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멸의 패왕-13화 (13/243)

13화 반간계(反間計)

* * *

마차 한 대가 송성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아직 얼떨떨해하는 송정서가 타고 있었다.

송정서는 창가에 기댄 채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송정서가 눈이 휘둥그레져 말했다.

“고선무가 어떻게 나를 살려줄 수가 있지?”

고해가 웃으면서 오히려 반문했다.

“황태손께서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연출된 상황입니다. 즉, 연극이었다는 것이지요.”

“연극이라…….”

“황제 폐하의 연세가 금년으로 얼마나 되시지요?”

“금년 팔십이 세이시지. 그걸 왜 묻지?”

“송국과 진국의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고해의 반문에 송정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국은 이제 호뢰관만 겨우 유지하고 있지. 그런데…… 당신 고해라고 했던가? 진군을 지휘하는 자도 고해라고 하는데, 아주 대단한 모양이더군. 고선무도 그가 겁나서 이렇게 엄한 법을 만든 거지.”

고해가 웃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팔십만과 십만이 싸우면 결과는 뻔합니다. 고선무는 천하제일의 훌륭한 장수입니다만,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전쟁은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건 맞아. 고선무가 그 고현이라는 일개 영감한테 질 리가 없지. 그럼, 혹시…… 아무도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송정서는 뭔가 미심쩍어했지만, 고해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송정서가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말해 봐. 뭐지?”

고해는 황궁이 있는 쪽을 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폐하도 이제는 늙으셨지…….”

그 말에 송정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뭣이?!”

옆에 있던 판관 또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마차 안을 감쌌다.

송정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당신, 당신…… 내 아버지이신 황태자께서 황위를 찬탈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고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해의 능청에도 송정서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어. 팔십만 대군. 사실, 황태자께서 출병에 참여하신 이유는 바로 병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지. 진국을 바로 없애지 않은 것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고. 음!”

고해는 지그시 송정서를 쳐다보았다.

방약무도 하긴 해도 황태손은 황태손이다.

그저 운만 살짝 떼었을 뿐인데 북 치고 장구 치며 혼자 다 하고 있는 것이다.

고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넌지시 말했다.

“고선무가 대원수이긴 하나, 칼잡이일 뿐이지요. 아시겠습니까?”

“나도 알아, 폐하도 이제 늙으셨으니 고선무는 황태자를 모셔야 앞길이 열리지 않겠나? 고선무는 지금 황태자께 미리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거지. 후후! 그래,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어.”

“그런데, 고선무가 왜 황태손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흥! 그건…….”

둘의 대화를 들으며 판관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런 위험천만한 대화를 들은 이상 이제 다른 길은 없다.

두 사람과 함께 끝까지 가야만 한다.

이미 흐름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이다.

중간에 내렸다가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바로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하지 않던가?

대화 중 송정서는 문득 임충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리되면 임충 그놈을 어떻게 하지?”

고해가 미소하며 말했다.

“놈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멍하던 송정서가 무릎을 철썩 내리치며 웃었다.

“그래, 맞아! 하하. 과연 대원수로군. 이런 계획도 세우고.”

고해가 나직이 말했다.

“황태손께선 이미 죽은 사람이니 송성에 나타나면 안 됩니다. 살아 계신다는 소문도 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알았어. 송성을 떠나지. 그런데 어디 숨으면 좋을까?”

“어디든 위험합니다. 그래도 딱 한 군데 있긴 한데…….”

“어디?”

“고선무의 군영입니다. 황태자가 계신 곳이지요. 거기 숨는다면 누구도 황태손을 찾아낼 수 없고, 설사 찾는다 한들 건드릴 수 없습니다. 사실 대원수가 이미 마차를 준비시켜 뒀습니다. 지금 송성을 떠나시기만 하면 되지요.”

송정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렇게 하지.”

고해는 성밖 비탈길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뒤에 서 있던 고한이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호뢰관에서 재미난 일이 벌어지겠군요.”

마차를 응시하던 고해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 이미 재미난 상황을 예견했느니라.”

“과연 의부님의 지략은 탁월하십니다.”

“후후. 그렇다고 굳이 얼굴에 금칠할 필요까지야.”

고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을 따름이다.

* * *

호뢰관 외곽.

팔십만 송의 진열은 실로 호호탕탕했다.

이제 그들 송군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고해의 음모로부터도 벗어났고, 집이 안전하다는 소식도 전달받았다.

근심이 없으니 용기도 백배.

당연히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반면, 병영에 있던 태자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침울했다.

그동안 태자는 줄곧 시간을 계산해 왔다.

이제 고선무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의 귀환은 곧…….

태자는 원한에 찬 얼굴로 붓글씨를 썼다.

아들의 생사조차 남의 손에 맡겨졌는데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무능함이 비통할 뿐.

“태자 전하.”

밖에서 공손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자는 마음을 억누르며 붓을 내려놓았다.

“들어와라.”

관료 하나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관료는 미소를 짓고 있다가 태자를 보고 표정을 고쳤다.

그는 고약한 황태손이 벌을 받아 죽었을 거라 여기고 기뻐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기뻐 웃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전하, 호뢰관에서 적 서른여섯 명이 투항해 왔습니다.”

“고해의 병사들이 도망쳐 왔다고?”

“예. 새벽에 줄을 타고 내려왔다 하옵니다. 제가 보기에 아마 내일은 더 많은 적들이 항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격도 안 했는데 저절로 호뢰관이 무너지니 하늘도 우리를 돕나 봅니다.”

하지만 태자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아들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마당에 어찌 아비가 즐거워할 수 있을까.

태자가 딱딱하게 물었다.

“투항한 놈들이 가져온 정보는 없었느냐?”

관료가 대답했다.

“왜 없겠습니까? 그들은 진국 귀족 출신입니다. 진국이 망하면 가진 걸 전부 잃을까 봐 도망쳤다고 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병력 숫자는 물론이고 지휘소 위치까지 털어놓았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잠시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한데, 그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태자가 말했다.

“일단 가두고 고해에 대한 것을 물어봐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모든 것을 물어봐야 한다.”

“예, 전하.”

관료가 나가자 태자는 멀리 있는 호뢰관을 노려보았다.

“고해, 네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 *

호뢰관 내부의 어느 대전.

고해로 위장한 고진은 수집된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옆에는 진양의와 진천산도 있었다.

원래 이 두 명이 고진보다 신분이 높지만, 지금은 임시변통으로 고진의 말을 따르는 형편이었다.

앞쪽에 문무관료들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몇몇 관료들이 고진을 보면서 말했다.

“군사(軍師), 팔십만 송군이 코앞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우리도 급히 병력을 모집했지만 겨우 십이만에 불과합니다.”

“그 십이만을 다시 편성해 그나마 나아 보이지만, 적은 팔십만 대군입니다.”

고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관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가 무서운가? 십이만 병력이 있고 성곽도 단단히 보수했다. 팔십만 대군이면 또 어떤가? 호뢰관을 넘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거야. 오늘 고선무도 기가 꺾여 돌아오지 않았는가?”

모두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비록 초조하더라도 일단 ‘고해’의 말이니까.

홍포를 입은 관료가 좋지 않은 낯빛으로 말했다.

“군사. 지난밤 삼십육 명이 적에게 투항했는데 그중에는 장수가 세 명입니다. 그들이 군사비밀을 누설할까 봐 걱정입니다.”

그 말에 다른 관료들도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때, 또 다른 홍포 관료 하나가 들어와서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말하라.”

“군사, 큰일 났습니다! 조금 전 좌선봉장이 병사 오십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서남쪽으로 도망치는 걸 목격했다는 병사가 있는데, 아무래도 송군 진영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대전 안은 일시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진양의도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한 명이 도망가면 연쇄적으로 다른 수십 명도 도망칠 거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진천산 역시 고진을 보며 말했다.

“군사, 대책이 있으신가?”

그의 다급한 말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고진은 느긋하게 차를 들고 있지 않은가?

진양의와 진천산은 절로 화가 치밀었다.

그때, 고진의 말 한마디가 소란으로 들끓던 대전을 가라앉혔다.

“뭐가 그리 급합니까? 그들은 내가 보냈소.”

기상천외한 그 말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병사들을 일부터 투항시켜 보냈다는 말인가?

* * *

다음 날, 송태자 진영.

번뇌에 빠진 태자에게 서신 하나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서신을 보며 동공이 흔들렸다.

앞에 있던 관료 하나가 궁금해져 불쑥 물었다.

“전하, 뭐라고 적혀 있는 겁니까?”

태자가 분노에 찬 눈을 들었다.

“흥!”

냉소한 그는 서신을 탁자 위에 내팽개쳤다.

다른 관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어제 팔십육 명이 또 투항해 왔습니다. 새로운 소식을 들고 왔다며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라고…….”

돌연, 태자가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또 투항해 왔다고? 고해!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리다니, 나를 얕잡아봤구나! 밖에 누구 없느냐?! 투항한 놈들을 전부 포박해라. 호뢰관 밑에서 즉결에 처할 것이다!”

모두가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태자는 살기등등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염탐이지.”

얼마 후 호뢰관 성루 아래.

비통한 절규가 합창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자님! 살려주십시오!”

투항하러 왔다가 그만 죽게 된 진국 병사의 아우성이었다.

공포에 질린 울부짖음이 호뢰관을 뒤흔들었다.

성루 아래 투항자 팔십육 명이 꽁꽁 묶인 게 보였다.

마치 고해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고진은 성루 위에서 뒷짐을 진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는 진천산과 진양의, 그리고 관료 하나가 서 있었다.

그들은 전부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송군에게 투항한 진군이 오히려 송군에게 묶여서 끌려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보고 싶어 하는 자가 있으면 성루에 올라와서 보라고 하시오.”

진양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예?”

하지만 고진은 아래를 보며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 예!”

진양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는 급히 내려갔다.

곧 괴이한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가 성루로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병사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최근 적에게 투항한 자들이 묶인 채로 끌려와 울부짖고 있지 않은가?

“아니, 도대체 저거…….”

누군가의 놀란 음성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죽여라!”

아래에서 살벌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악!”

“사, 살려……, 컥!”

팔십육 명의 목이 순식간에 잘렸다.

성루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은 하나처럼 몸서리를 쳤다.

사실 그들 중 상당수는 투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지난 며칠 동안 투항한 자들이 눈앞에서 목이 잘려 나간 것이다.

‘싸워도 죽고 투항해도 죽으니,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인가?’

진국 병사들의 마음속에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처형을 끝난 송국 병사들은 말을 타고 멀리 떠나갔다.

성루 전체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겨우 진양의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군사, 지금 바로 가서 놈들을……!”

그때, 고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오. 어쨌든 이제부터는 도망치려는 자가 없겠군.”

“예?”

진양의는 멍청하게 고진을 바라보았다.

* * *

이틀 후, 마침내 고선무가 귀환했다.

태자에게 그동안의 일을 듣던 고선무가 펄쩍 뛰었다.

“태자 전하! 당했습니다!”

태자는 무슨 소리 하느냐는 듯 눈을 치떴다.

“당하다니? 뭘 당했다는 거요?”

고선무는 한숨 쉬며 말했다.

“투항해 온 자들을 죽이면 어떡한단 말입니까? 그건 고해가 꾸민 반간계(反間計)란 말입니다!”

태자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반간계?”

“예! 태자가 죽인 건 단순히 백팔십육 명의 목숨이 아닙니다. 적군의 투항하려는 마음을 죽이신 겁니다. 아무리 강한 군사도 죽기 살기로 대적하는 적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적은 최후까지 투항하지 않고 싸우려 할 겁니다. 아아!”

고선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0