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군심동요
* * *
송국의 수도 송성.
고한은 앞에 있는 절름발이 남자를 보고 있었다.
절름발이의 표정은 몹시도 어두워 보였다.
그가 말했다.
“서신은 이미 보냈소. 형제의 식솔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 꼭 지키시오.”
고한이 정중하게 말했다.
“오 씨, 걱정하지 마. 그들은 안전해. 나라 간에 전쟁을 하면 누군가는 희생되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도 희생자를 최소화하고 싶어서일세. 전쟁이 끝나면 다들 안전해질 테니까 걱정 말게나.”
절름발이는 주먹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사실 임충 수하의 식솔이 참사를 당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육국수부 고해가 안배한 계략의 일환이다.
“그럼, 또 봅시다.”
“살펴 가시오.”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눈 둘은 헤어졌다.
절름발이 오 씨를 해결한 고한은 이내 고해를 만나러 갔다.
고해는 예의 그 바둑판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의부, 새로운 소식 들으셨습니까?”
고한의 물음에 고해는 흑돌을 놓으며 웃었다.
“비둘기가 서신을 전한들 늦어져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지금쯤 임충이 송군 진영을 박살 내지 않았을까 싶구나.”
고한이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애초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이렇게 많이 준비한 것도 임충 때문이었습니까?”
고해가 백돌을 바둑판에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지.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다. 진짜는 한 가지만 있으면 돼. 어쨌든 송정서는 자업자득으로 벌을 받게 되겠지 명색이 황태손인데 운수 한번 사납군. 하필 나를 만나서 벌을 받다니.”
고한이 궁금한 듯 다시 물어보았다.
“만약, 송정서 사건이 없었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셨습니까?”
고해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괜찮다. 이 계책은 무중생유(無中生有). 소접이 없어도 소모, 소와, 소문이 있지 않느냐? 게다가 처음에는 송정서를 쓸 생각도 없었다. 황태손이지만 아직 존귀하지는 않아. 송국에는 아직 태사, 승상도 있지. 그들을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야.”
“아!”
고한이 탄성을 흘렸다.
고해가 바둑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음, 이번 판에는 흑돌 하나만 올리면 돼.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많은 흑돌이 있군?”
고해는 흑돌을 집어 자기 앞에 있는 바둑판에 올려놓았다.
고한이 표정을 달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황태손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군요. 그 자리에 누가 있었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테니까요.”
고해가 웃었다.
“하하, 바로 그렇다!”
“이 모두는 임충을 움직이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송정서 하나로 충분할까요?”
고해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충분해. 상대가 황태손 아니냐? 지금 팔십만 대군이 이번 일을 숨죽인 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다. 결국은 고선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암!”
고한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가 고선무라면, 황태손을 죽일 겁니다.”
“그렇지, 죽여야지.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한 마당이니 나는 황태손이 살았으면 한다.”
말을 끝낸 고해가 천천히 백돌을 놓았다.
탁!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 * *
송국 진영 고선무의 천막 밖.
임충이 상의를 벗고 무릎 꿇은 이후의 일은 실로 놀라웠다.
오륙백의 병사들이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영내에 황태손의 악행에 대한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결국 병사들은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황태손은 곧 일국의 앞날이요, 얼굴이다.
대원수는 병사들을 위해 황태손을 처단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내 식솔이 죽었다면, 대원수는 상대의 신분 때문에 침묵만 지키고 있을까?
병영의 의기란 뜨거운 법.
한 사람이 무릎 꿇자 다른 자들도 따라서 무릎 꿇었다.
물결이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듯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무릎 꿇는 자는 백 단위에서 곧 천 단위에 이르렀다.
이천, 사천, 팔천…… 급기야는 만 단위까지 올라갔다.
“군법에 따라 혈친(血親)을 죽인 자를 참하소서!!”
수천, 수만, 그리고 드디어 수십만에 이른 외침들이었다.
그 오열 속에 활화산 같은 분노가 섞여 있다.
수십만 함성은 하나로 모여 천둥벼락이 되었다.
태자는 멀지 않은 곳에서 천둥벼락을 듣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무릎을 꿇자 태자는 덜컥 겁이 났다.
이것은 단순한 탄원이 아니다.
이것은 정변이나 다름없었다.
수십만이 가하는 압박을 정변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할 텐가?
“……어떻게 이럴 수가?”
충격을 받은 태자의 가슴이 벌벌 떨렸다.
고선무의 천막 내부.
고선무는 조금 전 깨트린 찻잔 조각을 털어냈다.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고해. 당신이 줄곧 우리 병사들의 식솔을 납치해 갔었다니.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한 이유가 오늘을 위해서였나? 모든 병사들이 나를 몰아붙이게 만들려고?”
어느덧 고선무는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태자가 놀라서 황급히 달려왔다.
그러다 마침 천막에서 나오는 고선무와 마주쳤다.
“대원수!”
모든 사람이 소리 높이 외쳤다.
임충은 고선무를 향해 간청했다.
“대원수! 군법에 따라 아내의 복수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제 목숨과도 바꾸겠습니다!”
곧 임충이 쿵쿵, 소리를 내며 이마를 연신 땅에 부딪쳤다.
절을 하는 그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피, 눈물, 흙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처연함 그 자체다.
고선무는 임충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번 일은 임충이 만든 것이지만, 고선무는 임충 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 보였다.
임충이 없었더라도 고해가 오늘과 똑같은 일을 만들었을 거라는 사실을 고선무는 잘 알고 있었다.
임충은 오랜 세월 자신을 따라다니며 늘 선봉에서 싸워왔고, 명령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임충의 몸에 난 많은 상흔 역시 맡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오늘 임충이 무릎 꿇고 있으니, 이보다 더 참담한 마음은 또 없으리라.
“군법에 따라 혈친을 죽인 자를 참하소서!”
수십만이 동시에 외치는 음성.
무엇으로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고선무를 보며 그 역시 자신들과 같은 마음이기를 바랐다.
황태손을 죽이란 말이지?
수십만의 외침 앞에서 고선무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치 뚫을 수 없는 갑옷을 입은 고해가 앞에 있는 듯했다.
고해가 눈앞의 수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 같았다.
팔십만 대군을 거느리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고해라고?
갑자기 고선무는 불길함을 느꼈다.
급히 달려온 태자가 고선무를 불렀다.
“대원수!”
지금 태자는 불판 위에 놓인 개미처럼 다급했다.
군병이란 일심단결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런 군병의 마음이 흔들리면 송국 전체가 위험해진다.
군심과 나라의 근본은 지고무상(至高無上)한 것.
태자는 심중으로 통렬한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이놈 송정서! 왜 군병의 가족을 건드렸단 말이냐!’
고선무는 혼미한 정신을 겨우 다잡았다.
이윽고 그는 정중하면서도 위엄 있게 외쳤다.
“내 말을 들어라!”
순간, 온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고선무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했다.
“내 이미 병사들의 식솔을 죽인 자는 누구든 즉결에 처한다고 했다!”
병사들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누구든! 설사 황태손이라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 고선무가 너희들에게 다시 한번 약속한다! 황태손이 너희 식솔을 죽인 게 확실하다면, 군직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법에 따라 그를 처단하겠다!”
그 말을 듣고 태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병사들도 몸을 떨었다.
그들은 고선무를 믿고 있었다.
대원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임충은 붉어진 눈으로 물었다.
“대원수! 정말입니까? 믿어도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임충은 잘 알고 있다.
고선무는 바로 조금 전까지 황태손의 죄를 덮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하려고 수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임충은 고선무를 믿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를 믿는 것이 두려웠다.
고선무는 한탄을 느끼며 대답했다.
“나는 한다면 한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 지금 바로 수도 송성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겠다. 만약 사실이라면 즉시 폐하께 고하고, 황태손을 징벌하겠다!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대원수가 직접 송성에 간다고?
병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선무는 부득이한 이유에서라도 일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의 불신을 얻게 될 것이고, 고해의 손에 의해 모든 것이 끝장나게 될 것이다.
임충은 절을 올리면서 감격을 표했다.
“대원수께 감사드립니다!”
고선무가 병사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번 일은 고해의 음모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믿어야만 한다! 지금 바로 수도에 가서 사건을 알아볼 것이며, 너희 식솔을 해친 자는 엄벌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일은 고해의 음모다!”
군병들이 서로 마주 보며 웅성거렸다.
고해의 음모라는 주장을 누군가는 믿었고, 또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고선무가 소리쳤다.
“내 요구는 간단하다! 내가 군영을 떠나 있는 동안 더 이상 유언비어를 퍼트리지도, 믿지도 마라! 너희 중 억울한 자가 있더라도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 기간 동안 너희는 무조건 군령을 따른다! 어떤가?”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병사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존명!”
병사들은 일단 고선무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고선무가 임충에게 고개를 돌렸다.
“임충, 수도로 가야 하니 준비해라! 반 시진 뒤에 출발한다!”
“예!”
천막 안에 있던 태자는 아연실색했다.
고선무를 막을 힘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이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태자에게 고선무가 말했다.
“태자, 말씀드린 대로 지금 즉시 팔십만 대군을 모아 호뢰관으로 출발하십시오. 서두르셔야 합니다.”
태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언제쯤 돌아올 생각이오?”
고선무는 태자를 위로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가는 시간만 팔 일. 수도에서 호뢰관까지는 사 일. 게다가 수도에 한동안 머물러야 하고. 아마 이십 일 정도 소요되지 않겠습니까? 이십일 후 호뢰관에서 뵙기로 하겠습니다.”
태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호위병들도 자네가 데려가네!”
아들을 죽이려는 자에게 자기 호위병을 붙여 보내다니…….
태자로서는 참담할 뿐이었다.
고선무는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호뢰관에 우리 염탐군이 있습니다. 태자께서 도착하면 염탐꾼이 보고하러 올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할 말을 끝낸 고선무는 재빨리 사라졌다.
* * *
송성의 전부.
고해가 차를 마시고 있는데, 고한이 달려와 보고했다.
“의부, 전서구(傳書鳩)가 도착했습니다. 고선무가 마침내 송성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를 죽일까요?”
고해는 차를 한 입 마시면서 웃었다.
“아니다. 고선무 옆에 고수들이 득실거릴 거야. 아직은 손을 쓰지 말고 계획대로 움직여라.”
“예, 의부!”
대답한 고한은 나타날 때처럼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고해는 찻잔을 탁자에 놓고 창밖을 응시했다.
작은 새 몇 마리가 정원을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며 고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재밌어질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