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군신왕(軍神王)
序
인생을 바둑에 바친 나는 바둑이야말로 신선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바둑판 안에 우주가 있고 억겁의 길이 있었다.
통달한다면 능히 신선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바둑을 두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곳은 현세도 아니었고, 사후 세상도 아니었다.
풍경은 고대건만 내가 아는 고대가 아니었고, 현대의 영화 세트장도 아니었다.
물론 꿈도 절대 아니었다.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세상.
그랬다. 그곳은 선천경과 후천경을 이룬, 만고불멸의 선인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난 기쁨에 춤을 추었다.
드디어 내가 신선이 된 것인가!
하지만 곧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신선이 되는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수많은 고행의 길을 걸어야만 신선이 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수십 년을 수련하고서야 겨우 한 발자국 내디딘 나는 이를 악물고 홀로 바둑을 두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이 전화(戰火)의 불길에 휩싸였을 때,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 ❋ ❋
유월 육일, 대진국(大陳國), 낙룡강(洛龍岡).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휘이이이잉!
세찬 바람이 대지를 휩쓸었다.
수만의 군사가 그곳에 주둔해 있었고, 데부분은 부상병이었다.
부상을 당했든 멀쩡하든 모든 군사들은 중앙에 있는 황색 천막을 호위하고 있었다.
천막 안에는 관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거대한 침상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침상 위, 용포를 입은 육십 대 후반의 노인이 창백한 얼굴로 계속 기침을 뱉어냈다.
콜록, 콜록…….
옆에서 시중들던 자가 노인의 입에서 나온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침상 위에는 두 사람 외에 백의를 걸친 사십 대의 중년 남자도 있었다.
백의의 남자는 양손을 노인의 등에 받치고 있었는데, 노인에게 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푸!”
육십 대 노인이 다시 피를 토하는 것으로 백의의 남자는 손을 뗐다.
장시간에 걸친 치료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노인은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부황(父皇)!”
곤룡포를 입은 태자가 소리쳐 노인을 불렀다.
“폐하!”
관리들도 침통한 목소리로 그들의 주인을 불렀다.
용포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을 치료했던 백의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후우……. 삼조부, 이제 괜찮습니다. 저도 제 상태를 잘 압니다. 더는 소용없다는걸.”
“심맥이 다 끊겼어. 진태극, 이번엔 왜 이렇게 공력을 낭비했느냐? 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
황제에게 ‘삼조부’라 불린 백의의 남자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황제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황제 역시 기침을 뱉으면서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송국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고선무, 참으로 대단한 자입니다. 그가 남강을 지키던 시절에만 해도 저는 그의 대단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헉헉.”
황제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우리 군이 매번 승리하여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송왕이 군권을 고선무에게 넘겨줄 줄은……. 대군을 손에 넣은 그는 신들린 듯 강해졌고, 저는 이렇게 좋은 형세를 가지고 있음에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헉헉…….”
삼조부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번 진국(陳國)과 송국(宋國) 간의 전쟁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상황이라고 내가 말했잖느냐? 송국 뒤에 있는 종문도 우리와 똑같아. 반드시 승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 승자가 영석광(靈石鑛)을 얻을 수 있으니까.”
영석광은 영험한 힘을 가진 영석을 얻을 수 있는 광산이다.
“손자가 삼조부께 청이 있사옵니다.”
“청?”
“제 손으로 고선무를 죽이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진국은 멸망합니다!”
황제의 간청에 삼조부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내가 말했잖느냐? 원래는 영석광을 위해서 싸웠으나, 지금은 선종(仙宗) 당주(堂主)라는 거물의 관심거리가 되었다고. 그 당주가 세속 간의 전투를 보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강요한 이가 바로 종주야. 너의 나라를 위해서 선종 당주의 미움을 살 순 없다.”
“도, 도와줄 수 없다고요? ……컥!”
황제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래도 삼조부는 단호했다.
“송국 뒤에 있는 종문에도 손댈 수 없어. 너희가 당한 걸 송국이나 배후에 있는 종문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모든 게 고선무의 전략에 휘말린 탓일 뿐이니까.”
“커억!!”
황제는 계속해서 피를 토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 병사가 천막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보고드리옵니다!”
무릎을 꿇은 병사는 창백한 얼굴의 황제를 보곤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말하라!”
황제는 짐짓 엄하게 다그쳤다.
병사는 화들짝 놀라 보고를 올렸다.
“폐하께 아룁니다! 동관(潼關)이…… 함락되었사옵니다!”
“뭐? 커억!”
황제는 조금 전보다 더 많은 피를 토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의 병사가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폐하!”
“……말하라.”
“성산관(成山關)이…… 함락되었사옵니다!”
이어 들어온 세 번째 병사도 같은 상황 보고를 올렸다.
“폐하! 가옥관(佳玉關)이 뚫렸사옵니다!”
천막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병사의 다급한 숨소리와 황제의 격한 기침 소리만이 천막 안에서 울렸다.
황제는 자신의 절망을 몸으로 보여주듯 쉴 새 없이 피를 토했다.
황제의 모습을 보며, 천막 안에 있는 문무백관들은 눈에 띄게 당황해 했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인데, 저희들끼리 대놓고 웅성거렸다.
곤룡포를 입은 태자 역시 질겁한 안색이었다.
“부황! 동관과 성산관, 가옥관, 이 세 개 관문이 뚫리면 송국에 남은 것은 일마평천뿐입니다. 지, 진국 칠 할의 영토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태자의 말에 삼조부는 옅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졌구나, 졌어. 고선무…… 너무 강하다. 진국이 무력해졌어…….”
그때 황제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기적적인 회생?
아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삼조부도 황제도 알고 있었다.
“고선무는…… 신출귀몰하게 병사들을 운용했지…….”
황제가 입을 열자 기대를 한껏 품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성동격서로 삼 관을 돌파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더니, 결국…… 정말 대단해.”
삼조부는 황제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자포자기한 황제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진태극, 태자에게 황위를 계승해라. 진국에는 아직 호뢰관(虎牢關)이 남았으니,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버텨봐야 하지 않겠느냐?”
삼조부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으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삼조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불만스럽다는 듯 황제를 쏘아보며 비아냥거렸다.
“하긴 지킨다고 지켜지겠느냐. 그게 뭔 소용이 있겠느냐. 패배는 기정사실이거늘. ……태자만 아쉽게 되었어. 그저 종주의 화풀이 대상이 안 되기를 바라야겠지.”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황제였다.
“예? 종주의 화풀이라고요?”
황제는 억지로 기침을 참으면서 삼조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삼조부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나도 연루될지도 모르지. 이번 전투는 당주가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국이 패하게 되면, 당주는 실망하겠지. 종주는 당주의 뜻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말이야……. 종주가 격노하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신세라니. 허헛.”
황제의 몸이 순간 바르르 떨렸다.
눈꼬리도 가늘게 변했다.
황제는 뭔가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이런 눈빛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이를 갈 듯이 말했다.
“아직, 패한 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호뢰관이 있습니다. 아직 호뢰관이 남아 있습니다!!”
삼조부가 곧바로 반박했다.
“호뢰관의 병력이 제일 적다. 그리고 모두 친위군이지. 그들은 삼관의 병사들과는 달리 피를 본 적이 없는 순한 양들이야. 병력도 적고 말이지. 그런 자들로 어떻게 호랑이 같은 송국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이냐? 황제도 역부족인데 어떻게 태자가……. 더욱이 나라의 칠 할을 잃어 민심도 떠났다. 대체 무엇으로 적을 막는단 말이냐? 상대는 군신 고선무. 하늘이 도와도 그를 막기 힘들 것이야.”
황제는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 아직 진 건 아닙니다!”
“고작 부상병들을 데리고 뭘 할 수 있겠느냐? 더는 적을 막을 수 없다. 태극, 차라리 종주께 어떻게 사죄할지나 생각해라.”
백의의 남자는 야멸차게 황제를 몰아붙였다.
그때 곤룡포를 입은 태자가 끼어들었다.
“부황! 다른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이옵니까?”
황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방법을 궁리하기라도 하듯.
잠시 후 황제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아니…… 있다. 한 사람…….”
“그게 무슨……?”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가능하고말고!”
태자와 삼조부, 신하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 그에게 가서 부탁하거라. 그가 승낙하면, 우린 이길 수 있다. 반드시 그를…… 쿨럭! 쿨럭!!”
황제는 다시 요란하게 기침했다.
삼조부는 그런 황제를 가만히 쏘아붙였다.
“태극,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다! 진국을 잃게 생겼는데 지금…… 누가 있어 이를 막을 수 있단 말이냐? 지금 송국은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종문의 도움이 없다면 이 국면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느냐!!”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라면…… 가능합니다. 그는…… 무조건 가능합니다!”
황제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삼조부의 말을 반박했다.
의아함이 더욱 짙어진 눈빛의 태자가 황제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부황, 대체 그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태자의 추궁 아닌 추궁에 순간 황제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태자의 추궁에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의 표정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싫은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
“…….”
황제는 제법 오래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결국 무겁게 이름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고……해(古海)!”
고해? 고해……라면?
태자가 깜짝 놀랐다.
곧바로 되물었다.
“육국수부(六國首富), 고로 선생 말입니까?”
“육국수부…… 쿨럭. ……고해. 죽기 전에 그에게 부탁이란 걸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황제가 쓰게 웃었다.
삼조부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서른 살 이후에야 수련을 시작하고, 허황된 망상으로 나와 종문을 만나려고 안달했던, 그 이상한 늙은이가 진국을 구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는 듯 삼조부가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의외라는 얼굴로 삼조부를 바라보았다.
“그를…… 아십니까?”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물론 종문과 금단경 사람들 모두 다. 그 노인은 종문에 들어오고 싶어 했어. 우리를 찾아와 온갖 뇌물을 건네주면서 말이야. 허나 그렇게 되지 않았지. 그 늙은이의 나이도 문제였지만 몸도 너무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받아들이는 것 자체로 다른 종문의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으니까.”
“고해. 하, 그와 종문이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허나 오랫동안 제 생각대로 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허허허, 잠룡이 끝내 못에서 나오고야 마는가? 커, 컥!!”
황제는 또다시 울컥 피를 토해냈다.
삼조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황제의 기침 소리가 멎자 삼조부가 물었다.
“태극, 고해에게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련을 꽤 열심히 한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평범한 자일 뿐인데.”
태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급히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그렇습니다, 부황! 일개 상인이 병사를 거느리고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