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12화 (212/214)

제212화

살랑살랑 부는 바람결을 향해 한 남자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날이 참으로 적당합니다.”

남자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벽난로 옆의 탁자에 앉았다.

그런 뒤 눈가에 문신이 있는 남자를 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성대한 식을 치르기에는 더없이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알란 대장, 아니 사령관님.”

“음. 십 리 밖도 보일 만큼 날이 화창하군.”

“그나저나 시간 참 빠른 것 같습니다. 그날로부터 벌써 3년이나 흘렀다니 말입니다.”

“하긴. 황태자가 되신 도련님께서 벌써 열아홉이시니.”

“돌이켜보면 참 30년 같은 3년이었습니다. 많은 일이 몰아쳤지 않습니까.”

“그렇지. 살리카 가주가 무한의 감옥에서 굶어 죽고, 1황자가 화형에 처해 지고, 2황자님은 결혼을 하시고, 그리고…….”

알란은 말꼬리를 흐리며 제 수하를 쳐다보았다.

매일 보면서 뭐가 그리 신기한지 녀석은 정복을 연신 문질러대고 있었다.

날이 바짝 선 검은색 정복을 말이다.

실상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그것에는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등에 늑대가 은색 달을 움켜쥔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

이는 뷔트시겐과 황가의 상징이 섞인 것으로 황태자의 친위대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하니 어떻겠는가.

친위대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황궁 소속의 친위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핫.”

“아니 사령관님, 왜 갑자기 웃고 그러십니까.”

“도련님이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나서 그랬다.”

“우리에게 꽃길을 깔아주겠다고 하신 거 말입니까?”

“사실 매번 놀랍다. 약속하시긴 하셨지만 이렇게 번번이 새 꽃길을 깔아대실 줄은.”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도련님…… 아니지, 황제가 되실 분의 대관식에 우리가 호위를 서다니.”

수하 놈이 들뜸과 긴장에 숨도 쉬지 않고 연신 떠벌렸다.

“후아. 진짜 떨립니다.”

“나는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도련님이 황제가 되는 것이.”

“대장도 그렇습니까. 저도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헷갈립니다.”

녀석이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살가죽 벗겨지게 주물 대는 모양새에 알란이 그만하라며 말렸다.

멋진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볼따구를 벽돌에 간 모양새로 호위할 수 없잖은가.

만류하던 알란은 볼부터 식히라며 수하에게 찬 수건을 던져 주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도련님만큼 황제에 부합하는 인물도 없지.”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루하흐 가주가 된 레브 도련님에 살리카 가주가 된 클로에 님이 전부 도련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있지요. 이렇게 인복이 넘치는 것만 봐도.”

“그뿐 아니지. 아이루스 상단에다 정보상인 호그의 휘파람의 주인장도 적극적으로 정보를 물어다 주고 있잖으냐.”

“그것만이 아니잖습니까.”

“물론 헤르세며 광부 조합의 피그미족까지 도련님을 돕고 있고.”

“히에로스에선 거지도 황금을 발로 차고 다닌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요. 그게 다 우리 도련님 덕이 아니겠습니까.”

“혹자는 그리 말하지. 초대 황제가 이룩한 번영기가 다시 찾아왔다고.”

결국 이안의 찬양으로 흐른 수다는 끝을 모르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친위대의 숙소로 칼브란이 콧김을 뿜으며 쳐들어오기 전까지.

“내 이럴 줄 알았지. 급 좀 올랐다고 밑에 놈들만 실컷 부리곤 너희들은 퍼질러 있어?”

“아, 집사장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냐, 이 썩은 놈들아. 냉큼 궁뎅이 안 떼!”

곧 대관식인데 호위들이 노가리나 까고 있다며 칼브란이 등짝을 마구 두드렸다.

그의 타작은 1절로 끝나지 않았다.

한 번뿐인 식이 완벽해야 한다고 호위들의 귀에 피가 날 때까지 들들 볶았더랬다.

.

.

.

칼브란의 염려 덕분이었을까, 준비를 오래 한 덕분이었을까.

4대 가문과 정령들이 힘을 모아 준비한 대관식은 모두의 기억에 오래도록 회자 되었다.

그리고 자주 입에 오르내렸던 만큼 히에로스의 역사서에도 유례없이 장문으로 기록되었다.

『마치 꽃비처럼 눈송이가 소복소복 내렸다. 하얀 눈송이와 더불어 오색의 꽃들 역시 수도 전역을 뒤덮었다.

겨울이었지만 전에 없이 맑은 날, 히루푸스를 태운 청백색 새들이 창공을 누볐다. 그리고 황궁 서문에서 중앙 광장의 신전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뷔트시겐의 정령 기사단이 각을 맞춰 정렬했다.

절도 있게 위풍당당한 그들과 제국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들, 그들 모두 기쁨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번영기를 가져온 황태자의 즉위식이니 아니 그럴까.

제국민 누구나 축복하는 분위기 속에서 둔중한 북소리와 의장대의 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조되던 음악이 점차 사그라들다 아예 멈췄을 즈음 황태자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구경꾼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뜨겁고도 열렬한 지지였다.

그들의 함성을 악기 삼아 황태자는 옅게 미소 지으며 나아갔다. 느긋한 그의 걸음 뒤로 황태자의 친위대들이 흐드러진 꽃길을 밟았다. 다시 오지 않을 더없는 영광의 순간은 무척이나 찬란했다.』

* * *

“폐하.”

서류를 끄적거리고 있던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말끔한 얼굴로 올리브가 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물을 넘긴 지가 엊그제 같은데 녀석의 만면엔 어느새 청년티가 완숙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젖살도 빠지고, 턱선 또한 베일 듯이 날렵해진 상태.

영영 나이를 먹지 않을 것 같더니만 언제 이리 성숙해진 건지.

“동생이 수석 서기가 돼서 그런가 봐. 얼굴이 달덩이처럼 폈네, 폈어.”

“에이, 폐하의 친위대가 됐을 때보다야 더 좋겠습니까.”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시지.”

“츄릅.”

올리브가 과장되게 혀로 입술을 핥아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폭소에 올리브 역시 금세 따라 웃었다.

한정 없이 벙글거리고만 있을 것 같더니 녀석의 입에서 ‘아차’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폐하랑 대화하다 보면 꼭 하려던 말을 까먹어요.”

“뭐 할 말 있어?”

“그게 아니라 클로에 교수님, 아니지 살리카 가주님이 오기로 한 시간이잖아요.”

“아아.”

“이 틈에 좀 쉬시지요, 폐하.”

“뭐 얼마나 일했다고.”

“소처럼 일하며 잠은 죽어서 자자를 몸소 실천하는 분이 시치미 떼시긴.”

“나 엄청 유유자적인데.”

“허. 대신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기함할 겁니다.”

올리브의 발언에 이안은 시치미를 떼며 해맑은 척 굴었다.

황제가 죽자고 일하니 아랫것들이 쉴 수가 없다.

눈치 보여서라도 다들 밤늦게까지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도통 퇴근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라는 태평성대인데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대신들 입에서 틈만 나면 이러다 이혼당하게 생겼다며 앓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

그들의 푸념이 귓가에 꽂히는 것 같아 올리브는 이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폐하, 대신들이 와서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기 전에 제에발 쉬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친위대 부사령관이 되더니 잔소리만 늘었어, 아주.”

올리브의 성화에 이안은 못 이기는 척 소파에 앉아 뷔트시겐에서 보내온 아케랑코를 들이켰다.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비웠을 때였다.

적절한 때를 귀신같이 맞춘 시종장이 말을 전해왔다.

살리카 가주가 당도했다고.

* * *

들어오란 허락이 떨어지자 클로에가 호탕하게 걸어들어왔다.

어째 교수님은 갈수록 더 대장부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에 슬쩍 입꼬리를 올린 이안은 유려하게 대화의 서두를 뗐다.

“가주님 얼굴이 피셨습니다.”

황제가 아닌 제자의 얼굴을 하고 건넨 말이었다.

그것을 읽은 클로에 또한 반쯤은 제자를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폐하.”

“가주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연하남이 생겨서 그런지, 신수가 훤해졌다는 말이었습니다.”

“으하하핫. 연하남은 무슨.”

이안이 넉살을 떨자 클로에가 화통하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런 거 아니라는 격한 부정이었다.

“그놈 나이가 스물여덟입니다, 고작 스물여덟. 제가 마흔 줄인데 스물여덟이 어디 연하남 축에나 낀답니까. 그저 핏덩이지요, 핏덩이.”

“음. 그 핏덩이가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던데요.”

“응?”

“가주님을 외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아아.”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데 성정도, 외양도 준수한 것이 인기 꽤나 있겠더군요.”

“그놈이 실제로 인기가 많긴 합니다.”

“아무래도 스톨레 교수님이 더욱 분발해야겠습니다.”

“협회장이 되고 나서 노상 바쁜 그 인사는 내가 다른 놈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아, 축하합니다.’ 할 겁니다.”

단조로운 클로에의 어투에는 털끝만큼의 서운함도 묻어있지 않았다.

시종 담백함만 존재할 뿐.

그런 클로에의 얼굴을 이안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로에와 스톨레, 현재 애인 사이인 둘의 관계는 언제나 그랬다.

뜨겁지 않고 황혼에 접어든 노년의 부부처럼 안온함만이 그득했다.

호감을 지닌 채로 에루리안에서 10년을 흘려보낸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속에 뜨거움이 없을까.

‘그리 오래 봐왔으면서 아직 교수님이 스톨레 교수님에 대해 잘 모르시네.’

지난 생, 클로에가 죽은 뒤 스톨레는 작전 도중 이안을 대신해 죽었다.

진실은 그랬지만 그 죽음은 다분히 고의적인 측면이 있었다.

클로에가 살아있지 않고 그의 곁에 없었으니까.

그것만 보아도 스톨레는 뜨거운 불을 안에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바위는 평온할 땐 꿈쩍하지 않는다.

다만 그 바위가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터지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예를 들어 연하남의 도발이라던가 하는.

‘앞으로 좀 재밌어지겠는데.’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남의 연애사였다.

당사자는 골치 아파도 제3자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되니까.

이안이 파란만장해질 앞날을 예측하는 동안 클로에가 호위에게서 웬 상자를 받았다.

그런 연후 탁자에 내려놓고선 앞으로 쭉 밀었다.

부피가 그리 크지 않은 적당한 상자.

그것의 주인을 알리듯 그녀의 시선이 올리브에게 향했다.

“연애 얘기는 그만 됐습니다. 오늘 황궁에 온 건 부사령관 때문이니까요. 곧 올리브 저 녀석의 생일이지 않습니까.”

“교수님.”

“박복한 녀석. 하필 건국제 일주일 전에 태어나선.”

클로에가 괜히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었다.

히에로스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꼽으라면 단연코 그날일 것이다.

바로 건국제인 이퀴녹스.

하여 그즈음 태어난 아이들은 대개가 생일을 찾아 먹지 못한다.

부모조차 건국제 준비를 하느라 까먹기 일쑤였으니까.

이럴지니 녀석이라고 생일을 제대로 치러본 적 있으랴.

상자를 받아든 올리브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전은 몰라도 지금은 교수님과 이안 덕분에 매년 즐겁게 보내고 있어요.”

“하긴. 제 사람이라면 끔찍이 아끼는 폐하가 계시니.”

“그렇다고 안 오시면 안 돼요, 교수님. 내년에도 꼭 저 보러 오셔야 해요. 올해 선물보다 더 비싼 놈을 들고.”

“이런. 친위대 부사령관께서 박봉의 가주를 벗겨 먹으려는 것이냐.”

“아직 교수로 재직 중이시라면 몰라도 이젠 안 통하는 엄살입니다, 가주님.”

“으하하핫. 그러냐.”

클로에는 사소한 것에도 크게 반응하며 자꾸 웃음을 매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적인 일이 없음에도 굳이 시간을 내서 황궁에 오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친위대가 된 아이들을 보러 오기 위함이었다.

까놓고 말해 황제의 친위대를 에루리안 출신들이 맡게 될 줄 누가 예측했으랴.

가까이서 지켜본 그녀조차 생각지 못한 것을.

하여 아픈 손가락이었던 제자들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자리에 오른 것은 그녀의 가장 큰 낙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웬일로 녀석들이…… 아니, 친위대가 안 보입니다. 폐하 곁에서 일절 떨어지지 않더니.”

“아, 훈련소에 갔습니다. 신병이 들어오는 날이라.”

“이런. 다른 부대엔 또 인재가 씨가 마르게 생겼습니다. 고것들이 출동했으니. 실력이 좋으면 등급이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영입하는 악어 떼를 누가 당하겠습니까.”

“뭐 덕분에 내가 아주 든든합니다.”

클로에는 환한 표정의 이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비로써 평온에 이른 녀석의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저 안온한 표정을 보려고 매년 애써 걸음을 한 보람이 있달까.

‘……이만하면 되었다.’

무언가를 온몸으로 짊어진 듯했던 이안도, 삶이 버겁고 힘겨웠던 녀석들도 행복해 보이니 됐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클로에는 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폐하,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명색이 일족의 수장이라고 앉아서 밥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어서 후계자를 찾아 물려주고 뒤에서 훈수나 두던 해야지 원.”

클로에가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하고 집무실을 나가는 그녀의 뒤, 묵묵하게 따라가던 클로에의 호위가 뒤돌아섰다.

“폐하.”

많은 것이 묻은 부름에 이안은 호위를 직시했다.

왼쪽 턱에서 목까지 칼로 벤 흉터가 우둘투둘하게 있는 남자.

그는 트란 카스티야였다.

다소 누긋하던 카스티야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는 꼭 폐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네 목숨을 살려줘서? 그건 네가 에이프릴을 구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 것뿐이야.”

“그것 말고 말입니다.”

“그럼?”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굳이 하기도 낯간지럽군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말을 하다 마는 건데 말이야.”

“제가 언제는 폐하께 좋은 놈이었습니까.”

“한 마디를 안 져요.”

“그건 폐하도 마찬가지면서 저한테만 덤터기를 씌우시긴.”

“됐다. 그만 가라, 트란.”

“예. 폐하 뜻대로 물러갑니다. 언제나 보중 하십시오.”

카스티야는 재차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이안은 모를 것이다.

숨이 끊어져 가던 저를 녀석이 살린 뒤 클로에와 연결해 준 것은 기회였다는 것을.

제가 인간답게 살아볼 마지막 기회 말이다.

<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의라 카스티야 네놈을 못 믿겠어. 사람이나 패고 알량한 목숨줄을 지키려고 그저 시키는 대로 사는 네놈의 천성 따위.>

<하지만 변하고자 하는 놈에게 낙인을 찍을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죽을 만큼 버둥거리며 치열하게 살아봐. 지켜볼 테니까.>

<내가 선택지를 줬더라도 그다음은 네 몫이다. 어찌 살지 결정하는 거 말이야.>

이안 말마따나 치열하게 살아낼 것이다.

이안 뷔트시겐이 그러하듯 저 또한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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