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다음 생에는 나를 사랑하지 말아줘
고선무가 생각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밖에 열다섯 명이 있다고 했지? 그중 열세 명은 통제하기 쉬울 것이다. 모든 잘못을 고해에게 씌우고, 식솔을 잃은 병사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내서 가족을 찾게 하라. 그들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황태손에게 식솔이 살해당한 두 명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다독여주고 소문이 새 나가는 것을 막아라. 그리고 그들을 집에 보내서 원인을 알아보게 해라. 단, 그 이야기가 입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임충이 곤혹한 표정으로 고선무를 바라보았다.
“만약 저들이 끝까지 대원수께 처벌을 요구하겠고 하면…….”
고선무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지금은 대국이 더 중요하다. 임충, 너는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것이다. 자비는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은 병사를 통솔할 수 없다.”
임충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원수!”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건너편 천막으로 간 임충은 열 다섯 명의 병사들 앞에 섰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대원수께서 말씀하시길…….”
임충은 그둘 중 열세 명에게는 모든 잘못이 고해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속히 집에 가서 식솔들을 찾아보라고 전했다.
열세 명은 급히 일어나 자신들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두 명은 일어나지 않고 임충을 주시했다.
그들은 충혈된 눈으로 울면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찍! 소리를 내며 옷을 찢었다.
“나리, 이걸 보십시오! 여기 있는 상처는 나리와 함께 싸우다가 생긴 것들입니다. 그래도 원망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동생은 능욕을 당했고, 어머니는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식솔 전부를 잃었습니다. 이제 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리뿐입니다!”
다른 한 명도 울면서 말했다.
“나리, 나리도 오 씨를 만난 적 있지 않습니까? 그자의 목숨도 제가 살려주었고, 자식도 없는데다가 행동까지 불편한 사람입니다. 절대 돈에 넘어가서 저를 속일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여기, 그가 보낸 물건 가운데 작은 돌은 제 여동생이 항상 목에 두르고 다니던 것입니다. 옷 속에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데, 오 씨가 제 여동생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면 어찌 이를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리!”
두 명은 애걸하며 끊임없이 절을 올렸다.
임충의 마음도 극히 어지럽기만 했다.
그는 두 명의 말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대원수는…….
“걱정 말고 지금 돌아가서 잘 알아봐라.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그때 다시…….”
임충이 위로했지만 둘은 세차게 고개 저었다.
“싫습니다. 우리가 돌아가면 누가 봐주기나 한답니까? 이번에 가면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응보(應報)가 내려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황태손이라는 놈은 신분만 믿고 천하의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평소였다면 놈의 만행도 권세에 힘입어 무마되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당연히 황태손도 군법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황태손, 아니… 송정서 그놈을 군법으로 처단해 주십시오!”
임충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고선무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단속하라 했거늘…….
병사들의 애절한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황태손 송정서 같은 놈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놈 뒤에는 황태자, 그다음에 황제까지 있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복수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대원수님이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지켜주지 않으면 그동안 헛소리만 한 셈이 될 겁니다!”
원래 임충은 두 병사를 동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한 귀로 흘릴 수가 없어 호통을 내렸다.
“허튼소리!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두 병사는 필사적으로 애걸했다.
“나리, 우리는 죽더라도 복수하겠습니다! 애초에 병사를 모집할 때 나리 말만 믿고 따라왔습니다. 그렇지만…… 나리의 말을 들었다가 식솔 전부를 잃고 말았습니다! 흑!”
“어르신, 우리가 왜 죽자 살자 싸우고 있습니까? 우린 송국을 위해서 이렇게 싸우는데, 황태손이란 자가 우리 뒤에서 이런 일이나 벌이고 있다니요! 흑!”
임충도 괴로웠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둘을 타일렀다.
“아마 대원수께서 잘 처리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급한 상황이 아닌가? 전쟁이 끝나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대원수께 요구할 것이다! 그리 믿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럼에도 두 병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믿으라고요?! 나리가 우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이 끝나면 대원수의 말을 누가 듣기나 하겠습니까?!”
임충은 이제 독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칼자루를 잡고 둘을 보는 그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그때였다.
“매형, 매형!”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임충은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옷이 찢어진 채 들어오는 게 보였다.
위병이 그 청년을 따라와서 말했다.
“장군의 식솔이신 것 같아서 데려왔습니다.”
임충이 청년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했다. 돌아가도 좋다.”
위병은 즉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임충이 청년에게 물었다.
“소우, 여기는 어쩐 일이냐? 왜 이 꼴로 되었지?”
소우가 울면서 말했다.
“매형! 우리 누님 위해 복수해 주세요! 누님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겁니다! 으흑!”
소우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임충의 다리를 붙잡고 흐느꼈다.
임충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칼자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임충은 겨우 입술을 떼며 물었다.
“소접이 왜……?”
소우는 방성대곡하면서 말했다.
“황태손 송정서가 우리 누님을 죽었어요! 우리 마을 사람들도 전부 송정서의 손에 죽었다구요! 불에 태워서 다 죽여버렸어요! 송정서 그놈이…… 으윽!”
소우는 끝내 혼절해 버렸다.
임충은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머리와 귀로부터 윙,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임충은 어지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출정 전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우리 남부럽지 않게 잘살고 있잖아요. 저는 무서워요.”
“소접, 나를 믿으시오. 대장만 따라다니면 위험하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요.”
“그렇지만…… 흑! 이번에 갔다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저는 어떡해요? 당신이 없으면 어떡해요?”
“하하! 아무 일 없대도? 나라를 위해 전공을 세우는 건 나의 오랜 꿈이잖소. 그러니 믿고 기다려 주시오.”
“그렇지만 혹시라도…….”
“이미 결심했으니 더 말하지 마시오. 설사 내가 죽게 되더라도, 다음 생에서 다시 그대를 사랑할 거요.”
다음 생(來生)? 다시 사랑해 준다고?
임충은 다리가 풀려서 주춤주춤 옆걸음질 쳤다.
그때 고선무를 너무 따르고 싶어서 불쑥 꺼낸 말…… 다음 생에서 다시 그대를 사랑할 거요.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한 임충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소접, 그런 게 아니오! 그런 게 아니란 말이오!’
지금 돌이키니 억장이 무너질 후회요, 어리석음이다.
소접이 얼마나 슬퍼했을까?
왜 소접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이렇게 이기적인 것일까?
왜? 왜? 왜?
악다문 임충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결코 다음 생으로 미루지 않겠소! 이번 생에서 전부 사랑할 거요!’
임충은 몸을 떨면서 내심 울부짖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혼절했던 소우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임충은 정신 나간 몰골로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소우는 울면서 아까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매형! 송정서는 누님을 마음에 들어 했어요! 지난번 연등회 이후, 놈은 몇 번이나 찾아와 누님을 괴롭혔지요. 누님이 싫다고 했는데 놈은 선을 넘고……. 결국 누님이 놈의 뺨을 때렸어요. 그리고 놈이 일당을 데리고 오더니, 누님을, 누님을…… 욕보이고……!”
소우가 악을 쓰며 부르짖었다.
임충이 부들부들 떨면서 중얼거렸다.
“송정서.”
소우는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말을 이어갔다.
“누님은 굴복하지 않고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어요. 송정서 그놈은 분노해서 부하에게 누님의 시신을 욕보이게 하고, 온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였어요! 누님과 나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불을 질러 다 죽었어요! 그놈이 다 죽였다구요! 흐윽!”
임충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는 바닥에 엎드렸다.
이번 출정에서 공을 쌓으면 대관료를 임명될 수 있고, 그리되면 소접도 관료의 부인이 되어 행복을 누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악몽 같은 현실은 무언가?
“소접! 나는 당신을 떠나면 안 되는 거였소! 당신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었어!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그때, 나는 송정서를 위해 싸우러 오다니! 으아아아-!”
임충은 머리를 붙잡고 처절하게 울었다.
소우가 원망 어린 눈으로 임충을 보며 절규했다.
“누님은 자결하기 전에 북쪽을 보고 있었어요! 매형이 있는 곳이었겠지요!”
이내 소우는 두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마지막에 누님이 그랬어요! ‘임충, 다음 생에는 나를 사랑하지 말아줘요!’라고요!”
임충은 그만 왁! 하며 피를 토하고 말았다.
이 순간 그가 받은 타격은 실로 엄청났던 것이다.
……다음 생에는 사랑하지 말라고?
……생에는 사랑하지 말라고?
……사랑하지 말라고?
임충의 머릿속은, 소접이 마지막 순간에 드러냈을 절망과 단념으로 꽉 들어찼다.
“크아아악-!”
임충은 머리를 감싸 안고 땅을 뒹굴기 시작했다.
그의 절규가 너무나 커서 듣지 못한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임충의 대성통곡에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천막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임충이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보는 듯했다.
소우가 임충을 뒤에서 따라 나왔다.
임충은 걸치고 있던 관복과 신을 천천히 벗었다.
웃통을 드러낸 임충은 고선무가 머무는 천막으로 몸을 돌렸다.
몸에 난 무수한 상흔은 보는 이를 오싹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천막을 보며 무릎을 꿇은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근방에 있던 병사들도 옷을 벗고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임충이 바싹 메마른 입술을 떼며 말했다.
“대원수! 임충이 대원수와 함께한 십오 년 동안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열 번은 크게 다쳤고, 오십 번은 가볍게 다치면서 원망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 임충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대원수! 군법에 따라 황태손 송정서를 죽여주시옵소서!”
처음부터 무릎 끓고 있던 두 명도 울면서 말했다.
“대원수님! 군법에 따라 송정서를 죽여주시옵소서!”
앞서 돌아갔던 열세 명마저 소식을 듣고 달려와 무릎 꿇었다.
열세 명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대원수님! 군법에 따라 송정서를 죽여주십시오!”
임충을 따르던 병사들도 같이 무릎 꿇었다.
임충은 고선무의 오른팔이며, 전투에서 늘 선봉에 선 장수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야말로 진정한 형제 아니겠는가!
임충이 절을 한 번 하자 수백의 병사들도 절을 올렸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많은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임충은 고선무를 움직여 복수하려면 많은 군사를 모아 압박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지금 진영에 있는 수십만 군사들이 임충의 외침을 들은 상태였다.
장래의 황제인 황태손을 벌한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임충의 애달픈 탄원에 대원수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이 모든 것은 오직 대원수가 결단할 일이다.
고선무는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손에 있던 찻잔에 불끈 힘을 주었다.
퍽! 하며 단단한 찻잔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손을 닦지도 않은 채 고선무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고해! 너의 속도를 내가 과소평가했구나! 숨을 쉴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의 안색은 더없이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