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회천지쟁(回天之爭) 1
진천산은 아무런 대꾸없이 고해만 바라보았다.
진양의도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반쯤 몸을 일으켰다.
“고 백부, 어떤 조건입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다 드리겠습니다!”
고해는 진양의는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진천산만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청하종(淸河宗) 종주가 저에게 관정(灌頂)을 해주고, 제가 후천경(後天經)의 마지막 벽을 넘을 수 전력을 다해 지원해 줬으면 합니다. 또한 청하종으로부터 선천경(先天經)을 배우고 싶습니다.”
“뭐? 자네가 후천경을 넘을 수 있다고?”
진천산의 놀란 물음에 고해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진천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불가능해! 그때도 내공이 부족했네. 자넨 서른이 넘어서 수련을 시작했어. 이렇게 약한 근골로는 외공만 익힐 수 있을 뿐이라구!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동안 후천경 오단계도 넘어서기 힘들 게야. 한데, 후천경 십 단계를 넘어섰다고? 말도 안 되네!”
“다른 사람이 못 한다고 저도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후천경의 수명은 백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선천경에 도달하면 이백 년으로 늘지요. 저도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만약 후천경을 돌파하지 못하면 외공이 무너질 것입니다.”
“허어…….”
“제가 후천경을 꽉 채웠으니 선사의 금단경도 저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종주님만 가능합니다. 종주님께 가서 전하세요. 그가 도와주면 제가 진나라를 구해드린다고 말이지요.”
고해를 향한 진천산의 눈에 경악과 의아함이 가득 찼다.
외공으로도 후천경을 수련할 수 있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외공만으로 수련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진천만은 모르지 않았다.
그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다.
잠력을 전부 끌어올려도 불가능한데, 고해가 후천경을 얻었다고?
“제 요구는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고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진천산은 대답 없이 한참 고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무겁게 말했다.
“먼저 진국을 구해주게. 그러면 종주님께 말하겠네.”
고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종주께서 여기 없는데, 내가 어떻게 동의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진국을 구해주게. 그럼 내가 꼭 종주께 말씀드리겠네.”
하지만 고해는 단호했다.
“고선무의 대군이 호뢰관에 도달하려면 아직 십오 일 남았습니다. 갔다 오는 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종주께서 승낙하면 바로 나서지요. 그때 진국을 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주님의 승낙을 먼저 받아야겠습니다.”
진천산이 마뜩잖은 얼굴로 답했다.
“십오 일이면 많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네. 그동안 호뢰관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때 가서 어떻게 진나라를 구한다는 것인가? 게다가 송국의 병력은 팔십만일세. 십만 병력으로 어떻게 막는다고 장담하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막느냐는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선사께서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면 진국도 하루 일찍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종주의 승낙이 없으면 고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진천산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말했다.
“고해, 자네 입으로 직접 한 말이네. 만약 진국을 구하지 못하면, 자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네!”
분명 협박이었지만 고해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고해는 진양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태극이 죽은 이상, 지난날의 원망은 접어두지. 내가 진국에서 살고 있으니 매년 나라에 내는 세금도 적지 않아. 그러니 내가 그 어느 나라로 가든 모두 환대할 걸세. 하지만 내가 진국을 떠나지 않은 건 단순히 어떤 우려 때문이지. 암튼 자네와 나는 원한이 없으니, 서로 빚을 진 것도 없지. 내가 진국을 구해줄 테니, 진 선사의 소식을 기다려 보세.”
진양의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고 백부.”
“오늘은 일단 돌아가게. 손님이 많아서 여기까지만 얘기해야겠네.”
“예.”
진양의의 대답에 진천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천산은 고해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지금 바로 가서 종주께 전하도록 하지. 약속을 지키게. 아니면…… 흥!”
진천산은 진양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고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의부, 진국을 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요? 설마……!”
고해는 바둑판을 보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나도 답이 없다는 거 알고 있다. 방금 듣기로 종주들은 참견하지 못하고, 오직 세속들 간의 싸움이라고 했다.”
고진도 함께 들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야. 후천경과 선천경. 그 일경의 차이가 천지개벽을 이룰 만큼 크니라. 선천경을 밟기만 하면 나는 젊어질 수 있고, 힘도 가질 수 있다.”
고해의 젊어진다는 말에 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해는 개의치 않고 눈을 빛내며 결연하게 말했다.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어. 나는 반드시 젊어져야 해. 그래서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이번 일을 해결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고진이 걱정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책을 생각해 봐야겠다. 너는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오늘 의부님의 생신인데, 생신상을…….”
고해가 손을 저었다.
“괜찮다. 방금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았어. 가서 쉬거라.”
“예.”
고진이 머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고해는 창가에서 병사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에 흑돌을 든 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서른 번째 생일날, 나는 십만 편의 잔국도를 수집하여 서재 깊숙한 곳에서 이 흑돌을 놓았지.’
고해의 시선이 손에 든 흑돌로 향했다.
‘그날, 네가 나를 이 세상으로 데려오고 어느덧 사십 년이 지났다. 너는 도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 이 십만 편의 잔국도 때문에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냐?’
그의 깊어진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너는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구나.’
고해는 흑돌을 이마 옆으로 가져갔다.
윙!
흑돌이 피부로 스며들더니, 눈썹 안으로 사라졌다.
고해의 눈썹 안에는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 속에는 십만 개의 바둑판이 있었다.
맨 위에 마지막으로 둔 판이 있었고, 흑돌은 그 십만 개의 바둑판 위에서 돌고 있었다.
고해의 눈빛은 마치 제왕이 그 십만 번째의 마지막 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 * *
화려한 청하종의 대전.
넓은 대전 안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세 파벌로 나누어진 형태였다.
왼쪽에 있는 한 무리의 청삼인들이 눈썹을 찡그리며 중앙에 있는 거대한 지도를 보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 남자의 눈에는 노화가 깃들어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한 무리의 백의인들은 청삼인들과 달리 매우 즐거워 보였다.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청하종주, 보아하니 당신들이 패한 것 같군요. 진국의 삼 관이 모두 한 방에 무너졌소이다! 하하하하!”
백의인들은 저마다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다.
청의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격노했다.
청하종주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송갑종주!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국이 패했다고 확신합니까?”
백의의 송갑종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왜요?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잖습니까? 저 큰 병력 차이가 안 보입니까? 송국은 지금 일심단결하여 기세등등하고, 또 고선무가 진국의 육십만 대군을 초살했습니다. 이제 호뢰관에는 십만 약졸만 남았다지요? 이런 군세로 무얼 하겠단 말입니까? 반항하지 말고 항복하세요.”
“당신!”
청하종주가 눈을 부릅떴다
바보 천치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진국이 곧 멸망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청하종주가 분개하는 이유는 나라 하나를 잃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는 당주 때문이었다.
당주도 이번 전투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패하면 당주에게 안 좋은 기억만 남겨주게 줄 것이다.
그러니 청하종주가 어찌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종주의 입씨름을 또 다른 다섯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비록 청하종주의 땅이지만, 그 다섯 명도 주인석에 자리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흑의 여인이었다.
언뜻 봐선 소녀처럼 보일 정도로 젊은 그녀가 이 무리의 수장으로 보였는데, 남장을 하고 있었다.
균형 잡힌 몸매며 목선은 물론이고, 여인은 어느 곳 하나 다른 여인에게 뒤지지 않고 아름다웠다.
남자처럼 상투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 옆으로 내려온 한 가닥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음에도 절세의 자태를 숨기지는 못했다.
청하종과 송갑종의 제자들은 여인을 보면서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여인은 섭선(摺扇)을 들고 앞에 있는 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에는 송국과 진국의 전투 상황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인 뒤에는 또 다른 네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세 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호위병 같았다.
나머지 한 명은 기품 있는 백의의 승려였다.
그는 손에 열여덟 개의 염주를 두른 채 지도를 보고 있었다.
“유년대사, 이번 전투를 어떻게 봐?”
여인은 접었던 섭선을 다시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주가 세속 간의 투쟁을 보고 싶어 해서 이런 잔인한 사건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육십만 대군이 전부 죽었습니다. 무량수불!”
승려는 불호를 외며 희생된 병사들을 위해 탄식했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듣기로는 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던데? 그리고 이번 전쟁은 내가 일으켰다고 할 수 없어. 저들끼리 서로 죽이고 있을 뿐이지. 원인을 제공한 건 나지만, 그 결과까지 내 책임은 아니야,”
유년대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여인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예전에 할아버지께서는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들의 싸움을 보라고 하셨지. 저들의 힘은 부족하지만, 가끔은 수많은 지혜를 엿볼 수 있어. 이번 전쟁도 정말 흥미진진해. 대사는 어때?”
유년대사는 지도를 보면서 대답했다.
“진태극도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큰 전쟁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다니. 우리한테 와도 훌륭한 장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가 안정적으로 전쟁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송국에서 고선무를 내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인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맞아. 고선무는 확실히 강해.”
“고선무는 송국의 군신이라고 불리지요. 군세를 움직이는 기술은 진태극보다 뛰어나고, 때로는 정당하게, 때로는 괴이하게 병법을 써서 승리를 거두었어요, 병략에 뛰어나 몇 차례 위험이 있었음에도 놀라운 결과를 거두었지요. 심리 전술로 진태극을 없애고 삼 관을 연속 무너뜨린 건 대단합니다.”
“고선무는 재미있는 인물이네. 능력은 어때 보여?”
유년대사가 오히려 반문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비록 기술은 별거 없지만, 병사를 지휘하는 능력은 고수 같아. 정교해. 장수의 위엄이 느껴져.”
여인의 말에 유년대사도 동의했다.
“저의 생각도 당주와 같습니다.”
여인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송갑종주를 향해 말했다.
“이번에는 수확이 좀 있겠네, 인재 한 명을 만나다니.”
여인의 칭찬에 송갑종주는 펄쩍 뛰었다.
“당주, 고선무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후천경에 불과하지요.”
여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선택하려는 사람은 당신들의 사람이 아니니까.”
여인의 말에 송갑종주는 그제야 웃으면서 말했다.
“당주의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여인이 눈여겨 보는 것은 인재이지, 능력이 아니었다. 능력은 시간을 두고 수련하면 얻을 수 있지만, 천부적 지혜는 단순히 수련을 한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인은 묘한 얼굴로 지도를 보면서 물었다.
“대사, 진국이 반격할 수 있을까?”
유년대사는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종문이 없는 한, 저들도 힘이 없습니다. 이미 삼 관을 잃었고 송국의 수십만 대군이 합심하여 호뢰관까지 빼앗을 것입니다. 비록 호뢰관을 지키는 십만 병력이 있더라도, 그들은 피를 본 적도 없는 병사들이기에 항복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호, 그래?”
“듣기로 진태극은 심맥이 찔리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남은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십오일 일만 지나면 고선무의 대군이 들이닥칠 것이고, 진국의 시대도 끝날 것입니다.”
유년대사의 말에 송갑종주는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청하종주의 얼굴은 몹시도 어두워졌다.
여인도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진국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그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종주님!”
음성의 주인은 고부에서 급히 달려온 진천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