 흔적이 자잘하게 남아있는 방.

아마 저곳에 있었을 소녀는 중앙 아카데미의…….

“…….”

욕조차 내뱉지 못할 상황에 이안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 * *

밀실이 발견되고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1황자 일로 황궁에 불려갔던 협회장은 서문을 나오다 우뚝 멈춰 섰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건네왔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뭐라 하시던가요, 스승님.”

스톨레였다.

제가 가장 아껴 마지않던 제자.

모종의 일로 틀어진 뒤 저와 연을 끊었던 무심한 놈.

“폐하께선 그저 보여주셨다. 1황자가 저질러온 악행의 기록을. 그런 연후 내게 하나도 빠짐없이 읊어주시더군.”

“그뿐입니까.”

“나보고 공범이라고 하시더구나. 추잡한 짓의 공범. 그러시더니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었다며 한탄하셨다.”

“혹 서운하셨습니까.”

“…….”

“하나 냉정히 말해 그리 말씀하실만했습니다. 사실 스승님께서 그 일을 덮지만 않았어도 무고한 이들이 죽어 나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나는…….”

“어린 소녀들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1황자는 17살 미만의 소녀에게만 음심을 드러냈다.

그런 놈이 중앙 아카데미의 총괄 관리자였으니 어땠을까.

무수히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었고, 에이프릴 역시 그리될 뻔했다.

턱을 악다문 협회장이 힘없는 음색을 자아냈다.

“그저 황실을 위한 일이라 여겼었다.”

“제가 11년 전에도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협회는 황실의 개가 아니라고.”

“…….”

“스승님, 저는 황족이든 4대 가문이든 철퇴를 내리는 스승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러한 적도 있었지. 그러한 적이.”

“그런 스승님이 제게는 자부심이었기에 협회원이 된 것이 후회되지 않았습니다.”

“후회라…….”

“저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그랬지요. 제 가문을 등지고 협회에 소속되어, 때때로 제 가문에 칼을 들이밀어야 한다 해도.”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협회원들을 살아 숨 쉬게 한 건 자긍심이었다.

협회는 중립이라는 자긍심.

황가든 4대 가문이든 잣대를 똑같이 들이민다는 그것.

하지만 오래전 협회장의 선택은 스톨레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한 여학생을 죽이고 보란 듯 전시해 놓은 1황자의 기행을 덮어버렸으니까.

그로 인해 스톨레의 자긍심도 죽어버렸다.

더는 떳떳할 수 없어서 스톨레는 쫓기듯 에루리안으로 향했다.

잃어버린 자긍심을 찾기 위해, 기드온이 가졌을 무언가를 찾으려고.

“사실 가려진 진실이 밝혀지면 명치에 걸렸던 돌덩이가 내려갈 줄 알았습니다. 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승님.”

“…….”

스톨레의 눅진한 한숨이 협회장에게 닿았을 땐 천근의 무게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1황자의 악행이 밝혀지며 드러난 또 다른 진실 하나.

그것은 바로 1황자와 살리카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본디 가지고 있던 1황자의 괴벽에 살을 덧댄 것이 살리카였다.

그놈이 1황자에게 접근해 마력 고갈을 유발하는 약을 건네며 꼬드겼다.

이거면 힘 빼지 않고 사냥감을 음미할 수 있을 거라며.

그 약으로 인해 적은 힘을 들여 사냥감을 포획했으니 어땠겠는가.

괴벽이 심해질밖에.

그 과정에서 나온 부상자나 사망자를 살리카는 인체 실험에 썼다.

피해자들은 죽어서조차 편히 눈을 감지 못한 것이다.

“살리카, 그자는 때가 무르익으면 1황자의 악행을 까발리려 했지요.”

“그리했다면 황가는 지탄받았을 것이다.”

“지탄 뿐이겠습니까. 황가의 위신이 곤두박질쳤겠지요.”

힘없는 어린 소녀가 권력에 짓밟혔다.

이것만큼 민심이 쉽게 등을 돌릴 일이 또 있을까.

이는 황좌를 쥐려 했던 살리카의 노림수 중 하나였다.

썩어 빠진 황실과 달리 저는 민심을 돌볼 줄 안다는 명분으로 삼으려.

살리카 그자가 괜히 고아원 등등의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게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명확해진 현재 협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죄가 크다.”

반역을 꾸미는 놈과 어울리는 빌어먹을 놈일 뿐인데 감싸고 돌다니.

거기다 그 결과가 기막히게도 살리카 가주를 탈옥시키려는 거라니.

오래전 살인을 저지르고 빌빌대며 살려달라 애원했을 때 1황자 그놈을 내쳤어야 했다.

“하아.”

한숨을 토해내듯 뱉어낸 협회장은 직시해오는 스톨레의 올곧은 눈에 생침을 삼켰다.

저 눈.

예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할진대 어찌 저리 강직한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회한이 밀려들었다.

제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너무도 뚜렷하게 까발려 주고 있었기에.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1황자가 참혹한 짓을…… 아니다.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일 뿐이지.”

협회장은 차마 스톨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낯부끄러움에 홧홧해져 왔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죄를 외면하는 꼴이 될 뿐이니까.

“본디 뿌린 자가 거두는 법. 하니 겸허히 벌을 받을 것이다.”

“폐하께서 혹 형을 내리신 겁니까.”

“내게 광산 노역형을 명하셨다. 그러니 조만간 협회장 자리가 공석이 될 터.”

“…….”

“그 자리를 마냥 비워둘 순 없기에 난 그 중한 자리를 네게 물려주고 싶구나.”

“스승님 저는…….”

“너라면 협회가 잃어버린 자긍심을 이어나갈 수 있을 터. 내 마지막 청이니 거절치 마라. 부디 협회를 잘 부탁한다, 스톨레.”

협회장의 단호한 음색에 스톨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그를 두고 협회장은 시선을 서쪽의 어딘가로 옮겼다.

뷔트시겐 저가 있는 방향이었다.

“최초로 황가의 핏줄이 아닌 자가 협회장이 되겠구나. 물론 새로운 피가 수혈되는 건 스톨레 너에게만 해당한 일은 아니겠지만.”

협회장은 뜻 모를 소리를 남겼다.

그 의미를 제아무리 영민한 스톨레라도 해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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