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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패왕-12화 (12/243)

12화 황태손을 베라

* * *

며칠이 흐른 뒤 송성 조당(朝堂).

송황제는 용상에 앉아 조당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했지만, 눈에 서린 정광은 차고 맑다.

문무백관이 조당의 양쪽에 자리하고, 그 중앙에 두 사람이 공손하게 시립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군신 고선무였다.

그 옆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손 송정서였다.

송정서는 분노로 몸을 떨며 고선무를 노려보았다.

고선무가 크게 소리쳤다.

“황상(皇上)!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송군 열다섯 명의 병사 식솔들이 사라졌습니다. 그 일은 아직 황태손의 소행임을 입증할 수 없으나, 임충의 친족 및 전체 마을 사람들이 황태손과 그 일당에게 참살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확실하옵니다.”

고선무는 단호하게 청했다.

“황태손을 극형에 처하여 일벌백계의 기강을 바로 세우시길 황상께 간곡히 청하옵니다!”

대전 안에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송황제가 침묵하고 있으니 누구 하나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송정서가 적막을 깨고 분노를 토해냈다

“고선무! 정말 간담도 크군! 나를 베겠다고? 그놈들이 왜 죽었는지나 아는가? 놈들은 감히 내게 하극상을 범했단 말이다! 매복해서 나를 해치려고 했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지켰을 뿐이야!”

고선무는 엄한 눈으로 송정서를 바라보았다.

“황태손, 이제 와서 변명이 무슨 소용 있겠소? 그대는 현재 송국 팔십만 군사에 몸을 두고 있으니, 그대의 잘못은 마땅히 군법으로 책임을 물어야만 하는 것이오!”

“뭣이?! 네 감히 죽고 싶은가?!”

송정서는 손을 뻗어 고선무를 치려고 했다.

그때, 용상의 황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실로 방자하구나.”

송정서는 흠칫거렸다.

황제를 보며 그가 말했다.

“황상, 고선무가 감히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황상께서 군사를 보내 저를 지키라 하시지 않습니까? 그날 이후로 저는 밖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한 대신이 입을 열었다.

“폐하. 황태손이 아직 어려서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황태손께 엄한 벌을 내리시고 일단 그분을 옥에 가두소서.”

사실 이것은 송정서를 지켜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송정서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여기저기서 많은 대신들이 청했다.

“황상! 황태손을 옥에 가두소서!”

“태손께 벌을 내려 옥에 가두소서!”

모두가 황태손을 위하여 하는 말이었다.

황제는 인자한 눈으로 송정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차마 손자를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이윽고 황제는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일단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여서 손자를 지키기로 했다.

낌새를 챈 고선무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폐하, 소인이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우리의 상대는 고해입니다. 과거 진태극이 칠국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진태극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해가 뒤에서 군사를 운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 고선무는 최선을 다해 송국을 지키겠습니다.”

그 말에 황제와 대신들 상당수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고선무가 말한 이야기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

한 대신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폐하!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군에는 군법이 있습니다! 오늘 태손을 봐주시면, 내일 누가 우리 송국을 봐주겠습니까? 태손을 즉결 처단하소서! 그래야 군심을 얻고, 국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송정서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방 대사! 당신이 감히……?!”

또 다른 늙은 대신도 눈치를 보며 말했다.

“폐하! 이번 일은 태손의 자업자득이옵니다! 엄벌에 처해서 목숨을 거두지 않으면 나라가 흔들릴 것입니다! 송국을 위해서라도 황태손을 엄벌에 처하소서!”

송정서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유 승상!”

유 승상은 그의 가장 믿음직한 방패막이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죽이라고 하지 않는가?

방 태사와 유 승상의 간언은 그 효과가 컸다.

방금 전까지 송정서를 보호하려던 대신들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송정서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상, 살려주십시오!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안 그랬습니다! 고선무는 군사를 다스리지 않고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합니다! 황상, 부디 이를 헤아려 주십시오!”

황제는 소매 속의 두 주먹을 꽉 거머쥐었다.

몹시도 번민하는 한편으로 냉혹한 결심을 다지는 듯 보였다.

조금 전의 인자한 눈빛도 점점 사라졌다.

예전에 그는 하마터면 송국을 잃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선종께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겨우 나라를 보존했던 것이다.

손자는 열 명 넘게 있으나, 송국은 오직 단 하나다.

마침내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송정서를 사형에 처하라!”

“그, 그럴 수는……! 황상! 황상!”

송정서가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냉정한 호위병들이 그를 잡고 끌어냈다.

* * *

송성 최대의 채소 시장 입구는 인산인해였다.

황태손 송정서가 사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이변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은 박수까지 치며 야단법석이었다.

“저기 봐! 송정서가 드디어 인과응보를 받는구나!”

그들이 주시하는 북쪽에 판관(判官)이 앉아 있다.

그 앞에는 거대한 형틀이 놓여 있고 근방에는 삼십여 관병들이 집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선무와 임충, 그리고 몇몇 병사의 모습도 보였다.

한쪽에서 송정서가 울부짖었다.

“황상! 황상! 제발 살려주십시오!”

황제를 찾던 송정서가 이번에는 태자를 찾았다.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제가 죽습니다, 아버지!”

송정서의 하수인들도 울면서 애걸했다.

“으흑! 살려주십시오!”

판관이 불호령을 내렸다.

“시끄럽구나! 저들의 입을 봉해라!”

관병들이 송정서를 포함한 모든 죄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어서 한 사람씩 검은 천으로 머리를 감쌌다.

판관이 엄명을 내렸다.

“형벌대에 세워라!”

관병이 죄수들을 형벌대로 끌고 갔다.

관병이 발로 차자 삼십 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임충은 눈시울이 빨개진 채 송정서만 노려보고 있었다.

판관이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고는 영패(令牌)를 던졌다.

“시간이 다 되었다. 참(斬)하라!”

한 망나니가 손에 든 칼에 술을 뿜었다.

이를 신호로 망나니들은 일제히 칼을 휘둘렀다.

피육!

삼십 개의 머리가 순식간에 잘려져 땅에 떨어졌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삼척 높이까지 튀었다.

“와아아!”

수많은 백성의 함성이 형장을 뒤흔들었다.

황태손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록 패악무도한 놈이었으나 명색이 황태손이 저렇게 세상을 하직할 줄이야!

통쾌함, 놀라움, 두려움 등등…… 백성들은 저마다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임충은 주저앉은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소접, 복수가 끝났소. 그대에게 미안하오, 정말 미안해…….”

그런 임충을 옆에 있던 병사들이 일으켜 세웠다.

고선무는 천천히 병사들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똑똑히 보았느냐? 임충의 식솔만 제외하고 너희 식솔 전부 고해의 음모에 넘어간 것이다. 태자부를 수색했지만 너희 식솔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내 말을 믿겠는가?”

한 병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대원수, 믿습니다.”

다른 병사들도 큰 소리로 약속했다.

“남은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우겠습니다!”

고선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오후에는 푹 쉬고 저녁에 출발한다. 진영에 돌아가서 병사들에게 모든 것이 고해의 음모라고 전해야 한다. 우리가 힘을 합심하여 호뢰관을 빼앗아야 한다. 알겠느냐?”

임충이 다가와 큰절을 올렸다.

“대원수께 감사드리옵니다.”

고선무는 직접 임충을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가서 좀 쉬도록 하자.”

“예. 저 임충의 목숨은 이제부터 대원수의 것입니다. 죽더라도 전장에서 죽겠습니다.”

“그 마음만이라도 고맙게 받겠다.”

고선무는 탄식하며 그리 대답했다.

임충 이하 병사들을 위해 황태손을 죽였으니, 이번에 돌아가면 군의 사기를 북돋워 줘야 한다.

누구라도 병사들의 식솔을 건드릴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고 일시 흔들린 군심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되면 고해의 어떤 음모라도 무용지물이 되리라.

고선무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당일 저녁.

고선무는 군사를 이끌고 송성을 빠져나갔다. 그들 뒤에는 낮에 시끄러웠던 형장만이 썰렁하게 남겨졌다.

밤이 되어 음침한 형장에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몇 사람이 형장에 나타났다.

한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육국수부 고해였다.

반대쪽에서 나타난 자들은 낮에 형벌을 주관하던 판관과 흑의인, 그리고 한 대의 마차였다.

가까이 다가온 양쪽이 서로 마주 보며 걸음을 멈췄다.

판관이 매우 조심하면서 말했다.

“귀하께서는…….”

고해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태자의 사람이오. 그 정도로만 알아두시오.”

판관이 웃으며 굽실거렸다.

“아, 예. 알겠습니다. 제게 주신 서신을 보자마자 믿고 있었습니다. 황태자께서 그리도 아끼시는 당신의 황태손을 어떻게 참형에 처하실 수 있겠습니까?”

고해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오늘 일은 절대 누설해서는 아니 되오. 수하들 입단속 잘 시키시오. 누설했다가는 목이 떨어질 테니까.”

판관이 굽실거리며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수하들은 믿을 만하니 걱정 마십시오.”

“음. 당연히 그래야지.”

몸을 돌린 고해는 옆에 있던 형벌대를 몇 번 두드렸다.

형벌대 북쪽에 난 작은 문 하나가 열렸다.

그런데 문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곧 한 사내가 죄수복 입은 자를 끌고 나왔다.

죄수를 대동하고 다가온 사내가 공손히 말했다.

“나리의 분부대로 했습니다. 황태손과 다른 죄수와 바꿔치기한 덕분에 황태손께서는 이렇게 안전하십니다.”

죄수복 입은 자는 바로 송정서였다.

고해는 말 대신 송정서의 바지춤을 힐끗 내려다봤다.

오줌을 지렸는지 바지가 젖어 있었다.

고해는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이런, 이런…….’

사내는 송정서의 머리에 씌웠던 검은색 천을 풀었다.

“억!?”

송정서는 눈앞에 있는 고해를 보고 경악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인가?”

고해가 웃으며 말했다.

“일개 장수에 불과한 고선무가 어찌 감히 황태손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황태자를 참수한 것은 단지 사람들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머잖아 진국이 멸망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송정서는 얼이 빠져 멍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 대원수가 나를 살렸다고?”

고해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고선무의 지시를 받고 빼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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