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황제다 보니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았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다만 이번 만남만은 해묵은 인연에 기댄 것이었다.
노인은 이안의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 이안과 마주했다.
전대 정령사 협회장.
풍채 좋고 등등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조금 야위고 푸근한 동네 할아버지가 자리해있었다.
뜨끈한 찻잔을 들며 협회장이 유한 어조로 입을 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황태자 책봉식 이후 처음이니 정말 오래됐군요.”
“폐하의 선정은 귀동냥으로 듣고 있습니다.”
“선정이랄 것까지 있나요.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폐하 덕분에 굶어 죽는 이도, 권력에 짓밟혀 억울한 이도 없다 칭송이 자자한데.”
협회장의 칭찬이 줄지어 이어지자, 이안은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면 됐다는 신호.
바쁜 시간을 쪼개 협회장을 만나고자 한 것은 남들과 똑같은 얘기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노역형 대신 에루리안의 학장직을 맡아 하루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게 다 폐하 덕분이지요.”
“딱히 협회장님이 예뻐서 형을 바꾼 게 아닙니다. 그저, 아카데미 시절 기드온 일로 스톨레 교수님께 진 빚이 있어 갚았을 뿐이지.”
“그 이유뿐만이 아니셨지요. 제게 학장직을 맡기신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세요. 그곳, 에루리안으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대가 황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짓밟아 버린 것이 무언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이안의 말대로였다.
채 스물도 되지 않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깨달았다.
1황자가 죽인 어린 목숨들, 그들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를.
하여 몸만 고달팠을 광산 노역형보다 학장직을 지내며 학생들을 마주하는 게 더 지독한 형벌이었다.
가끔 심통이 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충만했다.
에루리안을 졸업하는 아이들이 ‘잘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할 때마다 그랬다.
그들이 사회에 나가 천시받을까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의 에루리안은 그랬다.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변모한 지 오래였다.
친위대를 배출한 곳이니 더 말해 뭣하랴.
하여 에루리안을 거쳐 간 아이들은 모두 중임을 맡는다.
‘작금의 에루리안은 희망이고 기적이지.’
협회장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이안을 지그시 보았다.
홀린 듯이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저도 모르는 새 이안의 뒤로 가 닿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지닌 날카로운 인상의 호위에게로였다.
‘라이라프스 살리카.’
황제의 날카로운 검이라 불리는 친위대 부사령관.
그는 히에로스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자이다.
그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를 베는 데 자비가 없어서일까.
황제는 신뢰하지 않는 자를 만날 때면 반드시 그를 대동한다.
반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부드러운 검이라 불리는 올리브란 자를 곁에 둔다.
황제의 의중을 가늠해보고 싶거든 뒤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보라는 말이 괜히 있으랴.
협회장은 라이라프스의 존재에 쌉싸름해졌다.
예전에 이안을 배척한 전적이 되돌아온 것이었으니까.
“폐하를 알현하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응?”
“제가 편협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었습니다.”
“내게 잘못을 구할 건 없습니다. 협회장님이 사과를 건네야 할 이들은 따로 있으니까.”
“…….”
“아, 무거운 얘기는 그만하죠. 다른 용건이 있어 부른 것이니.”
이안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1황자는 끝까지 악다구니를 쓰며 죽었지만, 전대 협회장은 다르다.
제 잘못을 아는 자라, 굳이 몰아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따금 수도로 놀러 오세요. 다름이 아니라 선황의 말벗이 되어드리라는 청을 하는 겁니다.”
“선황…… 아니, 형님께선 히에로스를 유랑 다니느라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날 이 자리에 밀어 넣고 혼자 즐거우시긴 합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또래의 말벗이 없다며 적적해하시는 게 걸리는 걸 보면 내가 그분께 꽤 약한 것을.”
“아.”
“아버지와 칼브란, 발리올 가주까지 대동하고 낚시 다니시면서 어찌나 툴툴거리시던지.”
“그거 순 엄살입니다. 형님의 특기지요. 수호자도 말짱히 곁에 있는데 적적은 무슨.”
“그래도 연세가 연세이다 보니 혹 우울증이 생길까 염려가 됩니다.”
“하도 정정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러니 에루리안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간혹 선황을 뵈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염치가 없긴 하지만 그리하겠습니다.”
이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알겠다고 답하는 협회장을 응시했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인연이었다.
협회장 쪽은 몰라도 저로서는 털어버릴 게 없는 인연이었다.
“협회장.”
“예, 폐하.”
“다음에는 우리의 만남이 조금 더 편했으면 좋겠습니다.”
“……예.”
“건국제 전야제 기간이라 연일 떠들썩한데 조금 더 머물다 떠나세요.”
* * *
“폐하께서는?”
승마바지를 입은 5황녀가 지나가는 시녀를 붙잡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5황녀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대체 폐하께서는 또 어디를 가셨단 말이냐.”
5황녀의 고성이 별일 없던 황궁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녀의 심기가 불편해도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연례행사가 온 것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 행사는 모두 황제 때문에 발생했다.
흠잡을 데 없는 황제라도 나아지지 않는 고질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말없이 사라지는 방랑벽이 있다는 것.
그 때문에 황제의 책사인 5황녀는 때때로 마물처럼 변했다.
황제의 안전이 염려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망할 노무 폐하께선 하루라도 내 속을 안 썩이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줄 아시지.”
“한두 해도 아닌데 어찌 그리 번번이 화를 내는 것이냐.”
5황녀의 씩씩거림에 답을 한 건 2황자였다.
2황자는 손을 들어 공손히 예를 취하는 시종들에게 단 음식을 가져오라 명했다.
짜증을 가라앉히기에는 그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분주하게 주방으로 향하는 시종들을 뒤로 한 채 2황자는 황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런 뒤 다리를 꼬고 앉으며 소파를 두드렸다.
“너도 그만 앉거라.”
“오라버니는 걱정되지 않습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실 분이다. 그리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요.”
“다른 때면 몰라도 건국제가 아니더냐. 이맘때면 그분께서 가시는 곳이야 빤한데 너도 참.”
“빤한데, 매번 약 올리듯 기습적으로 사라지시니 열 받아서 그렇죠.”
“하핫. 네 반응 때문에 더 그러시는 것이다.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에휴. 하여튼 못돼 처먹으셔선.”
5황녀는 시녀가 서둘러 차린 다과를 전투적으로 먹어 치웠다.
케이크를 먹는 건지, 아니면 말없이 사라진 황제를 씹는 건지.
조각 케이크가 거의 세입 만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오라비로서 흐뭇하게 보며 2황자는 홍차를 들이켰다.
“이번에도 수도는 황제가 없는 건국제를 보내겠구나.”
“대신 뷔트시겐이 그만큼 요란하잖아요. 폐하를 보려고 온갖 정령에, 타국 사람들까지 그곳으로 죄 몰려드니까.”
“하여 볼거리가 넘치지.”
“한데 오라버니는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매번 폐하를 따라가시더니.”
“이번엔 갈 수가 없었다. 만삭인 아내를 두고 며칠씩 자리를 비우는 건 좀.”
“하여튼 오라버니도 팔불출입니다.”
“아, 폐하께서 그제…….”
“그제? 그제라면 폐하께서 오라버니의 사저를 방문한 날 아닙니까.”
“……아니다, 됐다.”
2황자는 5황녀의 의문 어린 눈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무어라 콕 집을 수 없는 미묘한 걸림이었으니까.
<한 번 더 축하해야겠군요. 이제 곧 그대의 첫 아이가 태어날 터이니.>
만삭의 둥근 배와 의연한 2황자를 이안은 번갈아 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직시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을 읽어내듯이 말이다.
<참 특별한 아이입니다. 아무래도 그 아이에게 걸맞은 선물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아이가 곧 태어날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던 이안이 웃음을 흘렸다.
단순한 웃음일 수 있는데…… 황제가 예언자라 불리기 때문일까.
어쩐지 묘하게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 2황자는 명치 한구석이 더부룩했다.
* * *
[내가 예언 하나 해주랴?]
이안은 녹스의 뜬금없는 발언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웬 예언?
그게 뭘까 싶어 이안은 어서 말해보라고 눈짓으로 재촉했다.
[크흠. 중앙 광장에 막 발을 내디디면 말이다. 1장로와 2장로가 멱살을 잡고 있을 게다.]
“난 또 뭐라고. 매번 있는 일인데 예언은 무슨.”
[푸흘흘. 1일 1멱살. 어후야 못 당하겠어, 둘의 노익장은.]
녹스의 넉살대로였다.
중앙 광장에 발을 딛자마자 2장로의 목청이 이안의 발치를 울렸다.
“뭐요? 지금 나한테 교양이 없다 했소? 하! 무시이익?”
“대개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면 발끈하지.”
“흥. 내가 언제. 내가 언제 그랬단 말이오!”
“유치하긴. 바둑이 제 맘대로 안 둬진다고 걸핏하면 판이나 뒤집고. 하여튼 철이 없어, 철이.”
“그러는 1장로는. 북쪽 관리자한테 노상 지면서 잘난 척은.”
노친네들이 또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있었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침을 튀기는 두 장로와 그들 가운데에 낀 루체.
루체가 ‘이 철없는 것들을 어쩔꼬.’라는 표정으로 파이프 담배를 흔들었다.
물부리를 꽉 쥔 손에서 말썽 많은 쌍둥이를 둔 부모의 비애가 느껴진달까.
[루체 저 녀석, 바둑 둘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하하. 그때부터 그 친구들이 바둑만 두면 집 한 채는 너끈히 날리니.”
[누차 말하지만 바둑 그거는 악의 화신이다. 일전엔 내 무릎뼈를 갈더니 이제는 어휴.]
몸서리치는 녹스를 두고 이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치렁한 은발을 흩날리며 걷는 그와 뒤따르는 친위대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광경이라 중앙 광장은 일순 조용해졌다.
하지만 정적은 찰나였다.
“폐하, 이것 좀 드셔보세요.”
“불꽃서리 즙이 피로 회복에 좋아 폐하를 위해 준비…….”
“거 나도 말 좀 합니다. 폐하, 저번에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력을 응축해 기구를 공중에 띄우기까지…….”
음식을 권하는 상인부터 이안과 토론하고자 하는 공학자까지.
광장에 좌판을 차린 이들이 죄 달라붙어 이안에게 말을 건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런 광경이 한두 해가 아니라는 것인즉.
사람들이 준 것을 받거나 질문에 세심히 답하는 이안을 장로들은 흐뭇하게 보았다.
이안은 자신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뷔트시겐의 자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