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고해(古海)
황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태자 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젠 황제의 눈시울마저 붉어진 상태였다.
“그는 무조건 가능하다! 고선무가 군신이라면, 고해는 군신왕이니까! 태자, 문무백관을 이끌고 가서 그에게 부탁하거라. 무릎이라도 꿇고 정중하게 부탁해야 한다!”
“일개 상인이…… 군신왕(軍神王)이라고요?”
태자가 못마땅해했지만 황제는 다시 삼조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십시오. 일개 상인이라고, 평범한 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허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자는 고선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데려와야 합니다. 태자의 목숨…… 나라의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삼조부는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태극의 표정으로 봐서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 지금은 국면을 되돌리기 힘든 상황인데도, 황제는 고해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어. 대체 왜……?’
삼조부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럴수록 그의 분위기는 더욱 침중하게 변했다.
‘전쟁……. 모든 것을 던지고, 모든 것을 잃거나 얻는 싸움. 이미 폐한 전쟁에서 이긴다라…….’
이번 전쟁은 국경에서 병사들끼리 벌이는 소규모 싸움이 아니었다.
전 병력이 목숨을 걸고 부딪혔다.
수많은 목숨이 유명을 달리했고, 가족을 잃고, 부상을 입었다.
지금 이 순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어떤 사소한 것도 등한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그것은 희망의 불씨이자 반격의 횃불이니까.
“……그렇게 하지. 종주께 너무 지나친 요구만 않는다면 전부 들어주도록 하겠네.”
마침내 삼조부는 결단을 내렸다.
황제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 다시 씁쓸해진 얼굴로 태자를 응시했다.
“고해가 산에서 나오면, 넌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느니라. 잊지 마라. 반드시 시키는 대로 해야 함을. 그리고 그를…… 고 백부라 부르거라. 그는…… 나의 의형제와 다름없으니까.”
“의형제…… 고 백부요?”
“마지막으로, 나 대신 그에게 한마디만 전해다오.”
“무엇을 말입니까?”
“미안하다고. 그땐…… 내가…… 정말 미안한 짓을…… 했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붉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되는가 싶더니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모두가 직감했다.
“부황!!”
“폐하!!”
“황제 폐하!!”
누군가 외쳤다.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천막 안팎의 사람들이 전부 무릎을 꿇었다.
수만 군신 중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 *
대진국(大陳國)의 호뢰관 내 고풍마을에는 ‘고부(古府)’라는 저택이 있다.
유월 십사일, 고부 내부는 물론이고 길거리에서도 술자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병사들도 계속 오가는 등 정말 시끌벅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부 안으로 들어오고 이내 소란이 그쳤다.
많은 병사가 사방을 경계하니 분위기마저 스산해졌다.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오늘이 고로 선생의 칠순 생신 아닌가? 그런데 사방에 왜 이렇게 병사가 많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나?”
“보아하니 관부에 있는 사람들일세.”
“관부? 고로 선생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잖은가?”
“그렇지. 한데도 관부의 사람들과도 고로 선생은 그리 나쁜 사이는 아니니까.”
“근데, 조금 전 그 사람…… 태자였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봤나?”
“잘못 본 게 아닐세. 태자가 맞네.”
상복을 입은 태자, 그리고 그 뒤로 문무백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허! 어찌 이런 일이…….”
“그런데 태자가 왜 상복을 입고 있지? 설마……!”
태자가 상복을 입을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황제가 승하했다는 것.
“……허어. 어찌 이런 일이!”
“한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친정(親征)에 나섰던 황제는 싸울 때마다 이기고 있다 들었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전해지는 소식은 너무나 느리고 느렸던 것이다.
고부(古府).
앞마당과 길거리에서는 연회 준비에 한창이었지만 뒷마당은 고요했다.
뒷마당의 칠층탑은 고부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탑 위에 서 있으면 고부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탑의 이름은 충천탑.
고부 사람들은 충천탑 밑에 숙연하게 서서, 상복을 입은 진 태자와 문무백관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백의의 옷을 입은 사십 대의 중년인은 무릎을 꿇지 않고 있었다.
“조카 진양의가 고 백부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 부디 바라건대 부황을 위해 복수해 주십시오!”
태자 진양의는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나라가 곧 멸망할 텐데, 태자 자리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겠는가.
진나라가 멸망하면 종왕의 화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죽기보다 못한 상태가 되리라.
하지만…… 희망은 있다.
부황은 말씀하셨다.
고해는 능력이 있다고.
또한 고해는 부황의 의형제라고도 했다.
태자 진양의는 진국만 구할 수 있다면 무릎쯤이야 얼마든지 꿇을 수 있었다.
고부 안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자와 문무백관이 고로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니!
삼조부가 말했다.
“고해, 나는 청하종의 진천산이네. 진 태자가 문무백관들과 무릎을 꿇고 있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고부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백의를 입은 사십 대의 평범한 중년인.
그는 꽤 신분이 높은 듯했다.
허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부탁하러 온 처지에 고로 선생에게 하대를 하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하인 하나가 충천탑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청삼의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대공자, 저러다가 혹…….”
하인이 대공자라고 부른 청삼의 중년인 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인의 말을 찍어 눌렀다.
하인은 흠칫하며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 고부는 누구의 도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태자 진양의가 다시 읍소했다.
“고 백부, 부황이 세상을 뜨기 전, 고 백부를 찾아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아-!”
충천탑 안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 선사께서 왕림하셨는데 이 늙은이가 태만했소이다. 고진, 두 분을 안으로 모셔라.”
입구를 지키고 있던 대공자 고진이 숙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의부.”
쿵!
큰 소리와 함께 탑문이 열렸다.
고진이 진천산에게 말했다.
“가친께서 오랫동안 손님을 접대하지 않아서 오늘 실례를 범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진천산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고진은 태자 진양의를 향해서도 말했다.
“진 태자, 안으로 드시지요.”
진양의는 감격한 듯 금방 탑 안으로 기어 올라갔다
쿵!
잠시 후 굉음과 함께 탑문이 다시 닫혔다.
밖에 있던 문무백관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탑을 바라보았다.
탑은 칠 층으로 되어 있었다.
매 층마다 다양한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곧 육층에 도착했다.
그곳에 고해가 있었다.
마침내 고해를 만난 것이다.
고해는 충천탑의 창문가에 앉아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대한 바둑판이었다.
보통 바둑판은 열아홉 줄인데, 그 바둑판 위에는 가로세로 스물아홉 줄씩 그어져 있었다.
바둑돌이 너무 많아 진행 상황은 짐작조차 힘들었다.
바둑판 옆에는 흑의를 입은 칠십 대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노인은 주름이 많았지만,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서, 마치 사람의 마음까지 비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양의는 그 눈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사람이 육국수부 고해란 말이지?’
그때 진천산이 눈을 부릅떴다.
“네가 고해? 아니, 너는 고해가 아니다! 너의 눈썹이……?”
그러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진 선사, 그때 폭포 아래에서의 간청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저는 고해가 맞습니다.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눈썹을 그렸을 뿐이지요.”
진천산은 흑의의 노인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고해가 분명했다.
이리도 모습이 달라져 있을 줄이야?
만약 그가 스스로 밝히지 않았더라면 고해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진양의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고 백부, 부황께서 돌아가시면서 백부님을 의형제라고 하셨습니다. 백부, 의형제 정을 봐서 저의 복수를 부탁드립니다.”
고해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진양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했다.
“그 당시에는 의형제였지. 하지만 그는 나를 죽음의 땅으로 내몰았다네. 그때는 형제의 정도 쓸모가 없었지.”
“네?”
진양의의 얼굴이 굳어지고, 진천산도 눈썹을 찡그렸다.
고해가 진천산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삼 관을 잃은 데다 고선무에 의해 육십만 대군을 잃었고, 송국은 진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판입니다. 남은 건 십만 병력밖에 없는데, 어떻게 송국의 팔십만 대군을 상대한다는 말인지요?”
“예? 고선무가 육십만 대군을 죽였다고요?”
진양의가 경악했다.
고해가 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바로 사 일 전 정오 무렵에 벌어진 일이지요.”
진양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는지 다시 고해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는 대공자 고진도 있었는데, 공손히 차를 따르고만 있었다.
고해는 진천산에게 앉으라 손짓을 하고는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진천산은 고해를 보면서 왠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개 자신처럼 선종에서 온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기에 눌려서 굽실거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고해는 무덤덤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진천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태극이 그러는데, 자네는 전황을 바꿀 수 있다고 하더군.”
고해는 차 한 잔을 마시고 난 뒤에야 대답했다.
“십오 일 후면 고선무의 대군이 호뢰관에 올 것인데, 나약한 병사들을 이끌고 어찌 팔십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겠는지요? 이쪽 병사들 중에는 항복하려는 병사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고선무가 오기도 전에 자멸하고 말 겁니다.”
진천산과 진양의는 화들짝 놀랐다.
이는 고해가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충분히 타당성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진양의가 간절하게 말했다.
“고 백부, 우리 진국을 구해주세요. 진국만 구해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진천산은 한 발짝 더 나아가 고해에게 방법을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선종이 그렇게 진국을 아끼면 왜 직접 안 오고 여러분이 나를 찾아온 것입니까? 선종에 진국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주변 나라의 원조를 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진천산은 낯을 찌푸린 채 침묵했다.
그러다 나지막하게 실토했다.
“이번 전쟁에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고 정했네, 종문에 있는 사람들도 손을 쓰면 안 되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도 안 되고, 종문도 손을 쓰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고해의 눈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거렸다.
비록 몇 마디만 들었어도 고해는 이미 많은 것을 알아낸 것 같았다.
어쩌면 해답마저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진천산은 생각했다.
고해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는 듯 차를 마셨다.
그런 고해를 보며 진천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더 이상 진국을 구할 마땅한 방법이 없네. 혹시나 해서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 걸세.”
고해는 침묵하며 진천산과 진양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해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진국을 구하는 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 진천산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진국을 구할 수 있다고? 어떻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