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회천지쟁(回天之爭) 2
“천산?”
청하종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국을 도와주라고 보냈는데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청하종주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천산은 대전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흠칫 얼어붙었다.
송갑종의 사람들, 그리고 당주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진천산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청하종, 진천산 인사 올립니다.”
여인은 머리만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녀를 대신해 청하종주가 심각하게 물었다.
“천산, 이 시기에 여긴 왜 왔느냐? 그건 그렇고 진태극이 다쳤다고? 심각한 것인가?”
진천산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제 조카는 이미 보름 전에 심맥을 다쳐서 숨이 끊어졌습니다.”
청하종주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뭣이?!”
송갑종주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진태극까지 죽었다면 진국은 끝났구나. 청하종주, 그냥 패배를 인정하시지요!”
청하종주의 안색은 극히 어두워졌다.
흑의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진태극이 다시 일어서길 바랐는데, 죽었다고? 그럼 이번 전쟁도 여기서 끝나겠군.’
그런 여인에게 청하종주가 말했다.
“당주,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조차 사라졌다.
당연히 청하종주의 음성은 다 죽어가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여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진천산이 말했다.
“종주, 아직 패배를 자인하기에는 이릅니다.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 아닙니다.”
송갑종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진천산,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이 지경까지 왔는데 이길 기회가 있다고?”
청하종주도 호통을 쳤다.
“천산, 입 다물어라!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러나 진천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일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흑의 여인이 ‘음.’ 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번 전쟁에서 진국이 멸망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진천산이 갑자기 뛰어 들어와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장담을 하다니.
흑의 여인은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하종주가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고 매섭게 말했다.
“좋아. 진천산, 말해봐라.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진천산이 굴하지 않고 말했다
“진태극이 죽기 전에 한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이 사람의 능력은 실로 탁월하여, 송국의 고선무와 견줄 만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여인의 흥미를 끌었다.
“고선무와 견줄 만하다?”
그에 반해 청하종주는 불신에 찬 태도를 보였다.
“뭐가 견줄 만하다는 것인가? 송국은 패배할 것 같은 기운이 맴돌자 고선무를 전장에 보냈다.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고선무 외에 또 있다고? 이제 진국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이긴단 말이냐?”
그때 여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말해봐, 그게 누구야?”
일단 여인이 말하자 청하종주도 입을 다물었다.
진천산도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고해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그를 아는 분이 계실 겁니다.”
여기저기서 맥 빠지는 반응이 나왔다.
“고해? 그 구린내 나는 놈?”
“근골도 약하고 망상에 차서 우리 종가에 들어오고 싶다던 놈?”
“서른 살에 수련을 시작한 놈이 꿈도 야무진 놈이었지.”
진천산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청하종의 형제뿐만 아니라 송갑종 사람들조차 고해를 알고 있는 것이다.
여인도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자가 진국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고?”
여인의 말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진천산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진국을 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도와주는 대신, 후천경에서 선천경으로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하종주께 선천경 공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여인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어디 자세히 말해 봐.”
여인의 지시에 진천산이 말했다.
“고해는 사십 년 전에 나타나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에는 별 볼 일 없었지요, 서른 살에 수련을 시작하여 내공을 얻지 못했기에 외공을 배우면서 청하종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지요.”
진천산이 입술을 축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불과 사십 년 만에 그는 일신상의 사업을 크게 키워 지금 육국수부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후천경도 얻었습니다.”
유년대사가 놀라며 말했다.
“외공을 배우면서 후천경을 얻었다고? 의지력이 대단하군.”
여인이 유년대사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리도 대단한가?”
유년대사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극히 드물지요. 저는 지금까지 두 사람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두 번? 그럼 첫 번째는 누구지?”
“당주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유년대사의 말에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때, 진천산이 눈치를 보며 청하종주에게 말했다.
“종주, 고해는 종주가 동의만 해준다면 진국을 도와준다고 장담했습니다. 종주의 승낙이 필요합니다.”
송갑종주가 나서서 버럭 소리 질렀다.
“어림없는 소리! 후천경 늙은이가 힘을 키워 선천경을 얻겠다고? 꿈 깨라고 해!”
청하종주는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내 청하종주의 눈빛도 깊은 연못처럼 심유해졌다.
어차피 한번 창피를 당한 마당이다. 두 번 당한들 무슨 큰 일이 나겠는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 여기서 그냥 포기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리라.
‘그래, 이판사판이다.’
결심을 굳힌 청하종주가 진천산에게 말했다.
“좋아. 허락한다고 전해라!”
진천산이 반색을 지으며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종주!”
여인이 섭선을 부치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유년대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당주,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한번 지켜보고 싶어. 고해란 자가 대체 어떤 능력으로 진국을 구할 수 있을지.”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말을 뒤집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미 승패가 난 줄 알았는데,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네. 안 그래?”
“예…….”
유년대사는 쓴 입맛을 다시며 대답할 뿐이었다.
* * *
송국의 수도인 송성(宋城).
그곳 외곽에 전씨 관사가 위치해 있었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관사의 주회청은 등불이 환했다.
주회청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고해였다.
고해의 안색은 피곤해 보였다.
마치 서둘러서 먼 길을 달려온 것만 같았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흰머리가 까맣게 변했다는 사실이다.
설마 반로환동(反老還童)한 것일까?
다른 한 명은 황의를 입은 남자였다.
대략 서른 살 정도에 눈썹이 짙고 눈에 정광이 서린 모습이었다.
황의인이 뜨거운 수건을 건네며 웃었다.
“의부님, 정말 빨리 오셨군요.”
고해는 수건을 받아 얼굴과 손을 닦고 황의인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늙었어. 몇 년만 지나면 뜀박질도 못할 거야. 어쨌거나, 이번에는 실수가 없어야 한다.”
황의인, 고한은 공손히 차를 올리며 물었다.
“청하종주가 승낙하셨습니까?”
“물론. 승낙을 받았으니 여기 왔지.”
고한이 들뜬 듯 약간 흥분해서 말했다.
“정말 잘됐습니다. 의부님께서 선천경을 이루면, 우리 고씨 집안은 백 년 더 번성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지요. 의부님께서 이번 기회를 잘 살리기만 하면 누구도 의부님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고해가 웃었다.
“너희 형제는 모두 내가 보고 골랐지. 너희의 근골이 모두 훌륭하니 내 도움 없이도 선문에 들어갈 수 있을 거다.”
“아닙니다. 저와 형님은 의부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흠, 어쨌든 고진은 내 이름으로 진국 호뢰관을 지키고 있고, 고선무의 군대는 언제나 출격할 수 있는 상황이지. 시간이 촉박하니 먼저 송국의 일을 말해다오. 내가 십 년 동안 송국에 오지 않아 모르는 부분이 많다. 이번 양국의 전쟁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있느냐?”
고한은 숙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이번에 고선무는 송왕의 명으로 진국 정벌을 위한 병력을 조달했는데, 모두 자기의 명령만 듣도록 만들었습니다. 송왕은 염려가 되었는지 태자를 시켜 고선무를 따라다니게 했지요. 고선무를 감시하도록 한 겁니다. 다만, 태자에게는 군권이 없습니다.”
송왕도 멍청하지 않으니 고선무에게 모든 걸 맡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제가 송국에 온 지 팔 년이 되었습니다. 송국의 모든 상권를 관리하고 의부님 말씀에 따라 전한으로 개명하였는데, 지금은 모든 재력으로 태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태자가 여러 황자 가운데서 왕야가 될 수 있게 된 것도 우리의 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태자의 믿음을 얻었지요.”
“태자의 믿음을?”
고해의 눈빛이 반짝였다.
“예.”
“송국 군신들의 정보도 많이 모았겠지?”
“예,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내게 건네라. 어떻게 반역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고한은 의부인 고해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멀리 오셨는데 쉬지 않으실 겁니까?”
하지만 고해는 쉴 생각이 없었다.
“괜찮다. 그보다 시간이 촉박해. 그러니 어서 가져다 다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 * *
청하종의 종주대전.
청하종주와 송갑종주는 흑의 여인, 유년대사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여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대사가 한번 추론해 봐. 두 나라의 군대가 어떻게 움직일 것 같아?”
유년대사가 엄숙히 대답했다.
“고선무의 군대는 사기가 높습니다. 이럴 때는 호뢰관을 공격해야 합니다. 진국은 왕이 죽고 사기가 떨어졌으니 공격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리고 고해는 장사꾼일 뿐입니다. 전장에서 장수를 바꾼다는 것은 실수입니다. 반면 고선무는 총명한 사람입니다. 곧장 호뢰관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전쟁이 끝납니다.”
여인은 호기심이 일었다.
“대사는 고해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군.”
유년대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상황이 그렇습니다. 고선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지요. 그런데 어찌 고해라는 자가 반격하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때 대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보고드리옵니다!”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마침 소식이 왔네. 대사의 추론이 맞는 걸까?”
곧 백의를 입은 남자가 대전으로 들어와 예를 올렸다.
“종주를 뵙고, 당주를 뵙고, 청하종주님을 뵙습니다.”
송갑종주가 물었다.
“어떠냐? 고선무가 바로 호뢰관을 공격했는가?”
백의 남자가 고개 저으며 대답했다.
“호뢰관으로 바로 가지 않고 오히려 멈췄습니다. 그러더니 서서히 사방의 성을 수복하고 있습니다.”
유년대사가 어? 하며 흠칫거렸다.
송갑종주도 눈을 부릅떴다.
“뭣이? 어찌 된 영문인지 소상하게 알려라.”
백의 남자가 대답했다.
“처음엔 세 관문을 돌파한 후 군대를 새롭게 정비했습니다. 팔십만 군대 중 오십만을 남겨서 사방의 성을 수복하려 했고, 나머지 삼십만을 호뢰관에 보내려 했습니다만, 진국이 고해를 기용했다는 소식에 고선무는 즉시 행동을 멈췄습니다.”
청하종주의 눈이 반짝였다.
“고해 때문이라고?”
송갑종주가 돌연 눈을 부라렸다.
“헛소리! 고해는 단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영감인데, 명장 고선무가 영감을 무서워할 리 있나?”
백의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선무의 반응이 희한합니다. 그는 송왕에게 서신을 올려 즉시 전국의 상인을 감시하여 그들이 난리를 피우는 걸 방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곡물상, 약재상을 통제해야 하며, 그 이유는 고해가 물자의 보급을 중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송갑종주가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저런! 고선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장사꾼 주제에 어찌 전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곡물상? 약재상? 고해가 송국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건가? 터무니없는 소리!”
백의 남자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저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고선무가 대답하기를, 고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송갑종주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영락없이 꿀 먹은 벙어리였다.
반면 청하종주는 시원하게 웃었다.
여인과 유년대사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송갑종주가 기죽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