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아침 댓바람부터 수도의 뷔트시겐 저가 난리 났다.
황제가 예고도 없이 불시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어떻겠는가.
사용인들은 황제를 맞을 예장을 갖추느라 혼이 나가버렸다.
붉은 카펫을 깔아야 한다, 지나시는 길목에 미리 차양막을 쳐야 한다, 차는 사프란 꽃차를 준비해야 한다 등등.
그들이 부산을 떠는 동안 이안이 황제에게 차분히 말을 건넸다.
“어찌 아무런 연통도 없이 오셨습니까, 폐하.”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 담소를 나눌 친우를 보려고.”
“이런 우연이. 저 또한 아르테실 왕국에서 들여온 햇차가 있어 궁에 들르려 한 참이었습니다. 한데 폐하께서 먼저 걸음을 하셨으니 오신 김에 차를 맛보시겠습니까.”
“아르테실 햇차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폐하께서 즐겨 마시는 것이니, 속히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하면 준비되는 동안 뷔트시겐 저나 구경시켜주지 않으련.”
정원을 거니는 황제의 걸음을 이안은 옆에서 찬찬히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도 황제가 데려온 수행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호자와 레와티움 다섯.
최측근만 데려왔다는 건 그저 담소나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용건이 황제에게 있어 중요하다는 뜻.
그게 뭘까 고민해 보는 사이 황제의 음색이 들려왔다.
지극히 딴딴하면서도 몹시 단조로웠다.
“아직 공표는 하지 않았으나 1황자 건은 시간을 끌며 흐지부지되지 않게 할 것이다.”
“즉결 처분을 내리셨다 들었습니다.”
“그럴 만한 사안이니. 그놈은 쇠못이 박힌 길을 따라 수도를 돌며 삼보일배를 할 것이다.”
“…….”
“피해자들에 대한 잘못을 비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될 터.”
사흘 밤낮을 그리 하도록 명을 내릴 작정이다.
걸을 때도, 절을 할 때도 쇠못이 1황자의 전신을 쑤시며 고통을 주도록.
거기에만 거칠까.
삼보일배가 끝나면 화형을 거행할 예정이다.
물론 그조차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야금야금 태우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1황자를 죽이는 것이 황제의 목적이었으니까.
“이는 못난 손주를 둔 최소한의 속죄이지.”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죄를 지으면 그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폐하의 의중, 그것을 제국민들 또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넌 언제나 내 안에 들어가 본 것처럼 내 속에 있는 것을 잘 읽어내는구나.”
“폐하께서 너그러이 봐주신 덕분입니다.”
이안의 매끄러운 언변에 서늘했던 황제의 얼굴 위로 찰나 훈풍이 불었다.
그 훈훈함을 발밑에 깔고서 두 사람은 계속 정원을 거닐었다.
“그나저나 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온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겠구나.”
“아닙니다. 폐하의 방문이시라면 어느 때든 두 팔 벌려 환영할 따름입니다.”
“본디 혀가 매끄러운 자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안 넌 예외다.”
어쩐 일인지 황제는 매 순간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마치 지금은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그저 조금이라도 친밀해지고 싶을 뿐.”
“폐하, 서운합니다.”
“응?”
“전 폐하께서 제 투정을 다 받아주시길래 이미 친밀한 사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시라고 하니 말입니다.”
“하하. 녀석.”
“거듭 말하지만 저는 폐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아, 정략혼만 빼고 말입니다.”
“녀석. 5황녀가 그리 맘에 차지 않는 것이냐.”
“제게 과분한 분입니다.”
“둘러대긴. 이미 일단락지어진 일, 그냥 한 번 더 물어보았느니.”
황제는 뒷짐을 진 채 고아한 뷔트시겐 저를 눈으로 휘 훑어보았다.
설원의 늑대라 불리는 곳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노상 이안에게서 맡아졌던 그 기운이었다.
“아해야.”
“예, 폐하.”
“나는 이번 일을 보고 완전히 결정하였다.”
“무엇을 말입니까.”
“네게 황태자 직을 주기로.”
황제가 내뱉은 뜬금없는 말에 이안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폐하.”
“그리 놀랄 거 없다. 애저녁에 이미 결정한 것이니.”
“…….”
“사실을 털어놓자면 처음에는 2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만한 녀석도 없었으니 말이다.”
수호자가 없어도 능히 지배자의 자질을 가진 녀석이었다.
유하지만 강단 있고 신념은 있지만 휘어질 줄 아는 녀석.
하여 안타까운 마음은 있으나 정에 이끌려 양위를 할 순 없었다.
버젓이 자격을 갖춘 자가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그 녀석이 뛰어나긴 하나 무엇이든 순리를 따라야 하는 법. 이안, 황태자가 되거라.”
“저에겐 자격이 없습니다, 폐하.”
“자격이라.”
이안의 말이 별식이라도 되는 양 황제는 여러 번 되감아 보았다.
그러다 다소 주제를 벗어난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이안, 수호자의 비밀을 꽁꽁 숨기는 황실이 욕심쟁이 같아 보여도 그건 필요한 일이란다. 그 힘은 4대 가문과의 균형을 맞추며 이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동력이기 때문이지.”
“…….”
“그리고 히에로스의 지배자는 반드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살리카 같은 자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힘이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려면 강함이란 토대 위에 어떤 것들이 쌓여야 한다.
이를테면 자비라던가 인내라던가 부드러움 같은 거.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잘 버무려져 있는 인물이 바로 이안이었다.
“이안 너는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저는…….”
“떼잉. 은발이면 됐지 무슨 사족이 그리 많아.”
“…….”
“황제로서 거절은 거절하겠다. 크흠. 그렇지만 인정상 추스를 시간 정도는 주마.”
황제는 짓궂게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빤히 보았다.
얼굴에 구멍이 나겠다 싶을 정도로 그러더니 그는 이내 한 가지를 까먹었다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황제의 옅은 고갯짓에 레와티움이 작은 상자를 이안에게 건넸다.
“받거라.”
“이건 또 무엇입니까.”
“일전에 네가 신뢰의 증거라며 내게 준 바람의 인장이다.”
“이것을 왜 도로 제게…….”
“나 또한 신뢰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인장들을 모아 세대교체를 해도 된다는 허락이기도 하다.”
“…….”
“황태자에게 이 정도는 주어야지.”
* * *
황제의 방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였다.
정원을 보고 있는 이안의 귓가로 발랄한 물음이 날아들었다.
[진정 그리 결정한 것이냐.]
“그게 뷔트시겐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이니까.”
[하긴. 황제 말대로다. 황실과 4대 가문은 균형의 추가 평행이어야 하지. 한데 지금은…….]
반역자를 초기에 잡았다고는 하나 살리카는 혼란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살리카 가주의 동맹이었던 루하흐.
그쪽도 수장이 바뀌고 권력의 판도가 엎어지면서 정신이 없었다.
곪은 것들이 터진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으면 탈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황실의 역할이 중요하지.”
[그렇지. 중간에서 딱 중심을 잡아줘야 수습 중인 혼란이 잘 봉합될 터. 그러려면 우선 후계가 탄탄해야 하고.]
“여느 때처럼 4대 원소를 다룰 줄 아는 황태자가 존재한다는 상징성, 그게 중요한 때긴 해.”
[그 역할을 이안 네가 하겠다는 거구나. 결말치곤 뭐 나쁘지 않다.]
말을 적당히 끊은 녹스에게선 어느 사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니지, 대화 내내 어조가 평소보다 두 음이나 높았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궁둥이를 실룩대는 녹스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거울과 한 몸인 듯 그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열세 살 꼬맹이가 어찌나 때 빼고 광을 내는지.
[으흐흥.]
빗겨지는 머리털마다 아주 윤기가 좔좔 흘러내렸다.
저러다 땜빵이라도 생기겠다 싶을 정도로 매만지길 한참.
이번엔 녹스가 연보라색 나비넥타이를 조물거렸다.
누구한테 청혼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어떠냐, 이안. 신사처럼 보이느냐?]
“꼬맹이가 아빠 옷 훔쳐 입고 멋 낸 것 같은 느낌?”
[흥. 내 멋짐을 질투하긴.]
콧방귀를 세차게 뀌더니만 녹스가 급자기 이안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밖으로 나가자고 성화를 놓는 거였다.
방금까지 제국이 어쩌고, 황태자가 어쩌고 심각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심각함 따위 진즉 배 속으로 삼켜버린 녀석의 모습에 이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언제부터 녹스나 저나 이리 진중했다고.
사뿐한 녹스의 걸음이 이끄는 대로 둘은 상업지구로 향했다.
정확히는 화가나 조각가들이 예술미를 잔뜩 뽐내는 잡화 거리에 들어선 것이다.
이안은 자유분방한 거리와 다소 들뜬 녹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좋수?”
[좋구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하긴. 그분을 직관할 수 있는 날이니.”
그분.
야설계의 아버지이자 선두주자인 작가, ‘거긴 안돼요’
그분을 영접할 생각에 녹스는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녀석에게 있어 그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에 활력을 생명수처럼 넣어주는 은총이었다.
비단 그리 생각하는 게 녹스뿐이랴.
작가를 추종하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저번 같은 일방적인 잠수에도 그저 ‘돌아오시기만 하면 꽃길을 깔아드리겠습니다.’라는 자들이 수두룩하니 뭐.
이런 분위기에 작가가 독자들과 만나겠다고 공표를 한 것이다.
신이 직접 하계로 내려오겠다는데 마다할 신도가 어디 있을까.
“그간 베일에 싸여있었는데 모습을 드러내면 난리 나겠다.”
[푸흘흘. 작가님은 분명 고상하고 우아하고 멋질 것이다. 얼굴 뒤에선 광채가 나겠지.]
“…….”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능한 그 손은 또 어떻고. 작가님과 악수하고 나면 평생 손을 안 씻을 것이다.]
저리 좋을까.
오두방정 떠는 녹스 때문에 이안은 바람 새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녀석으로 인해 잠시 잠깐 복잡함을 잊을 수 있었다.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도착한 녹스의 단골집.
‘젖은 목소리가 흐르는.’
역사가 유구한 서점은 그야말로 인파에 의해 미어터져 나가고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고, 세 줄로 늘어선 줄도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뒤늦게 온 터라 얄짤없이 맨 뒤에 서야 했지만 녹스는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째려보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수호ㅈ…… 여깁니다, 여기.”
호위대가 새벽부터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데 그깟 눈칫밥 따위.
호위대의 고생은 녹스의 긴 행복으로 이어졌다.
[고생했다. 내 후에 톡톡히 값을 치르도록 하지.]
“아닙니다. 녹스 님의 기쁨은 곧 도련님의 기쁨. 언제든 이 줄은 저희가 대신 서겠습니다.”
줄이나 서려고 온갖 치열한 경쟁을 뚫고 호위대가 된 게 아닐 텐데.
고생 참 많다며 이안이 호위대에게 치하의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수고로 앞쪽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난 얼마 후였다.
안경을 코끝에 걸친 이지적인 여자가 낮은 단에 올라섰다.
서점 주인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시라기보다 너무 집중해서 말을 토해낼 틈조차 없는 거였다.
그를 잘 아는 여자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자, 지금 바로 여러분이 기다려온 작가님을 모시겠습니다.”
“우어어어억!”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들 목울음을 토해냈다.
기사단이 떼로 함성을 질렀을 때와 어찌나 비슷하던지.
걸걸한 목청을 생짜로 들어야 하는 이안의 고막만 고생 중이었다.
녹스마저 팔딱팔딱 뛰게 하는 흥분과 광기의 어느 사이, 예민한 이안의 귓가에 경쾌한 발소리가 잡혔다.
다그닥.
……다그닥?
생각지도 못한 발굽 소리에 이안의 고개가 갸웃거리던 차.
“반갑습니다, 여러분. 오늘처럼 화창한 날 독자님들을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상큼한 인사를 하며 작가가 단상에 섰다.
굽이치는 청록색 머리카락과 풍성함이 짙은 초록의 눈동자가 매우 우아한…….
가만?
어째 저것들이 너무 낯익었다.
아니, 그 모습이 비수처럼 날아와 그대로 꽂혔다.
그 탓에 이안은 잠시 멍해졌다.
“어?”
[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무리 이안이 당황을 했어도 녹스의 충격에 비하랴.
단상을 쉼 없이 삿대질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부들거렸다.
[거긴 내가 존경하는 작가님이 서야 할 자리인데…… 어째서 음흉한 네놈이…….]
“허. 오쿨루스가 ‘거긴 안돼요’라고?”
[그럴 리 없다. 내가 흠모하는 작가님은 저놈 따위가…….]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던 녹스가 넋을 놓은 것처럼 주절거렸다.
[현실일 리 없지. 필시 사악한 저놈이 주입한 악몽일 것이다. 안 되겠다, 이안. 내 뒤통수 좀 후려갈겨 봐라.]
“갈겨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것 같은데.”
[캬악. 같다니! 그딴 망발을 일삼지 마라. 내 작가님과 저놈을 같은 취급하는 건 모욕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녹스의 얼굴은 이미 울상이었다.
마음과 달리 진즉 머리가 현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어헝헝헝. 이건 배신이다. 교양 도서의 배신. 하니 난 이제부터 그것들을 죄 끊고 말 것이다.]
기어코 녹스는 헛소리를 주워 삼키다 서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슬픈 서러움을 꼬리처럼 남긴 채로 말이다.
* * *
녹스가 빨간 책을 끊은 지 이제 하루째.
본가로 돌아온 이안은 곧장 무누스 설산으로 향했다.
중턱의 정자에 당도한 후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의 인장.”
황제가 신뢰의 표식으로 준 것이다.
그것을 제자리에 두려고 온 참이라 이안은 뜸 들이지 않고 인장을 유유히 흘려보냈다.
후웅.
실바람을 타고 정자의 중앙에 안착한 인장.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온 게 기쁜지 그것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다지 거센 움직임은 아니었으나 바람이 일었다.
그리 뜨겁지도 그리 차갑지도 않은 안온한 바람이.
무누스 일대를 휘감은 바람은 이내 슈바츠로 뻗어가며 그곳의 번잡함을 찬찬히 몰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