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고해전기(古海传奇)
백의 남자가 말했다.
“고선무의 부탁대로 모두 통제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송국은 수많은 군대를 보내 충분한 식량과 약재를 곧바로 전선에 공급할 수 있도록 상인들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공격을 하지 않는 건가?”
“고선무는 먼저 사방의 도성을 수복하는 것이 급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진국이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끊어진다고 말입니다. 그 때문에 호뢰관을 치는 계획이 잠시 미루어졌습니다.”
“그럼 대체 언제 호뢰관을 친다는 것이냐?”
“고선무는 진국의 사분지 삼이 송국의 손아귀에 들어오면 호뢰관에 있는 자들도 반드시 불안해할 거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호뢰관에 도착할 때쯤에는 공격하지 않아도 능히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유년대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심리전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리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송갑종주도 말했다.
“심리전? 언제까지 시간을 끌려고? 고선무는 군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도중에 튀어나온 영감 따위를 왜 무서워해?!”
백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자도 같은 말을 물었습니다.”
유년대사가 불쑥 물었다.
“그래? 고선무가 뭐라 하던가?”
“고해가 비록 장사꾼이긴 하지만, 용병술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했습니다.”
백의 남자의 대답에 청하종주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고해의 용병술은 천하제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선무의 평가였다.
군신이라는 고선무가 일개 장사꾼 영감을 그리 평가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정말 고해가 진국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여인도 신이 난 표정으로 물었다.
“용병술이 당세 제일이라고?”
백의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주님. 속인의 눈은 세속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 말이 진실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여인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해. 그 고선무가 왜 고해를 일러 용병술이 천하제일이라고 말했을까? 고선무는 병사들을 운용할 때 놀랍도록 망설임 없고 자신만만하지. 그런 자가 지금은 왜 그리도 조심스럽게 구는지 모르겠네.”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물어봤습니다. 고선무가 말하길, 고해는 군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고, 탁월한 전과까지 얻은 바 있다고 했습니다.”
여인이 찌푸리며 물었다.
“왜 전에는 보고하지 않았지? 너도나도 한입으로 고해는 단지 장사꾼이라고 그랬잖아?”
“우리도 전에는 정말 몰랐습니다. 고선무도 그의 아버지가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의의 남자는 오래전의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십 년 전, 당시 삼십 세의 고해는 유성처럼 홀연 등장해 진왕 진태극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지역에는 여덟 개의 나라가 있었고, 진국은 그중 가장 작고 약한 나라로 금방 멸망할 위기에 있었다.
고해는 극비리에 진태극의 군사가 되어 용병술을 도왔으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위기를 해결했다.
“심지어 고해의 지휘 아래 진국 군대가 파죽지세로 전진하니 이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백의 남자는 이야기를 끝내고 숨을 가다듬었다.
여인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의 경우 전쟁을 할수록 병력이 줄어들었지만, 고해가 지휘하는 군대는 싸우면 싸울수록 병력이 늘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해의 용병술로부터 유명한 전법들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고선무가 말하길, 고해는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승승장구해서 오 년 동안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멸망 직전이었던 진국이 당시 하나의 대국을 멸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봉목이 커졌다.
“그것이 사실인가?”
“예. 이후 진국은 천하를 정벌하려고 했고, 깜짝 놀란 여섯 개 나라가 힘을 합쳐 진국에 맞섰다고 합니다.”
유년대사가 놀라서 탄성을 발했다.
“아! 멸국의 어려운 처지를 역전시킨 것도 대단한데, 대국 하나를 멸하고, 천하를 정벌하려 했다니…….”
“고선무는, 고해가 연출한 당시의 전쟁은 마치 신화(神話)와 같아서 누구도 믿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여섯 개 나라의 이백만 병력이 진국을 이기지 못했고, 진국은 패퇴하는 적을 추적해 그중 나라 하나를 더 멸했다고 합니다.”
여인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또 한 나라를 멸해?”
왠지 신이 난 표정이었다.
“예. 고해의 군대는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 적군도 재편성한다고 합니다. 군대가 갈수록 커지는 것이지요. 그때 고해의 군대는 고수의 명검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 종문이 끼어들어서 막는 바람에 결국은 천하정벌을 포기하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남아 있던 다섯 나라는 여전히 두려워 수십 년 동안 진국을 상대로 병사를 일으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의 남자가 한바탕 설명을 끝내자, 청하종주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여러 종문에서 자기들 이익을 위해 날 찾아왔지. 내가 명령을 내려 진태극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쟁을 못 하게 했어. 그런데, 이제 보니…… 진태극이 아닌 고해가 모든 전쟁을 지휘한 거로군.”
여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고해의 용병술이 그리도 대단했단 말이지?”
“고선무의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간 후 고해가 사용했던 병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고선무는 어릴 때부터 고해의 병법을 배웠던 셈이지요. 고선무는 고해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호뢰관을 뚫으려 합니다.”
유년대사가 궁금해서 물었다.
“고해가 오 년 동안 백 번 전투를 치르면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여인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많은 전투를 벌였는데 오 년밖에 안 걸려?”
백의의 남자가 대답했다.
“고해는 몇 개의 전투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멸망의 위기에 있던 진국을 오 년 만에 여섯 나라 중 제일 강한 나라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나중에 진태극과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군정에서 물러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섯 나라 중 최고의 부자가 되었지요.”
모든 사람이 침묵했다. 귀로 듣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 * *
송국의 송성(宋城).
고해와 고한은 큰길에서 오가는 행인을 바라보았다.
고한이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의부님, 저 앞쪽 상가가 우리 가게입니다. 모두 우리 사람들이지요.”
고해는 사방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몇 년이 지났어도 여긴 변하지 않았군.”
고한이 궁금한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듣기로, 의부님은 전에 군사를 통솔하셨고 천하에 적수가 없었으며, 패잔병조차 단기간에 강군으로 만드는 능력을 지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형님이 호뢰관을 지키고 의부님은 여기로 오신 겁니까?”
고해는 고개를 저었다.
“고선무는 범상한 자가 아니다. 호뢰관에 있는 십만 군대로 그를 이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런데 내가 지금 제일 부족한 게 바로 시간이지.”
“의부님이 직접 호뢰관의 십만 군사를 이끌고 송군을 치려면 얼마만큼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일 년.”
“일 년이오? 그게 긴 시간일까요?”
“내가 군대를 이끌고 있다면 누구를 두려워하겠느냐? 그런데 이번에 청하종이 흔쾌하게 내 요구를 받아들인 걸 보니 어떤 높으신 분께서 이 전쟁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세속끼리 서로 싸우게 하면서 즐기는 거지.”
“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시간을 오래 끌면 그분이 지루해하면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럴 경우 청하종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 장담할 수가 없어.”
고한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청하종주가 약속을 보장하는 법지를 작성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고해는 코웃음을 쳤다.
“너는 내가 말해준 것을 다 잊었느냐?”
고한이 그제야 뭔가를 떠올렸다.
“아! 알겠습니다. 이런 약속은 상대의 실력과 지위가 대등한 경우에만 지켜지는 것이지요.”
약속.
그것은 당사자 쌍방이 서로 대등할 때에만 유효하다.
당사자의 실력과 지위 차이가 클 때 약속은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청하종주는 약속을 지킬 수도 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이제 그분의 힘을 빌린 셈이야. 그래서 그분이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약속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이지.”
고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칫하면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지금 송국은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 신하와 백성의 관계, 백성과 군대의 관계…… 이 모든 것이 무쇠처럼 튼튼합니다. 힘으로 역전하기 힘든 추세입니다. 정보를 살펴보셨을 텐데, 혹시 좋은 방법이 생각나셨습니까?”
고해가 소리를 낮추어서 대답했다.
“군주와 신하의 사이가 좋으면 이간질하면 되고, 신하와 백성의 사이가 좋을 경우에도 이간질하면 된다. 그리고 백성과 군대의 사이가 좋을 경우에도 이간질하면 되지.”
고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어떻게……?”
고해가 입술을 틀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계획은 이미 세워졌다. 이번 계획을 ‘송국 멸망 계획’이라고 부르자. 송국의 군주, 신하, 백성, 군대가 일심단결이라면 모두 흩어지게 하면 된다. 하나씩 뜯어서 풀면 돼. 군심, 민심, 신심을 하나하나 풀어낸 다음 혼란스럽게 하고 멸(滅)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면 송국은 저절로 붕괴할 것이야.”
고한이 약간 흥분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뭘 해야 합니까?”
“사실 오는 길에 생각이 거의 다 정리되었다. 요 며칠 네가 수집한 송국 귀족의 정보도 가장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보는 것뿐이야. 지금은 계기가 필요해. 이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너는 내일 모임을 열거라. 내가 뽑은 사람 전부를 초대해서 연회를 베풀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을 살펴보겠다.”
“예.”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그때 먼 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악!”
거친 음성들이 비명을 뒤이었다.
“저리 꺼져라! 길을 막지 마!”
“이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도 뒤섞였다.
행인들이 허둥지둥 양쪽으로 갈라지며 도망쳤다.
스무 마리의 말들이 대로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데, 말 위에는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남자가 말에 다리가 밝히고 말았다.
“아악!”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대로변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말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곧바로 달려왔다.
선두에서 말을 모는 자는 소년이었다.
얼굴에 악기가 가득하고 눈은 차가웠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고한이 소년을 보며 말했다.
“황태손 송정서입니다. 태자의 아들이지요. 의부님이 살펴보신 정보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오만방자하고 포악해서 송성 민초들을 못살게 굴고 있습니다.”
고해의 눈가에 번뜩 이채가 스쳐 갔다.
“황태손 송정서라고?”
“예.”
그 순간에도 송정서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이랴, 꺼지라!”
쾅!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남자가 말에 부딪혀 훌훌 날아갔다.
고한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날아오는 사람을 받았다.
“흥!”
송정서가 고개를 기울여서 보더니 코웃음 쳤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채찍질하여 말을 달리게 했다.
호위들도 그를 뒤따르며 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아이고!”
“살려주세요!”
송정서가 떠난 후 길 여기저기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잠깐 동안 여덟 명이 송정서 때문에 다친 것이다.
고한은 받아든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물었다.
“괜찮소?”
그 사람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경황 중임에도 감사를 표하는 걸 잊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약방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시오. 뼈는 다치지 않았소?”
“예. 정말 고맙습니다.”
그 사람이 떠난 후 고한이 고해를 바라보았다.
고해는 송정서가 사리진 쪽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피비린내가 나는군.”
“예?”
고해가 중얼거리자 고한이 어리둥절해했다.
고해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송정서의 옷자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뒤따르던 호위들도 몸에 피가 묻어 있었고. 거기다 불에 탄 자국도 보였어. 고한, 사람을 보내서 그들이 어디에 갔었는지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