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커흠.”
물론 그 자부심을 넋 놓고 바라만 보는 시간은 상당히 짧았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또 얼굴 한 번 못 보고 회궁 하는 뒷모습만 지켜봐야 할 테니까.
몇 번 그런 전적이 있어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안을 선점하기 위해 두 장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럴 때 보면 또 합이 척척 맞았다.
“어허. 폐하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네. 조금씩 떨어지게.”
“폐하, 이쪽으로.”
두 장로는 이안만 쏙 빼서 광장의 정중앙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사령관이며 뷔트시겐의 수뇌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평소에는 쉬이 만날 수 없는 인물들.
이들이 이곳에 떼지어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안이 건국제 때마다 찾아오면서 연회를 저택이 아니라 광장에서 치렀으니까.
“잘들 지내셨습니까.”
“폐하 덕분에 반백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좀도둑이 들끓기를 하나, 어디 뒷골목에서 문제가 생기길 하나.”
“쉬엄쉬엄 일하며 두둑한 월급을 받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딨습니까.”
이안의 너스레에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그에 질세라 이안의 곁에 있던 올리브가 목청을 높였다.
“아, 맞다. 또 까먹을 뻔했다.”
“응?”
“칼 집사님이 그러셨거든요. 자신이 폐하를 마중할 수 없는 비극이 생기거든 대신 말을 전해달라고요.”
“아, 늦는 거 보니 또…… 뭔가를 준비하나 보네.”
대꾸하는 중에도 이안은 생침을 꿀떡 삼켰다.
태연하게 말했지만 솔직히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심장이 세차게 울렸다.
예전에도 그런 전적이 있잖은가.
막 페이라조 3성이 됐을 때 요란하게 축하해주던 전적 말이다.
그때부터 맛이 들린 칼브란은 매년 제 환영식을 과하게 준비했다.
재작년에는 히루푸스를 이용한 공중 공연을, 재재작년에는 영상석과 증폭석을 이용한 연극 공연을.
그것들이 보기에는 무척 평범해 보이지만 문제는 공연의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안에 대한 찬양과 칭찬 일색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비범하더니 지금은 더 대단하다는 다분히 사이비스러운 올려치기.
그걸 슈바츠에 있는 사람들이 다 보도록 하는 건 정말이지…… 낯뜨거웠다.
그렇지만 그만하라고 칼브란을 말릴 순 없었다.
단단히 삐칠 테니까.
해탈한 이안이 뒷목을 문지르는 사이 올리브가 뒤늦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좀 늦더라도 꼭 자기 얼굴은 보고 가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그래야지. 칼브란이 삐치면 무섭거든.”
물기 많은 눈망울로 물끄러미 쳐다만 보기.
며칠 그러고 말면 괜찮은데 속이 풀릴 때까지 그러니, 그 사태만은 막고 싶었다.
재차 뒷목을 문지르는 이안에게 올리브가 연거푸 말을 붙였다.
“아, 발리올 가주님이 전한 말도 있습니다.”
“이따 있을 무투 대회 때문에?”
“예.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시겠답니다.”
“그리 자신하는 것을 보니 올해 데려온 발리올들은 실력이 만만치 않겠는데?”
“그럴 걸 알고 우리 쪽도 칼 집사님이 진즉부터 출중한 인재를 선발해놓으셨잖습니까. 뷔트시겐이 질 수 없지요.”
노란 머리칼의 올리브가 다분히 뷔트시겐다운 전의를 다졌다.
녀석뿐 아니라 온갖 머리 색의 친위대 전부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더니 대뜸 무투 대회 출전자들에게 가서, 지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며 반협박을 일삼았다.
무엇을 하든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로웠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이들, 각종 주제로 쉼 없이 떠드는 이들, 정령 무리와 내기를 하는 이들.
그리고…… 웃고 떠드는 뷔트시겐의 사람들.
이안이 바라던 것들이 한자리에 넘치도록 녹아 있었다.
잠깐의 평화에 젖어있던 그때.
“이아아아안!”
까만 소의 우렁찬 외침이 이안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껏 고양된 그 소리에 순간, 녹스의 안광이 빛을 뿜었다.
며칠 굶은 개가 맛 좋은 닭 다리를 발견한 것 같달까.
[오, 왔구나.]
녹스가 도도도 뛰어갔다.
웬일로 로르를 환대하나 했더니만.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로르를 휙 지나쳐 뒤에 있는 오쿨루스에게로 직진했다.
아니지, 정확히는 야설계의 대가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작가님, 이리 귀한 걸음을 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흐응.”
[내가 재촉하는 건 아니고…… 신작은 언제…….]
“어련히 알아서 낼까.”
[아무렴요. 작가님의 귀한 손이 다치면 안 되니 쉬엄쉬엄하셔야죠.]
녹스가 양손을 마구 비볐다.
관계의 역전이었다.
처음에는 오쿨루스가 책 한 번만 읽어달라며 녹스를 쫓아다녔는데.
사람 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쿨루스에게 찰싹 붙어 수발드는 녹스를 피식대며 보고 있을 때였다.
시끌시끌한 좌판을 뚫고 또 다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매년 느끼지만 매년 정신없습니다.”
“아, 아이루스 상단주.”
“근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폐하.”
“틈만 나면 봤더니 마치 어제 본 것 같군.”
“저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폐하를 제일 먼저 반기시던 가주님께선 안 보이십니다.”
“발리올 가주의 낚시 내기에 발목 잡히셨다네.”
“그분의 집착은 여전하시군요. 삼대가 덕을 쌓아야 잡는다는 상아비늘연어에 어찌 그리 목매시는지.”
“어쩌겠나. 그거 한번 잡아보는 게 소원이라는데.”
이안이 빼문 웃음의 꼬리 끝, 상단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고갯짓이 꽤나 분주했다.
“그나저나 루하흐 가주님도 안 보이십니다.”
“해상 무역건 때문에 바다 엘프의 수장을 만나고 있다 하더군.”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도 일만 붙들고 있을 줄 애저녁에 알아봤지요. 워낙 일에 미치신 분이시라.”
“그 정도까진.”
“아니, 이런 날 가주가 쉬어야 재정부 총관도 마음 놓고 이곳으로 올 것 아닙니까.”
“아, 에이프릴이라면 조금 늦는다고 진즉 연락이 왔네.”
이안의 해맑은 답변에 상단주가 답답한지 가슴을 퍽퍽 쳐댔다.
“아이고, 그렇다고 이리 느긋하신 겁니까. 재촉 한번 않으시고.”
“바쁜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진 않으이.”
“에휴. 폐하께서 하시는 걸 보면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서도 식장에 못 들어가실 것 같습니다.”
“하하핫. 지금 저주하는 건가.”
“답답해서 그럽니다, 답답해서. 이러다 제 숨이, 아니지 총관님의 숨이 꼴딱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자신이 에이프릴이라도 된 양 상단주가 앓는 소리를 내며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도 속이 달래지지 않는 모양인지 재차 가슴팍을 두드려댔다.
때가 절묘했다.
격해진 상단주의 답답함을 다독이려는 듯 사박사박,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이안.”
고운 목소리와 푸른 머리카락이 이안을 응시했다.
그 눈부심 위로 종탑에서 퍼지는 종소리가 덧입혀졌다.
* * *
댕. 대애앵.
이안은 에루리안의 종탑에서 울리는 청아한 종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결계가 해제되고부터는 늘 이렇다.
마치 자신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부드러운 존재감을 알려온다.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한없이 차분해지는 것 같달까.
하여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는데 녹스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이곳에 훈련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오게 될 줄은.]
“그러게. 기분이 좀 색다르다.”
이안은 종탑의 계단을 밟아가며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가 당도한 밀도 높은 공간.
예전에는 발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곳을 이루는 밀도가 그에게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거침없이 나아간 이안은 밀실의 끝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막다른 벽이 그를 반겼다.
아니지, 벽이라기에는 말캉해서 젤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런 벽에도 벽화가 그려지네.”
[달랑 문짝 하나 그려져 있는 게 무슨 벽화라고.]
“그래도 신기하잖아.”
[너무 단순해서?]
“아니, 움직여서.”
벽화는 말캉거리는 벽 전체를 도화지 삼아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줄기차게 벽화를 쫓아 굴러갔다.
“누가 짐작이나 할까. 이 문이 정령계로 가는 입구라는 것을.”
[본래 입구는 여기가 아니라 말로의 탑에 있는 거다.]
“거기에 있는 거야 지금은 막혔으니.”
이안이 그림으로 손을 뻗자, 그것을 본 녹스가 대뜸 물었다.
[한데 진정 갈 것이냐.]
“가서 확인해 봐야지. 2황자의 자식이 마력핵 없이 태어났으니.”
[핵이 없는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알이 생기지 않아서 그러는 거지?]
“어. 흐름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긴. 그것을 속 시원히 말해줄 이는 여신뿐이지.]
녹스의 머리통이 까닥거려짐과 동시에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나저나 이안, 맹약이 황가의 핏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이냐.]
“본래의 흐름대로 가게 만들어야지.”
[곧 죽을 것 같은 그 아이를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너?]
“나도 이제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나 즐기며 살아봐야지. 미친 듯이 놀아보려고.”
[농담도 참 재미없게 한다.]
이안이 하는 소리가 실없어 보여도 그 속에 든 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그걸 알기에 녹스는 가만히 이안을 들여다보았다.
“녹스 너도 알잖아. 내 소원.”
[네 마지막 바람?]
“응. 내가 비록 은발이긴 하지만 나는 뷔트시겐이야.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내 마지막은 설원의 늑대로, 뷔트시겐의 일족으로 무누스 설산에 묻히고 싶어.”
이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욕심이자 바람이었다.
그를 위해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벽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안의 손에서 뻗어 나온 네 개의 색이 그림에 스며든 즉시였다.
벽화 안쪽에서 오색의 바람이 몰아치며 이안을 살며시 집어삼켰다.
.
.
.
바람이 불었다.
종탑에서 분 그것은 그라나토스에 있는 말로의 탑까지 이어졌다.
탑의 꼭대기, 바람이 맞닿은 곳.
창가에 놓인 검은 벨벳의 예언서가 풍압에 밀려 사르륵 넘어갔다.
『난쟁이가 ‘야매 정령사’로 살아가는 법』
그와 동시에 하얀 여백 위로 글씨가 절로 써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이안 뷔트시겐은 오색의 바람에 집어삼켜졌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등을 맡길 수 있는 올리브와 라이라프스가 함께 있었다.
그들과 같이 이른 곳, 그곳은 온통 무지갯빛이었다.
예언자라 불리는 이안조차 전혀 모르는 세계.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영역.
하지만 이안은 어떤 주춤거림도 없이 오색 찬연한 세계, 아니 정령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